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신 (1)
물을 넣으면 명주가 나오는 호리병.
한 걸음에 백 리를 걸어가는 축지법.
혹은, 무공을 보는 것만으로 익힐 수 있는 재능.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하다가 헛웃음을 흘리는 공상들이다.
누구도 믿지 않을 환상이기에.
-아, 글쎄. 그게 사실은 말이야…… 천산산맥에 있는 천마총의 지하에 말이지, 수십 명의 시체와 함께 묻혀 있다는 것 아니겠나!
매화자(賣話者:이야기꾼)는 환상에 살을 붙여서 사실 존재한다며 능청을 떨고, 돈을 번다.
누구도 믿지 않기에 흥미롭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진지하게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십중팔구 미쳤냐고 묻겠지.
그러나 서문경은 다르다. 표정을 황급히 숨긴 채 침묵한다.
그 의미를, 생전에 군신으로 불린 사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자네는 달라. 실제로 있다는 걸 아는 거야.”
“…….”
“침묵이 자네의 답인가?”
“……나는.”
서문경의 고민이 깊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누구나 한 번쯤 공상이나 환상으로 끝내고 마는 기물의 존재를 평생 밝힌 적 없다.
아버지인 서문이현이나 평생의 지우로 삼은 주백경에게도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지내왔다.
그 존재를 어찌 순순히 말할까.
‘태도가 바뀔지도 몰라.’
오늘 처음 본 군신에게 신뢰란 없다. 하물며, 신하의 맹세를 어기고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오른 자.
그의 이야기 중 믿을 구석이 있기나 할까?
서문경은 불신이 한가득 스민 눈으로 군신을 노려보았다.
“하하.”
군신은 웃었다.
“내가 실수했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밝히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래간만에 보는 사람 얼굴이라 너무 솔직했나 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양의 빛.
하늘에서 내리쬐는 열선이 군신의 등과 머리를 타고 흐른다. 강렬한 아지랑이가 서문경의 시야를 사로잡고, 기감을 압도한다.
“후생(後生), 혹은 후배여.”
‘벌써 알아차렸나.’
서문경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일전에 만난 창왕이나 궁사는 수십, 수백 번을 싸우고 나서야 같은 혼을 지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군신은 처음부터 알아차렸다.
혼에 쌓인 집념 혹은 무공의 격이 다른 탓일까?
어느 쪽이든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서문경은 생전에 군신으로 불린 사내의 심기를 건드렸으니까.
배격(排擊) 혹은 굴종. 둘 중 하나.
군신의 목소리에 조금 전까지 존재했던 따사로움은 없다.
“지금이라도 꿇고 진언해라. 용서하겠다.”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명령.
서문경이 고개를 젓자, 군신이 다시 말했다.
“서문세가의 장자, 경은 천자 앞에서 충의로 예를 다하라.”
서문경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떼를 쓰듯 개인적인 감정은 아니다.
군신이 가진 위엄과 강함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스스럼없이 사실을 논하니.
“당신은 내가 따르는 천자가 아니야.”
“뭐?”
“내 충의와 예는 군신을 자칭하는 천자가 아니라, 정통성을 가진 천자에게 다할 것이다.”
“어리석은 놈……!”
군신은 진심으로 어리석다는 듯, 그리고 한탄 섞인 목소리로 서문경을 꾸짖었다.
“네가 따르는 천자는 천하를 굽어살피지 않는다. 마교와 몇 번이고 싸웠다면 알 것이다. 민초가 신음하고, 외세가 침탈하는 와중에 그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황금의 궁전에서 손가락을 휘둘렀다는 걸.”
“…….”
부정하지 못한다.
서문경도 알고 있다.
천자께서 정이 많은 분이 아니란 걸. 마교와 싸우는 건 신하요, 신음하는 것은 천하 아래 수많은 민초라.
아니. 애초에 이런 것으로 말다툼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이미 군신은 죽은 자다. 그에게 신비한 무공사전을 보여 준다고 해서 나쁜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대단한 조언을 들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서문경의 근본은 군문에 있다. 신하. 하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자.
‘내가 과거로 되돌아간 까닭이 하늘에 있다면,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스스로 하늘이 된 자와 어찌 가까이 지낼까.’
고민은 끝났다. 서문경의 눈에 굳은 심지가 가라앉았다.
군신은 쓰게 웃었다.
“너 같은 놈이 있었다면 얼마나 든든했을까.”
어떠한 말과 이득에도 흔들리지 않는 결기는 천금보다 귀하다는 것을, 군신은 알았다.
그래서 애석했다.
“네 세상의 천자는 이런 보석을 가까이 두고 천하의 영약을 퍼붓지 않았단 말이냐. 한탄스럽다. 한탄스러워.”
“욕하지 마라.”
“……?”
“군신의 자리에 서기까지, 어떠한 욕심이나 역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느냐?”
서문경의 물음에 군신은 고개를 저었다.
아주 또렷하게, 고민 한 점 없이.
그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마교에게 이기려는 것이 욕심이고, 빠른 길을 택한 것이 역심이다. 부정하지 않겠다. 하나 너도 누구에게 충정을 다할 것인가…… 고민할 필요가 있지.”
서문경은 군신의 말속에 담긴 날카로운 송곳을 알아차렸다.
마교에게 이기려는 것은 욕심이다.
그들은 수백 년을 인내하여 천하에 잔가지를 뿌렸다.
모두 걷어 내는 것 자체가 허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빠른 길이란 곧 군권을 독점하는 길.
황제일지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필연적으로 많은 반발을 산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군신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흘리게 했을까?’
묻는다고 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군신(軍神)이니까. 마교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외에 목표를 두지 않았겠지.
서문경은 입술을 달싹였다.
자신에게 다짐하듯, 확고한 뜻을 담고서.
“충정은 목적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그 당연한 진리를 어찌 고민하라 종용하느냐?”
“……어리석은.”
군신은 저 어린 청년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혐오감이 들었다.
그에게 옛 자신을 비추고, 후회라는 실금이 갔다.
이해를 바랄 순 없다.
오로지 군신의 과거와 경험에서 비춰지는 것이니까.
초로에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마교와 싸우며 생긴 고집이다.
그러니까.
군신의 입술이 비틀렸다.
“일어나라.”
대화는 틀어졌다.
서로 따르는 대의가 다르고, 길이 갈라졌다.
말로 설득하지 못했다면 굴종.
힘으로서 제압하여 뜻을 펼치는 수밖에 없으니. 군신과 서문경의 머릿속에서 수차례의 초식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서로 상상하는 바가 달랐으나, 근육의 사소한 움직임과 시선에서 점차 허상이 겹쳤다.
허상은 곧 실체가 된다.
천주심경과 분심조화결이 만든 특별한 세상이기에.
서문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척 칼을 뽑았다.
“역시나.”
군신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콰아아아!
군신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온다.
멸마(滅魔). 검신에 새겨진 두 음절에 짙은 사기(邪氣)가 배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베었기에 저런 걸까?
묻는 것조차 실례다. 군신이 검을 직선으로 뻗었다.
쩌적, 대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귓전을 스치니.
“……!”
서문경은 반사적으로 검을 뉘였다.
군신의 검에서 몰아치는 경력, 그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이 사정없이 비틀렸다.
콰직, 까드드득!
경력을 흘렸음에도 육신이 한참이나 밀려나간다.
서문경의 낮은 침음이 흘렀다.
“무슨…… 무공이지?”
“수직.”
절세의 무공을 보이고도 군신은 가벼운 것을 말하듯 했다.
오히려 서문경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것 같았다.
“무예십팔반, 결국 수직과 수평이 아닌가?”
당연한 것을 말하는데 따져 물을 수가 없다.
군신의 일격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었다.
서문경은 선홍색 핏물을 뱉으며 고개를 털었다.
잊었다.
군신이 보인 무공의 위압감과 살기, 충격마저도 잊었다.
심상이 가져다 준 검과 천주로 이루어진 대지, 그리고 사람.
그뿐이다.
텅!
서문경의 신형은 곧 바람이 되었다.
검 끝에는 수많은 검법이 담겼다.
검치에게 배운 신공과 태허검결, 무연창…….
수많은 무공이 검 끝에 뒤섞여서 한데 뭉쳤다.
강렬한 의념이다.
전생으로부터 이어진 집념이 절세의 무학을 억지로 엮었다.
콰르르르!
서문경의 진정한 일초에 맞서 군신의 멸마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뻗어지는 공간에 침범하는 사기. 기운을 밀어붙이는 경력.
군신의 본신 무학, 멸마삼검(滅魔三劍)이었다.
파아아앙!
두 검 사이에 기의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그러나 물러남은 없다.
전진하는 두 신형만이 있다.
운룡대팔식으로 소용돌이를 넘나드는 서문경과 소용돌이 자체를 파고드는 군신, 두 사람의 손에서 강력한 내력이 쏘아졌다.
쩌적!
기의 소용돌이 안에 한 쌍의 구름이 서로 영역을 다툰다.
그렇게 검과 내력이 다투는 와중에도 쉴 시간은 없으니.
군신은 앞으로 반보를 밟고서 발끝부터 몸을 오른쪽으로 뒤틀었다.
아주 기초적인 무공, 철산고(貼山靠).
절세고수가 손수 펼친 첩산고는 산을 꺾고도 남았다.
서문경은 속절없이 뒤로 날아갔다.
“커헉!”
속에서 핏물을 남김없이 토할 것 같았다.
서문경의 폐부는 이미 엉망진창. 가히 삼십 일 동안은 정양해야 나을 내상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심상.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다시 도전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목숨을 잃어도 재생할 수 있지만, 이번 상대는 달랐다.
“항복이라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어디 한번 해 볼까.”
군신은 어느새 서문경이 쏘아 낸 내력을 해체시키고서 가까이 다가왔다.
사람을 죽이는 건 이처럼 간단하다는 듯.
쩌억!
가벼운 발길질로 두 개의 사혈을 점한다.
수십, 수백의 살인을 손수 저지르지 않으면 알지 못할 기예.
‘뭐, 저런……!’
서문경도 할 수야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거리낌 없이 행하고, 완벽하게 점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얼마나 많은 사투를 겪은 걸까.
초로에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평화라고는 경험하지 못한 걸까.
“커헉!”
서문경은 피를 한 됫박이나 토하고서 한쪽 무릎을 꿇고 일어났다.
‘금방 일어날 줄 알았더니…….’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심상에 빠져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투를 벌여야 할까.
언제쯤 군신을 제압할 수 있을까.
어느 것도 미지수였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자는 나보다…… 몇 수는 위에 있다.’
무예십팔반의 완성.
막연하게 생각한 목표에 가장 가까운 자가, 같은 혼을 지닌 선배가 눈앞에 있었다.
“항복할 건가?”
군신의 물음에 서문경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꺾이지 않아.”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하지.”
군신은 피식 웃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의기를 한번 볼까.”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