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95화 (193/250)

군신 (2)

군신의 검은색 장포가 묵직한 경파에 출렁인다.

아주 오래 전 해남에서 보았던 파도.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과거를 떠올렸다.

아차 하는 순간에 무의식이 ‘죽음’을 떠올리고, 기억의 행간을 끄집어낸 것일까.

까득.

엄지손가락으로 검의 손잡이를 긁는다.

손톱이 들린 통증에서 오는 지독한 현실감.

얼어붙어있던 공력이 금세 검으로 빨려 나갔다.

심상을 이루는 구름과 하늘의 기운마저 서문경의 출수를 돕고, 의식하지 않은 사이에 도달한 무(武)는 자신도 모를 만큼 깊었다.

그러나 군신은 적의 성장을 지켜볼 만큼 자애롭지 않았다.

“꿇거라.”

검은색 장포가 시야를 휘감았다.

하나로 이루어진 파도 속에 한 점 한 점 번짐이 있으니. 경파가 팽창하는 광경이었다.

‘뭐 저런…… 저대로 두면 안 돼!’

서문경은 자신이 펼치는 무공을 이해할 겨를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는 팔이 온갖 기운들 때문에 부서져 버릴 것 같다. 아니, 부서져도 내쏘는 수밖에.

서문경의 왼쪽 눈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일(一)자로 휘두른다. 검은색 장포로 이루어진 파도를 가르는 일격.

아직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새로운 경지의 일초였다.

쫘자자작!

장포가 한순간에 세 갈래로 찢어져 경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니.

“……!”

군신의 인상이 굳어진다. 내심 하수라고 여긴 서문경의 초식에 담긴 경지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기에.

천마.

무예십팔반의 무공을 완성한 자.

……그리고 무적이라고 자만했던 군신을 무참하게 꺾은 지존.

주먹이 자연스레 쥐어진다. 죽고 난 뒤 설욕의 마음은 지웠으나, 막상 비슷한 것과 마주하니 생각이 달라졌다.

망자(亡者)의 넋은 허망하지만, 뜻은 이어질 수 있는 법.

“그릇된 황제에게 충정을 다하겠다면 그 검의 날카로움을 보여라.”

천마에게 닿을 검을 제련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선자(先子)의 몫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서문경은 그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군신의 행적을 어렴풋이 깨달았기에 그를 증오했다.

“되돌아가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거냐?”

“마음대로 생각해라.”

의욕을 낼 수 있게 만든다면, 아무렴 이유 따위야.

군신은 여유롭게 웃었다.

장포를 휘두르는 손짓에 머뭇거림은 없다.

공간마저 일그러지는 경력과 사방팔방으로 뻗는 백광(白光).

수평의 방어식이다.

군신의 무론에 있어 초식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수직과 수평. 잘 짜인 완성도와 굳건함.

무공의 완성이란 복잡한 이름과 무학 따위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펼치느냐에 달렸다.

그래. 서문경이 연거푸 펼치는 저 일(一)자의 일격처럼.

꽈아아앙!

‘젠장할.’

서문경은 인상을 찡그렸다.

손목이 삐걱거릴 만큼의 반탄력이 검을 저지한다.

내공과 심상 안의 기운을 모두 운용하고 있음에도 부족을 확연하게 느낀다.

믿을 수 없이 견고하고 탄탄한 장벽.

완벽한 방어. 그대로 서 있는 군신의 장포는 무너지지 않는 철벽이었다.

‘저렇게 방어벽이 두터울 줄이야.’

뚫을 수 있을까?

일념의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무공사전을 통해 배운 모든 것들이 스치고 지나가, 지금 펼치고 있는 무명(無名)의 초식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이 지금 펼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짧은 고민이 스쳤다. 당장 나오진 않았다.

열흘은 가만히 앉아서 파훼해야 나올 해답이었다.

그러나 그런 여유를 군신이 줄 리가 없다.

쿵!

군신의 일보가 큰 진각을 발했다.

그를 중심으로 한 깊고 둔중한 파문. 형용할 수 없는 힘이 철기둥을 찌그러뜨릴 듯 맥동했다.

저 힘이 그대로 장포에 실린다.

철벽은 산사태가 되어 덮친다.

‘제기랄.’

서문경의 체념이 고민을 덮었다.

저걸 어찌 막을까? 불가능하다.

무명의 초식을 펼쳐도 결국은 일(一).

하나의 직선은 막을지언정 나머지는 흘리지 못한다.

‘차라리, 차라리 죽어서…… 다시 시작한다면…….’

운이 좋으면 군신의 지척에서 되살아날 수도 있겠지.

거리를 좁히지 못하니 몇 번을 죽어서 도전하면 된다.

편리(便利)한 방법은 수없이 많았다. 아니, 당장 군신에게 굽히고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즈음.

서문경은 운룡대팔식을 펼쳐 자리에서 벗어났다.

-경아, 우리는 대명의 군관이다. 잊지 마라. 부질없고, 누군가에게 우습게 들릴지라도 언젠가 큰 자부심이 될 것이다.

서문관아의 굵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다음에는 다부진 얼굴이, 좁디좁은 가주실에서 정무를 보는 똑바른 자세가.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편리에 취하면 당장은 편해질 수 있다. 누구든, 제 잇속을 차리자면 쉽게 살 수 있겠지. 나도 그것을 부정하진 않아.

-하지만 우리는 군관이다. 갑갑하고 좁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즐길 수 있는 것은 극히 적지. 그러나…… 그곳이기에 추구할 수 있는 신념과 뜻이 있는 법이야.

아버지는 다른 군관이 그렇듯, 호국(護國)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어깨를 짚었다.

-네가 찾아라. 그리고 언젠가…… 나에게 말해 줘라. 언젠가 이 좁은 곳에서 알을 깨고 나갈 때, 네가 추구하는 뜻이 무엇일지 궁금하구나.

서문경이 추구하는 뜻.

다시 살아나고도 마교와 대적하고자 하는 이유.

그건 단순히 천하를 평온하게 한다, 대명을 지킨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금 더 근본을 더듬어 가자면……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가 있다.

비록 얼굴 한 번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서문세가의 뒷산에서 늘 자신을 지켜봐 주리라 믿는다. 또, 자신을 믿고 따르는 주백경이 있고, 가문이 있다.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면 엄격하게 타이르는 아버지가 있기에 편리한 사도로 걷지 않았다.

‘편리(便利)를 따지자면 쉽게 갈 수 있었겠지.’

황제가 될 수 있다면 마교와 쉬이 대적할 수 있다.

군관의 의무를 저버리면 천하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쉽게 충족할 수 있겠지.

하지만 군신은 그것을 저버렸다.

황제가 되어 또다른 혼란을 낳고, 편리를 때때로 왜곡하여 써먹었을 것이다.

서문경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본신의 경지가 그리 뛰어남에도 왜 기병(奇兵)을 따로 팔뚝에 만든 거지?”

“네가 알 일은 아니다.”

“주변에 신뢰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가 아닌가?”

“……닥쳐라.”

군신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인 듯했다.

서문경은 그걸 보고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아버지가 말하지 않았나?”

“……?”

“편리를 추구하다가는, 가장 값진 신념과 뜻을 잃는 법이라고.”

그 말에 군신이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전에 말했듯, 숭고한 뜻보다는 천하의 안정과 승리가 중요했다고 말하겠지.

서문경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아버지가 없었군. 일찍 죽어서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거야.”

이해를 벗어나있던 군신이 이제야 사람으로 보였다.

그랬다. 애초에 서문경은 틀리지 않았다.

그 확신을 얻기 위해서 번민한 적도 있었다.

‘나도, 저자처럼 편리를 추구하자면 능히 할 수 있었어.’

천무학관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약점이야 알고 있다.

잘 자극한다면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다.

오걸과 천하십대고수라고 다를까?

그들도 인간이다. 약점은 늘 있다.

익명으로 찔러서, 마교의 방식대로 움직이게 할 수도 있었다.

척안룡 담정이 다락방에 숨긴 서책이 그러했겠지.

하지만 서문경은 그러지 않았다.

말하지 않고 그를 존중했기에, 그 또한 서문경을 악우로 인정했다.

서문경이 서문세가에게 빌린 시야와 뜻, 신념.

그것은 두 번째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점차 두들기고 고민하면서 완성시켰다.

인연을 쉬이 이용하지 않고 존중하고, 군관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서문경은 군신이 더 이상 강자로 보이지 않았다.

“만인지상의 위치에 올랐으되, 결기를 잃은 자를 어찌 지존으로 모실 수 있겠나?”

“……뭐라고?”

“난 당신 같은 자를 황제로 모시지 않는다. 네가 말한 대로 지금의 천자께선 무정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뜻이 내가 바라지 않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분 또한 책무를 다하시는 거다.”

설령, 마교를 적으로 대하는 일이 조금 늦어졌다고 할지언정.

황제의 뜻은 틀어지지 않았다. 조금 느렸을 뿐이다.

그 시간을 참지 못해서 군관으로서의 의무와 결기를 잃고, 자리를 차지한 군신은 서문세가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

서문경의 머릿속에 혼란은 가라앉고 점차 정심해졌다.

천주심경과의 순응.

깨끗해진 정신으로 보는 세상 속.

군신은 검은색 장포를 입고 있었고, 서문경은 백의를 입고 있었다.

서문경의 오른팔이 크게 휘둘러졌다.

꽈아아아앙!

이름을 붙이지 않는 무학이 검 끝에서 펼쳐진다.

군신이 펼쳐 내는 경파를 모조리 깨부수면서 나아간 검강이 마침내 가슴팍을 강타했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군신이 뒤로 밀려 나갔다.

찢어진 장포 뒤로 묵색의 철갑이 광채를 냈다.

또 기물인가.

서문경은 무정한 눈으로 군신을 보았다.

이제는 동류로 인정하지 않는 눈. 철저한 타인을 보는 시선이었다.

“……하, 하하.”

군신의 웃음이 천주 정상에 울렸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이해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던 후배에게 처참하게 버림받은 기분.

만인지상의 위치에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좋았다.

“아주 작은 깨달음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몸으로 깨닫게 해 주어야겠지.”

군신의 몸은 비검(飛劍)이 되었다.

한 줄기 바람처럼 표홀한 일격이 서문경을 향해 치달았다.

그 사이에 서문경은 무명의 초식을 떠올렸다.

이름은, 붙이지 않는다.

어차피 수많은 무공이 뒤섞여서 무엇이 중심에 있느냐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서문경의 무공엔 근본이 있었다.

서문검법.

가문의 검법을 마지막으로 완성했다는 뜻에서, 결(訣).

서문경의 검이 일(一)자로, 일자는 십(十)자로 서서히 수많은 선을 그렸다.

“서문검결(西門劍訣).”

나직하게 읊조리며 펼친 검법에 비검은 부서지고 꺾였다.

한 가지의 검법에 수없이 엮인 무학들.

신비한 무공사전은 그것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마지막 장에 적었다.

무예십팔반, 완성.

무엇을 펼쳐도, 무슨 무기를 들더라도 서문검결에 필적하는 완성도를 가지게 되리란 증명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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