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7)
서문세가의 승전보는 사천성을 넘어서 강호 전역으로 퍼졌다.
무인과 호사가 대부분 웃으며 좋아할 소식이었으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요직에게는 골머리를 앓을 정보였다.
“십수 년이나 함께한 자가 사실은 마교일 수도 있단 말인가?”
“으음, 이거 참…… 여태까지는 이대제자나 문외제자의 변절이었거늘.”
물론 삼 년 전부터 서문경은 배신자를 염두 해야 한다고 주장하긴 했다.
최근에 발족한 정의맹도 여러 가지 정보를 흩뿌렸다.
하지만 진정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일대제자, 혹은 장로여도 의심해야 할 지경이 이르렀단 말인가…….’
‘큰일이군. 문내(門內)의 기강이 좋지 않겠어.’
구파일방은 마교와 싸우기만 집중하던 것을 조금씩 분산하여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혹자가 보기엔 느리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전생에 비하면 무척이나 빠른 진척이었다.
전생에선 문파의 가족을 전혀 의심하지 않다가 치명적일 때 배신당하거나 멸문당하고는 했으니까.
이 과정에서 서문세가는 수세대에 걸쳐 터득한 수법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게 전달했다.
배신자를 찾아내는 법.
그들이 스스로 정체를 밝히게끔 판을 까는 술수.
다른 때라면 이런 음습한 방법은 쓰지 않겠다고 하겠지만, 시대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남궁세가라는 선례를 낳은 오대세가. 아니, 이제는 사대세가인 명가들은 투덜거리며 내부 정비에 나섰다.
스스로 몸을 털어 내지 않으면 언제든 마교로 변절할지도 모른다는 적의가 향할 것이기에.
서문세가는 이것을 웃으며 지켜보았다.
“본래는 관인이 어찌 무림의 일에 관여하느냐고 주절거렸을 텐데…….”
“이게 다 일공자가 본을 보여서지. 그들도 자존심이 있다면, 저보다 어린 청년이 마교와 싸우기 위해 구주를 떠돈 것을 보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고.”
“하하, 하하하!”
서문세가의 무관들은 서문경의 위업이나 활약상을 두고서 떠들고 웃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서문패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평화로운 때야 군관이 묵직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미덕이지만, 혼란스러울 땐…… 영웅이 하나 필요한 법.”
무림이 관인에게 고개를 숙일 만큼 뛰어나고 어린 영웅.
서문경은 그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
마교와 싸우길 주저하지 않고, 무림의 최고 어르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오걸과 십대고수와도 친교를 맺었다.
어린 후기지수에게는 선망을, 노회한 고수에게는 경계심과 부끄러움을.
서문경의 존재만으로 서문세가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서문패로선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호북성에서도 그렇고, 당가에서도 들었지만…… 정말이지 철두철미한 아이야.’
지금보다 어린 삼 년 전부터 이런 판을 짜다니.
서문패는 고요하게 잠든 서문경을 지켜보았다.
“언제 일어날 거냐?”
처음 잠든 이후로 보름하고도 일주일.
서문경은 한 번도 눈을 뜨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가끔씩 폐부에 고인 숨을 뱉어내는 걸 말고는 숨조차도 잘 쉬질 않았다.
이쯤 되면 병증이 아니라 절대고수만이 할 수 있는 수련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단전 심상에서의 수련.
무림인 사이에서 반쯤 전설로 불리는 현상이라지만, 실제를 마주하니 매일 잘 살아 있나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뭔 지독한 심마에 걸리진 않았는지.
입술이 말라붙진 않았는지.
지켜보는 입장에선 숨이 턱턱 막힌다.
지금처럼 마교와 외적이 지척에 깔린 상황에서 서문경의 부재는 갑갑하기만 했다.
‘전에 그놈들이 쳐들어온 걸 보면…… 서문경의 용태가 심상치 않다는 건 마교도 알 텐데.’
언제든 칠로두가 쳐들어올지도 모를 상황 아닌가.
때문에 서문이현은 본가의 군관들에게 무기한 대기를 지시했다.
사천성이 무너지면 삽시간에 대명의 서쪽과 북쪽이 무너지는 셈이니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서문패가 시선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음, 으음…….”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침을 질질 흘리는 성하민이 보였다.
아침저녁으로 무공을 수련하고, 비는 시간마다 서문경을 돌보는 생활.
수련마저도 서문경이 강권하여 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옆에서만 보면 이미 정혼한 사이로 보일 극진함이었다.
‘녀석, 여복은 타고 났구나.’
처음에 홍가와 파혼하길래 다른 여자가 있는가 했더니만, 예비 정혼자를 마교에게 구한 셈이 아닌가.
서문패는 피식 웃다가 서문경을 놀릴 만한 이야길 떠올렸다.
하지만 정작 장본인이 저래서야.
“……쯧.”
서문패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가, 금세 주름을 폈다.
이곳을 나가면 서문세가의 군관과 문관이 우후죽순으로 있다. 그들에게 어두운 얼굴을 보일 수야 없었다.
서문세가의 장군으로서, 그리고 서문세가의 칼이자 무신으로 불리는 몸으로서.
서문패는 책임감을 어깨에 온전히 두르고서 자리를 비켰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라. 할 일이 많이 쌓였으니까.”
* * *
몇 번이나 싸웠을까?
서문경은 세는 것을 잊었다.
스스로 식물이 되기를 상상했다.
첨예하게 갈고 닦은 감각으로 사방을 주시해야만 불청객, 궁사의 화살에 대응할 수 있었으니까.
핏-!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러나 구름이 꿰뚫리거나 대기가 갈라지는 일은 없었다.
궁사가 이를 두고 말하기를.
‘힘을 낭비하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라고 했던가.’
산을 깎아 내거나, 집을 부수는 짓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상대를 잘 죽이는 것.
무공으로 살인의 도(道)를 이루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산의 정상에 있는 나무에 오르고 있노라고.
궁사의 오만함은 자신감의 영역에 있었다.
서문경은 실제로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쳐내기는커녕 피하기 급급했다.
만일 운룡대팔식을 익히지 못했다면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겠지.
서문경은 궁사의 실력을 수백 번이나 관찰하고서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창왕은 날 봐준 거야.’
도둑놈이 무공을 훔쳐 가는 것을 알고도 방치했다.
창왕은 길을 앞서간 선배로서, 인생의 등불이 되기를 자처했다.
하지만 궁사는 그러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냉정한 낯빛으로 자길 낮췄고, 자기보다 낮은 실력을 지닌 서문경에게 누구보다 잔혹했다.
쫘악!
생각을 이어가는 와중에 화살 한 발이 팔뚝을 스쳤다.
“……쯧.”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는 목소리가 귓가에 꽂힌다.
서문경은 궁사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 운룡대팔식을 전력으로 펼쳤다.
그와 싸우기를 수백 번.
궁사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잘 알았다.
“서풍광아.”
서문경이 손목으로 기교를 부렸다.
작은 반원이 금세 돌풍으로 화하여 허공에 칼바람을 일으켰다.
……콰르릉!
구름이 찢어지고 대기가 스스로 길을 열었다.
세간에서는 절대고수의 검풍이라 일컫는 일격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절대고수를 몇 번이고 죽인 남자였다.
핏!
참새의 울음소리 같은 출수였다.
서문경은 칼바람 속에 파고든 화살을 보았다.
‘폭풍 안의 고요함이 저러할까?’
궁사가 쏜 화살은 칼바람 속에서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의 끄트머리를 타고서 가속하는 것 같았다.
서문경의 안력이 돋워졌다.
칼바람 너머, 희끄무레한 인영(人影)이 파도치듯 너울거렸다.
전신의 근육을 꽉 조였다.
“……후우.”
폐부의 숨까지 전부 내버리고서 눈을 부릅뜨니.
파앙!
운룡대팔식의 초식을 전부 발길질에 담았다.
허공을 뛰어 도는 움직임이 마치 용과 같았다.
그 와중에 화살이 서문경의 목을 향해 휘었으나, 보지도 않고 오른 손목을 뒤틀었다.
검사의 기교가 궁사의 기예를 꺾는 순간.
서문경은 그 찰나를 즐기지 않고서 전진했다.
“……!”
궁사의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곤륜파의 운룡대팔식과는 다르나, 또 다른 궁극점에 도달한 보신경.
쾌(快)보다는 환(幻)에 가깝다.
서문경은 저 모습을 눈에 담느니 차라리 감아 버렸다.
‘사라진 방향은…….’
알 길이 없다.
궁사의 보신경은 창왕이 보여 주었던 기예처럼 한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절대의 경지에 있었다.
그러니, 동격에 있는 일초로 대항할 수밖에 없다.
서문경은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자신이 아는 두 검법을 떠올렸다.
수십 검법을 하나의 의지로 담은, 대주천복마검.
그리고 무당파 검법의 전설인 태허검결이라.
“……!”
떠올린 순간에 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하단전에 있는 공력과 정신력이 한순간 소진되어 질끈 감은 눈에 잔상이 번뜩였다.
하지만 검의 궤적은 곧았다.
꽈르르릉!
대기가 터졌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꽝 울리며 천주가 한순간 옆으로 기울었다.
서문경이 수없이 흘린 핏물이 굳어서 생긴 자국조차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흩어졌다.
구름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하늘.
그 아래에 하나의 그림자가 남았다.
서문경은 처음으로 궁사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서 한숨을 흘렸다.
“……어쩌다가.”
“…….”
궁사의 얼굴은 상처투성이로 표현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참혹에 가까웠다.
몇 번이고 고문당한 흔적이 있어, 귓불이 남아 있지 않고 귓바퀴엔 이런저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온정이라곤 조금도 없는 표정.
그 안에는 공허함이 있었다.
싸움에서 패배하여 모든 것을 잃은 패장의 인상이었다.
“이제야, 한 번.”
궁사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몇 번을 싸워야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포기하는 게 나을까. 그런 심산이었다.”
“…….”
“중간에 창왕이란 놈과 싸워서 이겼다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알 바도 아니고. 그놈이 약해서 겨우겨우 이긴 거라고 여겼지.”
궁사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워낙 심각한 상처가 많은 얼굴이라, 표정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으나 왠지 모르게 웃는 것 같았다.
“지금 보니 가능성은 있군.”
“그럼 궁술이라도 가르쳐 줄 겁니까?”
“아니.”
궁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궁술은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교육하고, 병장기와 다른 내공 운용이 필요하다. 이제 와서 몇 번 배운다고 될 것이 아니지.”
“그러면?”
“네놈도 군관이라면 알겠지.”
그 말에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알 때까지 하란 거냐?”
“잘 아는군.”
궁사가 다시 시위를 당기고서 중얼거렸다.
“몇 번이고 죽고, 또 죽고, 눈으로 보다 보면 얼추 알게 되겠지. 몸으로 익혀라.”
“……제기랄!”
서문경은 다시 기수식을 취하고서 궁사의 자세를 눈에 담았다.
지금보다 더 가혹하고 지겨운 싸움이 될 참이었다.
겨울은 그렇게 계속해서 지나가고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