무서고 (1)
동면에 빠진 날짐승이 따사로워진 햇살에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나듯.
서문경은 침소에서 눈을 떴다.
시야가 어지러워서 초점이 잡히질 않았다.
수십, 수백, 어쩌면 수천.
세지 못할 죽음을 겪고 너무나도 긴 세월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눈의 시각이 틀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침소에 누워 있다가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자연스럽게 안도와 감사가 나왔다.
“계절은 바뀌지 않았구나. 정말, 정말로…… 다행이야.”
너무 길어서, 너무 지겨워서, 언제 끝날지 몰라서.
모르는 사이에 봄이 찾아왔을까 봐 내심 무서웠다.
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진 않을까 불안했다.
목숨을 버려가며 싸웠었던 이유기도 했다.
조급했다. 군신을 보고 ‘편리’에 얽매지 않기 전까지는 빠르게 꺾길 원했다.
‘나와 완전히 다른 길을 간 사람을 보고 배우게 될 줄은 몰랐지…….’
창왕과 궁사, 그리고 군신 이전에 마주한 자들.
그들은 모두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림을 복속시키거나 힘을 합해서 마교와 싸웠다.
하지만 군신은 너무 이질적이었다.
‘차라리 천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낫지. 어찌 역모를 꾀할까!’
장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서문경이 숨을 길게 내쉬고 호흡하는데, 청초한 향기가 났다.
“향초?”
탁자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향기.
자연스레 몸을 들썩이니 통증이 없었다.
중환자가 흔히 겪곤 하는 욕창이나 종기가 없다는 뜻.
‘계절은 지나지 않았다지만, 아주 오래 누워 있던 것 같은데…… 누군지 몰라도 자기 몸처럼 정말 잘 돌봐줬구나.’
두세 시진 마다 몸의 자세를 고치고, 마른 입술에 물을 흘리는 귀찮은 작업.
부모여도 쉽지 않은 일을 누가 해 줬을까?
‘아버지야 워낙 정무가 막중하니 힘들고, 삼촌은 재미없는 일에 관심조차 가지질 않으니까.’
몽롱한 시야를 고치는 동안 즐거운 생각거리가 되겠지.
서문경은 미소를 머금은 채 아는 사람 한 명 한 명 떠올렸다.
‘주 무사도 이제 직위가 높으니까 체면상 하기 어렵고…… 설마 계모가? 아니지. 그분이라면 하인을 시킬 테니까. 그러면 재미가 없는데.’
시야는 점차 묽어졌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심상 속에서 겪은 시간의 왜곡이 현실에 잡아먹힌다.
서문경이 가만히 누워서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심상에서 겪은 경험과 깨달음은 차곡차곡 전신에 쌓였다.
그것이 완전히 자리잡아가는 그때.
한껏 예민해진 귀가 바깥의 소리를 잡아냈다.
저벅, 저벅.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에 서문경은 침구를 정돈하고 눈을 감았다.
‘날 돌봐준 사람이 누굴까?’
즐거운 생각거리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
끼이익, 문이 열렸다.
서문경은 설렘을 안고서 자는 사람인 척 숨을 아주 느리게 내쉬었다.
“오늘도 자고 있네.”
익히 아는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성하민. 하민이가 왜.’
삼 년 전 마교에게서 구한 뒤 시선을 주지 않았다가 재능을 보고 나서야 거둬들인 아이.
복잡한 감정이 서문경을 괴롭혔다.
어쩌다가 구하고, 필요로 곁으로 들인 아이가 이리도 수고로운 짓을 매일 했으리란 생각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하민은 여느 때처럼 끝이 툭 튀어나온 물잔을 서문경의 입술에 기울였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숨이 막히지 않게.”
또르륵.
자그마한 물방울이 입술을 적신다.
촉촉해진 입술로부터 흐른 물방울이 혀에 가 닿으면 몸은 자연스럽게 식도를 열고, 그때부터 충분한 물을 흘렸다.
그 다음은.
“읏차.”
똑바르게 누워 있는 서문경의 몸을 뒤집고서 깨끗한 천으로 등과 허리, 종아리를 잘 닦았다.
땀과 노폐물.
‘여러 가지 좋지 않은 것들이 피부에 배기면 절세고수라도 몸이 상한댔지.’
성하민은 자질구레한 정보를 머릿속에 떠올린 채 서문경을 살피는 데 열중했다.
어느 것 하나 귀찮아하고 않고, 익숙한 듯.
들꽃처럼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너를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 어제는 무림맹주가 와서 하소연을 하고 갔다니까? 가장 바쁜 태동의 시기에 무슨 폐관수련이냐고 말이야.”
노래를 부르듯 나긋한 목소리로 어제오늘 있었던 일을 속삭이는 성하민.
복잡한 감정이 한 번에 날아가는 따스함이 그녀에게 있었다.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어! 웃었다. 우연이겠지?”
“우연 아니야.”
“……어?”
성하민은 깜짝 놀랐다. 어찌할 줄 몰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 직후엔 입술을 우물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무 오래 걸렸다고 짜증이라도 부려 볼까, 아니면 무슨 일이었냐고 물을까?
머릿속에 쏟아지는 질문은 한없이 많다.
끝내 나온 것은 아주 단순한 물음이었다.
아주 평범한 일상처럼.
“잘잤어?”
그 말에 서문경은 내심 모든 걸 밝힐까 각오하고 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그녀가 저리 말했으니, 자신 또한.
“어.”
침소에서 일어나 성하민과 일상을 함께했다.
어느 날 겨울.
동이 터, 땅아래가 훤히 밝혀진 진시(辰時)의 한때였다.
* * *
“일어났으면 당장 가주한테 달려가진 못할망정, 새파랗게 어린놈이 여자랑 노닥거리기나 하고…….”
얼굴은 한없이 진지하지만, 워낙 장난기가 넘쳐흘러 입술 끄트머리가 파르르 떨린다.
자칭 한족의 무신, 가문 내부에서는 사고뭉치.
서문패는 여느 때처럼 서문경을 놀려먹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어허. 조카야, 어른이 말하는데 미음이 목구멍에 넘어가느냐?”
“오랫동안 누워 있어서 소진된 기력을 채워야지요.”
얄미운 조카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미음을 호로록 삼켰다.
평소였다면 여기서 딴지를 걸었을 테지만…….
‘뭐지? 정말로 그 말코도사 말대로 수련이라도 했던 건가?’
노도(怒濤)가 포효하는 거친 바다와 같던 기세가 침잠하다 못해 고요했다.
눈은 또 어떤가?
‘우묵하고 깊다. 정심한 내가기공을 익힌 노도사나 가지는 눈빛인데.’
전장에서 힘을 발휘하는 서문세가의 동공은 저런 눈빛을 지닐 수가 없다.
자길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수천, 수만의 군세 앞에서도 의연하게 만드는 야수의 눈빛.
그것이 서문경에게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제 와서 다른 내공심법을 익힌 건 아니겠지?’
마교와의 싸움이 한창인 이때, 가전심법의 공력을 다른 형질로 바꿨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서문패는 일말의 의심이나마 지우기 위해 물었다.
“그동안 뭘한 거냐? 뭘 했기에 기운에 힘이 없어졌어?”
“삼촌에게 그리 보입니까?”
“뭐?”
“다행이네요. 삼촌이 착각할 정도면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선 파악할 수 없을 테니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일 같은 기세가 서문경을 중심으로 퍼졌다.
노도. 아니, 가까워지는 폭풍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서문패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완전히 다스린 거냐?”
“정(靜)과 동(動). 어느 쪽이든 일으키고 잠재울 수 있어요.”
“그건.”
“삼촌이 생각하시는대로.”
서문경은 기운을 수습했다.
“오늘부터 서문세가의 무서고(武書庫)에 출입하고 싶습니다. 아, 아버지가 가진 비밀 창고까지도요.”
“그건 또 어찌 아는 거냐?”
어찌나 어이가 없었는지 서문패의 눈이 헛것을 보듯 했다.
예전부터 놀라운 조카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결이 다르다.
서문패는 서문이현이 어떤 사람인 줄 안다.
그가 만약 비밀로 창고를 만들었다면 절대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곳에,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가주의 자리를 넘겨주거나 피치 못할 때가 아니면 자기 아들이든 아버지든 알려 주지 않을 텐데.’
언제 서문이현에게 들었을까?
서문패가 생각하기에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보나마나 일방적으로 털어 가겠지.
그제야 합당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가주. 아니, 네 아버지께 직접 말하지 그러냐?”
“직접 허락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제 막 깨어난 사람이라 환자처럼 보일 텐데.”
“내가 보기에도 환자는 맞아.”
“쉴 시간이 어딨습니까. 누워 있느라 시간을 썼는데.”
“……헛된 시간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하하.”
서문경은 요망한 미소를 지었다.
정과 동.
내공심법을 익힌 자라면 ‘멈춤’과 ‘흐름’을 자유자재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십중팔구는 기혈이 막히거나 역류하여 죽고 말 것이다.
하지만 서문경은 아니었다.
심상에서 있었던 싸움과 격의 상승은 본디 무인들 사이의 전설로 남기만 한 것을 가능케 했다.
예를 들면.
콰르르르…….
“매화심법이냐? 아니, 이건 너무 과한데.”
서문패가 인상을 찡그렸다.
부옇게 일어나는 자색의 기운.
화산파의 대표적인 내공심법이다.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환(幻)과 동(動)의 기질을 가져, 화려한 매화검법에 어울린다.
그것이 금세 천천히 정지하여 향을 풍기기 시작하니.
“자하신공……? 제대로 된 가르침 없이도 이 정도까지 흉내가 가능하다고?”
“다른 것도 가능하지요.”
서문경은 왼손을 아주 느릿하게 휘둘렀다.
아무것도 쥐지 않았지만, 형의(形儀)는 남아 있다.
숙련된 검객이라면 어렵지 않게 서문경의 움직임을 보고 헤아릴 수 있었다.
우에서 종으로, 종은 다시 공간을 격해서 사선으로.
손으로 만들어 내는 수많은 직선.
직선은 수없이 많은 선을 그리고, 어쩔 땐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치솟기도 한다.
그 행동의 숫자가 총 이십사.
서문패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십사수매화검법……!”
“삼촌이라면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대충 눈으로 보고 배운 수준이 아니야. 화산의 장로가 보아도 눈물을 흘리고 미래를 맡길 수준이었지. 대체 언제 배운 거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서문경은 자하신공의 흉내를 멈췄다.
자색 연기를 이룬 공력이 한순간 흩날리며 사라졌다.
그 사이로 절대고수의 고요한 눈빛이 드러났다.
“가전무공의 십팔반.”
“……!”
“그걸 완전히 수복하고, 제 것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텁.
서문경은 서문패에게 포권했다.
삼촌과 조카가 아니라,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지 않겠다는 무인의 경의이자 인사.
서문패가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집안에선 얌전하게 지낼 줄 알았더니…… 몸이 낫자마자 사고 칠 생각이나 하고…… 나도 한 수 접어줄 천덕꾸러기야. 응?”
“대답은요?”
“도와주마.”
서문패는 서문경의 어깨를 짚었다.
“내가, 이 한족의 무신이.”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