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89화 (187/250)

날사이 (1)

팔부기재.

천무학관의 황금기, 서문경과 함께 수학한 여덟 무인을 두고 호사가가 붙인 이름이었다.

그러나 남궁명이 불미스러운 일로 죽고, 서문경이 너무나도 뛰어난 무훈을 세우며 동렬에 세울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협(四俠), 이봉(二鳳), 일은(一隱).

각지를 떠돌며 협행을 하는 무인 셋.

둔걸과 연준호, 성하민과 둔걸이 사협으로 불렸으며.

사문에서 두문불출한 양무연과 유화가 이봉으로 묶였다.

특히 검봉 유화는 아미파의 검법을 온전히 이었다고 하여 세간의 관심을 빨아들였다.

미래의 검후(劍后)라는 명성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한 명의 은자.

운룡 청겸은 천무학관에서 졸업한 이래로 세간의 눈에서 사라졌다.

곤륜파에서도 청겸의 행방을 두고서 말이 많았다.

“그놈이 본산에 오는 걸 그리도 싫어하더니만, 결국 호북성에서 숨어 지내는 것 아니요?”

“설마 정파의 후인이라는 애가 철없이 지내겠소?”

“…….”

“…….”

곤륜파의 두 장로가 말없이 서로를 흘깃 쳐다보았다.

아주 부끄러운 일이지만, 불가능하진 않았다.

청겸의 성품이 워낙 철딱서니가 없고 도복을 갑갑해하는 녀석이었다. 겁 또한 많아서 절벽에 처음 오를 때까지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게다가 그놈의 운룡대팔식은 사문에서 가장 뛰어난 수준이라고 일컫지 않나.

장로 중 가장 항렬이 높은 승룡관주가 침음을 흘렸다.

“……그놈이 곤륜파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일을 행하질 않길 바랄 뿐이요.”

“동의합니다.”

“얼른 본산으로 잡아와야 할 텐데요.”

장문인인 고진성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가뜩이나 북적과 접경한 지역, 청해성.

지금이야 서문세가와 정의맹, 그리고 관인의 지원으로 잘 버티고 있다지만, 저들이 칼을 들고 달려든다면 피를 흘리는 건 곤륜파의 도사이고 청해성의 선량한 민초였다.

‘이때야말로 겸이가 필요하거늘.’

경신법으로 따지자면 곤륜파에서 제일가는 수준에 이르지 않았나.

청겸이 본산으로 돌아온다면 곤륜파의 후지기수에게 큰 자극이 되는 것과 동시에, 운룡대팔식을 가르치는 교두(敎頭)로서 자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아이가 펼치는 운룡반천장은 일대제자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으니.

“언제까지 은자로 불릴지…… 타 문파와 교류하는데 얼굴이 화끈해지려고 합니다.”

사협, 이봉, 그리고 일은.

곤륜파의 체면 때문에 은자라고 불리지, 사실상 마교에게 무서워서 숨은 것 아니냐고 수군거리는 자가 많았다.

그때마다 곤륜파는 헛기침했지만, 언제까지 나타날 걸 기다릴 순 없는 법.

하물며…… 마교의 음습한 공세에 여러 협객이 검을 들고 일어나는 시국이 아닌가?

서문경과 동기로서 천무학관을 졸업한 명문 거파의 제자가 은둔하는 꼴이 좋게 보일 리가 없다.

고진성은 장문인으로서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한 상단을 떠올렸다.

신뢰가 점점 떨어져서 생기는 문제 중 하나였다.

‘그나마 청해성의 상단이야 굳건하지만, 다른 곳은 가까운 공동파에게 뺏기게 생겼어…….’

고진성의 침음에 말석의 장로가 입을 열었다.

“서문세가에 부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으음.”

고진성이 탐탁지 않다는 음색을 흘렸지만, 장로의 뜻은 굳건했다.

“장문인께서 서문세가에게 빚을 지는 걸 경계하심을 압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하산한 제자를 기다려 줄 순 없는 법이지요. 특히, 일공자는 본산의 신공을 배워 가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대외에선 서문 공자를 두고 곤륜파의 문외제자라고 불립니다. 그 아이 또한 부정하지 않고 있으니…… 빚을 지는 것이 아니라,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과연!”

고진성은 흡족하게 웃으며 무릎을 탁 쳤다.

곤륜파가 청해성의 수호라는 의무를 지고 있긴 하지만, 청겸을 찾아 달라는 건 개인적인 요구.

뚜렷한 명분과 거래의 실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 난항이었건만, 이리도 적합한 이야기가 있을 줄이야.

고진성의 눈가 주름이 흡족함에 깊어졌다.

“지금 서문세가에 연통을 보내지요!”

“좋습니다!”

고진성과 장로들은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시원하게 의논을 끝냈으나.

그 다음 날.

서문세가가 마교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저래서야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 여유가 있겠습니까?”

“으으음.”

고진성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도대체 청겸은 뭘 하고 지내기에 본산에 연락 하나 없이 은둔하고 있는 것일까.

‘애초에 천무학관을 보내지 않고 본산에 잡아 두었어야 했을꼬.’

사문의 제자가 이토록 미워질 줄은 몰랐다는 듯, 고진성의 시선이 회한을 담은 채 하늘로 향했다.

* * *

천무학관을 졸업하기까지 삼 년.

그 이후로 약 백오십 일.

청겸은 호북성의 모처에서 은둔한 채 하나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운룡대팔식의 완성과 개량, 그리고 경험.’

처음에는 곤륜파로 얌전히 돌아가려고 했다.

마교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 풍류를 포기하는 것쯤이야 명문의 제자로서 당연한 일이니까.

한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서문세가의 일공자가 곤륜산에서 운룡대팔식을 배웠다는데?”

“곤륜파에서 문외제자로 인정하기로 했다는구먼.”

“허허…… 사문의 신공이 유출된 셈인데, 곤륜의 장문인이 참으로 대범한 결정을 내렸구먼.”

“…….”

이 소식에 청겸은 제자리에서 멈췄다. 생각에 곰곰이 몰두했다.

부족한 것과 차고 넘치는 것.

중앙에 선을 긋고서 하나씩 한쪽으로 밀어냈다.

서문경처럼 절대고수로 불릴 수준은 아니었으나, 정기신의 균형을 이룬 무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일다경 동안 식은땀을 흘리면서 터득한 답은 하나였다.

‘단 한 번도 치열하지 않았어.’

화려한 옷을 즐겼다.

술과 여인을 가까이하는 데 경계심이 없었다.

경신법의 대가이나 몸을 가볍게 하지 않았다.

하나에 몰두하지 않고, 여러 잡기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청겸의 미간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그동안 재수 없다고 생각한 남궁명이 차라리 낫지 않나, 남궁세가의 가주로서 본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니…….’

이때의 남궁명은 천무학관을 훌륭히 졸업한 무인으로서 남궁세가로 돌아간 때였다.

삼 년 내내 적당히 수련하고 즐기다가 졸업한 청겸과는 다르게.

청겸은 이제야 과거를 돌아보았다.

선현(先賢)의 가르침을 잊고서 현재를 즐긴 대가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돌아가서 들 낯이 없어.”

운룡대팔식을 수련했으되, 그것은 무공으로서가 아니라 재빠르게 놀고 학관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편이었다.

궁색한 도망에 가까웠지, 무도(武道)의 진지함은 없었다.

운룡반천장이야 지극히 수련했지만, 수백 년에 가깝게 때를 기다린 마교에게 통하리란 보장이 없다.

책무.

그 단어에 어깨가 지끈하게 무거워졌다.

발을 대지에서 뗄 수가 없었다.

청겸은 성을 나가는 삼십 걸음을 두고서 한참이나 번민했다.

해가 지고 별이 떴다.

희미하게 비치는 별빛 사이에 자신의 몸을 누일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돌아가자.”

그날로 청겸은 화려한 옷을 버리고 다섯 벌의 도복을 샀다.

주인 없는 산으로 들어가 움막을 짓고, 스스로 불을 피워서 고기를 구워 몸을 불린 다음 이전보다 다섯 배는 움직였다.

산은 좋은 환경이었다.

극한의 경신법을 펼칠 때마다 나무에 부딪칠 위험이 있고, 어디서 동물이 나타날지 모른다.

항시 감각을 예리하게 갈아 놓지 않으면 멈추고 만다.

곤륜파의 도사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허공을 자유로이 노니다가, 별처럼 쏘아지는 검과 장법.

곤륜파의 고유한 투로를 살리기 위해선 청겸의 녹슨 몸과 정신을 닦아 내야 했다.

몇 번이고.

지형을 무심코 외우려는 자신을 다그치고.

청겸의 발걸음은 산 곳곳에 찍혔다.

그것이 삼십 일이 되자,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육십 일이 되니 한 발자국을 세 번 포갰다.

짐승조차 얼씬하지 않는 청겸만의 구역이 되었다.

그리고 백 일.

“……허깨비인가?”

산꾼 하나가 나무 사이로 스쳐 지나간 그림자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기이한 일이다.

가히 이십 장이 넘는 거목을 넘나드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고 다그치며 자기 생업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청겸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갈증이 났다.

‘운룡대팔식은 허공을 아우르고, 창공을 향해 걷는 뜻이 담겨 있다.’

서문경이 어떤 수준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무기를 지녔다.

검으로는 칠로두 중 하나를 무찔렀고, 창으로 독을 제압했다고 했다.

청겸에게는 오직 하나였다.

곤륜파의 무공. 단 하나.

청겸의 발은 날이 갈수록 가벼워지고 검은 예리해지고.

손바닥을 휘두르는 무게에 속도가 실리고, 삼십 장이 넘는 거리를 격하여 손자국이 바위를 관통했다.

여기까지가 백오십 일이었다.

‘이쯤이면…… 사문에 돌아가도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더는 은자가 아니라, 협객.

다른 동기와 마찬가지로 마교와 싸우면서 무훈을 쌓으리라.

청겸이 움막을 정리하고 산을 떠나려는 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어리군.”

검은색 복면 위, 보랏빛으로 물든 눈동자.

흉흉한 살기가 청겸을 붙잡았다.

발이 잘 떨어지지가 않아, 사이한 기운을 운용하는 자였다.

남자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고는 하고 싶은 말을 주절거렸다.

“은거기인이 있다고 들어서 왔는데, 어린 거지새끼가 아닌가?”

“……?”

그 말에 청겸은 자신의 꼴을 흘낏 살폈다.

지난 삼 년 동안 화려한 옷과 술을 즐겼던 자신이, 지금은 도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넝마가 된 천 쪼가리를 입고 있었다.

그 사실이 우스워서 껄껄 웃었다.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가 우습지?”

“내가 이제야 달라진 것 같아서.”

화려한 외양에 집착하여 본질을 잊고 있던 어린 도사가 백오십 일만에 제대로 된 길을 찾아간 것 같아서.

청겸은 환한 웃음을 드러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감춘 남자와 다르게, 당당한 얼굴이었다.

“재수 없는 놈.”

남자는 입술을 비틀었다.

살기와 사이한 기운이 손목의 내관혈로 응집하더니 순식간에 비도로 모였다.

스윽.

날아가는 소리가 바람에 지워졌다.

아주 미세하고 날카로운 기예였다.

그때, 청겸이 허공을 걷어찼다.

“……?”

남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저게 무슨 짓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으나, 청겸의 행동은 아주 유려하게 이어졌다.

비도가 바람으로 만들어진 벽에 막혀 퉁겨지고 청겸은 허공을 향해 두 발로 걸어 나가니.

무림의 견문이 짧은 자여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세간의 인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운용이었다.

“운룡대팔식……! 설마!”

“은자.”

청겸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웃었다.

“운룡이 구름을 벗고서 천하로 되돌아가노라.”

넝마가 된 옷을 걸친 도사가 검을 뽑았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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