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87화 (185/250)

겨울 (6)

“본가와 거래를 하려거든 많이 복잡하오.”

처음 서문세가의 관인과 접선했을 때 들은 말이었다.

그때 상인의 신분을 위장한 마교 신도는 속으로 웃어넘겼다.

쉬이 그렇듯, 겁을 주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군문(軍門)의 경계심은 상상 초월이었다.

신뢰를 쌓는 데 오 년, 제대로 된 거래를 하는 데까지 십이 년.

서문세가의 정문을 떳떳하게 넘어가기란 마교로서도 쉽지 않았으나.

‘드디어.’

마교의 섬검대주(殲劍隊主) 곽일상은 복면을 여몄다.

어두운 밤, 겨울의 차가운 바람.

십이 년의 세월 동안 묵힌 대계(大計)를 행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곽일상의 시선이 수하를 스쳤다.

“잘 확인했느냐?”

“예. 검수(檢數)를 마친 식재가 통과하는 걸 보았습니다.”

“……좋아.”

복면 아래, 곽일상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꾹 참았다.

철(鐵), 그리고 식(食).

서문세가는 이 두 가지를 철두철미하게 따졌다.

처음 곽일상이 상인을 위장하여 거래하려고 했을 때, 얼마나 가히 수십 개의 질문을 받아야만 했다.

고로, 그들의 깐깐한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섬검대주라는 직위를 버리고 바닥부터 지식을 머릿속에 박아 넣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었나.

다른 대주가 구파일방에 성공적으로 잠입하는 걸 지켜본 참담함이란, 간이 쓰라려서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대업의 가장 큰 방해로 자리 잡은 서문경과 서문세가, 이곳을 무력화할 수 있다면…….’

섬검대가 마교 내부에서 가장 뛰어난 집단으로 인정받게 될 터.

십이 년의 수모를 완벽하게 뒤집을 기회였다.

곽일상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수하가 벽을 타 넘어갔다.

“……!”

수하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가 잦아들었다.

관복을 입은 무관이 벽에 기댄 채 잠든 것이다.

그것을 가까이 가서 확인한 수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약이 잘 든 것 같습니다.”

“……좋아.”

곽일상은 히죽 웃었다.

아현몽(兒現夢).

며칠 전부터 반입한 식재에 집어넣은 독이자 약이었다.

‘그냥 먹으면 양기를 북돋는 약이지만, 전엽나무 열매와 함께 먹으면 서서히 미몽에 잠기게 되지.’

이를 위해서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던가?

아현몽을 식재에 반입하고, 서문세가의 식단에 전엽나무를 은근슬쩍 제시하는 데까지도 무려 한 달이 걸렸다.

계획이 틀어질까 싶어 노심초사하던 것까지도 포함하자면 석 달.

곽일상은 그 보상이 눈앞에 펼쳐졌음을 깨달았다.

“즉시 목을 베고 전진한다.”

“예.”

그 말에 수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잠에 들어 있던 무관의 목을 베었다.

그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바닥을 적시고, 뒤따라온 마인들이 피를 밟고 발자국을 남겼다.

곽일상은 선두에 선 채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혹여, 끼니를 거른 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긴장을 늦추지 마라.”

“예.”

마인들은 자연스럽게 활을 만지작거렸다.

곽일상을 비롯한 몇몇이 서문세가와의 신뢰를 쌓았다면, 그들은 멀리서 바늘구멍을 맞출 기량을 쌓았다.

마인들의 시선이 서문세가 곳곳을 누볐다.

‘만에 하나, 안 먹은 놈이 있다면…….’

‘누군가를 깨우는 소란이나 등불을 들고 돌아다니겠지.’

수십에서 수백 번.

이 상황을 두고서 머리를 맞대고 준비했다.

단 한 번의 성공에 십 년을 기꺼이 투자했으니,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기척이 없습니다.”

“역시나, 군문 아니랄까봐 대부분 끼니를 챙긴 것 같습니다.”

“……후후.”

곽일상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시원하게 웃었다.

군문.

나라 것이라서 구파일방보다 더욱 일과에 철저한 면이 있었다. 끼니를 거르는 것 또한 사소한 죄 중 하나이니, 모두가 거의 비슷한 시각에 먹은 듯했다.

‘이러니까 철저하게 신경을 쓴 거겠지만, 막상 이렇게 쉬워도 되나 싶군.’

십이 년.

마침내 섬멸대에게 서광이 비추는 걸까?

곽일상은 주먹을 불끈 쥐고서 말했다.

“불은 마지막에 지른다. 대원들은 전부 산개하여 적을 제거한다.”

“예.”

섬멸대의 마인들은 사이한 기운을 흩뿌리며 서문세가 곳곳으로 향했다.

푸욱, 푹!

모두가 잠든 이 때, 가슴팍을 꿰뚫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죽음이었다.

그 와중에 곽일상은 재빠르게 서문세가의 중심지로 향했다.

‘가장 큰 공은 역시…… 가주와 그놈이다.’

서문세가 가주 서문이현, 그리고 천무검왕으로 불리는 서문경.

둘의 목을 마교로 들고 갈 작정이었다.

지금처럼 모두가 아현몽에 잠들어 있는 이상,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곽일상은 히죽 웃은 채 서문세가의 가주실로 향했다.

낡고 해진 문.

잘 정리된 서류가 한편에 쌓여, 불과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공무를 처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 책상에 한 남자가 엎드려 있었다.

“철인이라고 불리는 자가 이리도 쉬운 모습을 보이다니……”

세상사 허무하지 않나.

대명의 시대가 시작된 이래로 서쪽의 수호신이라고 불린 서문세가가 이리도 쉽게 몰살당할 줄이야.

곽일상은 그 역사에 자신의 이름이 실릴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잘 가라, 서문이현……!”

스르릉!

곽일상의 일검이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책상을 베고, 살갗을 갈랐다.

피가 주르륵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그렇게 핏물이 서류까지 완전히 적시려는 찰나에.

“……바닥은 닦아 낼 수 있지만, 이건 조금 곤란하지.”

등 뒤에서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곽일상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철인이었다.

책상에 당연히 엎드려 있을 줄 알았던 서문이현이 아무렇지 않게 피에 젖어 가던 서류를 집어 들고 있었다.

‘대체 언제……!’

곽일상은 경악스러운 감정을 검에 담았다.

칼끝이 흔들렸으나, 힘은 부족하지 않았다.

콰직!

가주실의 벽이 무너지며 숨겨진 공간이 나왔다.

서문이현만이 출입하는 비밀 창고였으나, 곽일상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서문이현이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의 무위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칼끝이 흔들려서야 어찌 사람을 벨 수 있겠는가, 곽 상인.”

두 손가락.

서문이현은 검로를 보지도 않고 곽일상의 칼을 잡아챘다.

다른 한 손으론 서류를 정리하는 여유까지 있었다.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행태.

곽일상의 고함이 가주실 밖까지 터졌다.

“날 기만한 것이냐!”

“기만은 자네가 먼저 하지 않았나.”

탁, 탁.

서문이현은 서류를 그나마 깨끗한 곳에 정리하고서 말했다.

“신뢰를 쌓고, 거래를 시작한 이후로 섭섭지 않은 금액을 지불했네. 사천성에서 터를 잡기 위해 여러 편의를 봐주기도 했지. 이게 그 대가인가?”

“……자, 잠깐. 그럼 내가 죽인 놈은 대체 뭐냐?”

“그게 궁금한가.”

서문이현의 손이 책상에 엎드린 채 죽은 사내에게 향했다.

뒷머리를 잡고서 슬쩍 들어 올리니, 곽일상이 아는 얼굴이었다.

“……동료였나!”

상인의 신분으로 서문세가에 출입하면서 철옥에 갇힌 것을 확인한 마인 중 하나.

세간에서는 철악귀로 불린 마인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때를 봐서 구출하고, 섬검대로 받아들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건만.

곽일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제부터 안 거냐!”

“갑자기 전엽나무 열매를 매입해 달라고 할 때부터, 아현몽의 존재를 의심했지.”

“……!”

“설마 우리가 아현몽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서문이현은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나 속내는 달랐다.

‘만약 우리가 사천당가와 싸우지 않았다면, 승리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결과는 완전히 달랐을 거다.’

서문패와 서문경, 별동대가 사천당가에서 가져온 지식과 독은 서문세가의 양분이 되었다.

아현몽이 그중 하나였다.

고수를 죽이기 위해 극비리에 만들어진 독으로서 언뜻 먹으면 향신료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전엽나무 열매야 사천에서는 흔히 먹는 과육이었다.

의심할 구석이 없었다.

사천당가와 싸우기 전이었다면.

서문이현은 검을 뽑았다.

“더 할 말은?”

“천마강림! 만마앙복!”

곽일상은 검을 들고서 앞으로 달려들었다.

* * *

한 시진 뒤.

서문세가의 무관들은 버림 패로 쓴 마인과 섬멸대의 시신을 정리하고 나서야 허리를 폈다.

“늦은 밤에 이게 참…….”

“앞으로 이런 일이 몇 번이고 있겠지?”

“야, 그런 소리하면 못 써.”

무관들은 서로 웃음 섞인 대화를 하며 긴장을 풀거나 앞으로의 각오를 다졌다.

정말이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야밤에 사천성 한 가운데서 급습을 해오는 건 서문세가의 역사에서도 한 손으로 꼽을 일이니까.

서문이현은 그들을 잠자코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경이나 패의 손을 빌리지 않고 해내서 다행이야.’

이번 급습을 막아내서 가장 좋은 건, 무관의 사기를 향상시키는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무공의 뛰어남으로 급을 나누거나 실의에 빠진 수하가 많았기에.

하물며 마교가 군관의 고향을 점거하거나 위협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마교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둘 때가 필요했다.

‘오늘 일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거나 사기가 바닥인 무관이 조금은 줄어들겠지.’

게다가.

서문이현은 시신으로 화한 마인을 흘깃 보았다.

‘마인 중에 처리가 곤란한 놈들이 있었는데, 다행이야.’

구파일방의 제자 혹은 고관대작의 자식.

아무리 서문세가여도 함부로 처형할 수 없는 마인이 몇몇 있어서 가두고 있었다.

그들 때문에 불만이 조금씩 있었는데…… 좋은 처리가 되었다.

서문이현은 군관들에게 말했다.

“마교에게 구출되다가 추살된 자들의 가문에 각각 편지를 잘 보내도록.”

“예!”

그 한마디로 오늘 일이 정리되었다.

군관들은 씨익 웃으며 오늘의 승리를 자축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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