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85화 (183/250)

겨울 (4)

어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처소의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고 상상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리워하되, 가까워지진 못했다.

어쩌면, 전생에서 서문휘를 밀어낸 이유 중 하나일지도.

서문경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불효막심하고, 또 속 좁은 사내였음을 실감했다.

“올해도 찾아왔습니다.”

천무학관으로 출발하기 전날, 그리고 삼 년의 수련.

그동안에 서문경은 불효막심했던 후회를 현생에서야 최선을 다했다. 자주 서문이현을 찾아가 대화하고, 서문휘와 친해지기를 노력했다.

자기만족에 가까웠다.

전생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이번 생에서는 다르다고 행동한 것이니까.

‘나쁘진 않았지. 아니, 좋아진 거야.’

사무적인 대화만 나눴던 서문이현과 여러 농담을 나눌 수 있게 되었고, 데면데면한 서문휘는 동생으로 대하게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가히 원수처럼 대했던 새어머니 은조영과는 묘소에 함께 찾아오게 되었는데.

서문경은 이 변화가 기꺼웠지만, 불안하기도 했다.

‘내 힘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된 거라면.’

관인이라면 상황에 따라 몸가짐을 달리할 수 있는 법.

혹시 진심이 아닌데, 억지로 따라온 것은 아닐까.

그 걱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선산에 도착하기까지 은연중에 여러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자, 예법에 맞게 잘 차려서…….”

“으흠, 흠.”

묘소에 도착한 일행은 일사분란하게 여러 절차를 마쳤다.

성심(誠心)이라고 확신할 순 없었다.

명가의 예의범절을 배운 사람이라면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걸 보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자기 일처럼 진지하게 인사를 하러 온 것이 보였기에.

서문경은 희미하게 웃었다.

‘전생에선 참으로 못나게 굴었는데, 이번엔 조금 잘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잘할 거고요.’

망가트린 일이 없다고 할 순 없었다.

마교가 일찍이 모습을 드러내서 천하를 망가뜨리는 건, 서문경이 재빠르게 장막을 걷어치워서였다.

하지만…… 필요한 상처였다.

천하가 마교의 존재를 인식하고 뭉치는 일.

서문경은 그것을 위해 천무학관으로 향했고, 마인과 수차례 싸웠다.

위험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본보기가 되었다.

천하는 서문경에게 소년검룡, 혹은 천무검왕으로 부른다.

신뢰를 얻었기에 정의맹을 세우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남궁세가가 역심을 품기도 했지만…… 다른 가문에서도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문경은 그 이야기를 묘소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끔.

“…….”

그 뒷모습을 본 성하민이 거리를 벌렸다.

적어도 지금은 서문경이 홀로 있길 원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서문패와 서문휘, 은조영까지도 다른 묘소를 정돈하고 있었다.

내심 서문경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라.

성하민은 서문경의 등을 보았다.

언제나 숨기는 것 많고, 위험을 자처하는 남자였다.

“……언젠가는.”

그 모든 비밀을 공유하고, 더욱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날이 빠르게 오기를 고대했다.

* * *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서문경은 오랫동안 꿇었던 무릎을 폈다.

그동안 서문패와 성하민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언제 갔나 해서 눈짓하니, 서문패가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두세 시진을 그러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안 부담스러워하겠냐?”

“……으음.”

서문경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씰룩이자, 서문패가 황급히 말을 고쳤다.

“농담이고. 서문휘야 소가주으로 내정되어있지 않냐, 교육을 받으러 떠났고…… 형수도 뭐, 같이 내려갔다.”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는데요.”

“야, 이젠 네가 헛기침만 해도 날아갈 사람이 수백은 될 거다.”

이제 슬슬 무게감을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냐는 듯, 서문패가 히죽 웃었다.

하지만 서문경은 늘 한결 같았다.

“헛기침 한다고 마교가 눈이나 깜짝하겠습니까?”

“기준하고는…….”

마교와 비교하면 구파일방도 우스워질 처지가 아닌가?

서문패는 서문경의 성정이 언제 저렇게 꽉 막혔나 속으로 한탄했다.

“오랜만에 오니 어떠냐, 잘 정돈 됐지?”

“예.”

“서문세가의 선산이 더럽혀지는 꼴은 절대 못 보는 형님 아니냐. 매일매일 닦달이다.”

“다음에 올 땐 더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네 어머니한테?”

“그래야죠. 적어도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할 테니까.”

“……흠.”

서문패는 사천당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칫 잘못한 순간, 눈과 팔을 잃을 뻔하지 않았나.

독마의 위험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다른 칠로두라고 다를 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다치는 일 없이 이긴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이런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으나 내뱉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묘소에서 약속을 했다는데 미쳤다고 거짓말했다고 농담하랴.

서문패는 어색하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삼촌이 있잖느냐, 네가 다치는 일은 없을 거다.”

“감사합니다.”

“야. 당장 당가에서도 내가 선봉에 서지 않았으면…….”

“생색입니까?”

“생색은! 낼 만하지!”

서문패가 서문경에게 가까이 다가가 머리칼을 어지럽혔다.

그 모습을 본 성하민도 쭈뼛거리면서 다가왔다.

슥슥.

“……?”

“나, 나도 도와줄 테니까.”

“…….”

서문경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성하민이야말로 가장 큰 성과가 아니던가?

혼자서 칠로두 전부와 싸울 각오를 다지고 있었는데, 재능만으로 자신과 비견될 고수가 될 전우를 얻었으니까.

이번에 유화가 천무의 재능을 깨우쳤다지만, 칠로두와 싸울 만한 경험은 없으니…… 실질적인 전력은 서문패와 성하민이 전부였다.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선봉은 저기 있는 삼촌이 서 줄 테니까.”

“인마!”

서문패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서문경은 실실 웃으며 옷가지를 정돈했다.

이제는 선산에서 내려가, 다시 수련할 때.

‘하루도 지체할 순 없어.’

늘 급하게 행동하면 안 된다고 다짐하지만, 앞으로 싸울 칠로두가 여섯이요, 외적 또한 부지기수.

서문경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뒤를 흘낏 돌아봤다.

‘다음에는…… 정말로 좋은 소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어머니.’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정을 뒤로하고 무(武)를 가까이할 때였다.

* * *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밤.

서문경은 달빛을 한쪽 얼굴에 받고서 가부좌를 취했다.

두 눈을 감으니 어둠이 찾아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단전 심상이 떠오르며 거대한 기둥이 드러났다.

천주심경.

그 정상에 선 서문경은 신비한 무공사전을 펼쳤다.

“……오늘은 매화검법인가.”

창왕 이래로 한두 달인가.

서문경은 또 다른 적수가 찾아올 때까지 무공사전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때때로 수집한 무공을 펼쳐서 여러 가지 초식을 파자(破字)하듯 해체하여 덧붙이기도 했다.

‘화륜(火輪)의 형태로 매화를 응집할 수 있다면…… 서문창법이나 검에도 맞춰서 펼칠 수 있을 텐데.’

서문경은 허공에 손을 뻗어 구름을 헤집었다.

자연스레 검이 뽑히며 손아귀에 탁 잡혔다.

스윽, 슥.

연준호의 매화검법을 흉내 내듯 펼쳤다.

가능하면 매향지경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었지만, 가히 불가능했다.

‘희귀한 것으로 따지자면 무연창 이상. 아니, 고유한 무학이라고 봐야 하나.’

서문경은 매화검법을 수련하며 감탄에 잠겼다.

구파일방의 무공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완성된 반석과 같았다.

너무 잘 깎여서 더는 손댈 곳이 없다.

서문세가의 가전무공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연준호는 또 다른 색을 입혀서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었으니, 무공사전으로 다른 무공을 자신한테 덧입히는 행동을 재능만으로 해낸 셈.

서문경의 수련이 한참 이어졌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해가 완전히 뜰 때까지 반쯤 수면에 잠긴 채 심상 수련에 빠지려고 했다.

이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스슥.

종잇장이 바람을 스치는 듯한, 아주 작은 소리.

그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서문경의 등에 화살이 꽂혔다.

“……커헉!”

폐부가 꿰뚫려, 피가 곧바로 그득해졌다.

말은커녕 신음조차 내기가 힘들었다.

서문경은 고개를 들려고 했다.

예의 창왕처럼 또 다른 고수가 천주심경에 이끌려온 게 아닐까, 확인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번의 불청객은 그런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푸슛……!

시위가 당겨지는 마찰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문경의 머리가 들썩였다.

“활인가.”

서문경이 힘겹게 입술을 달싹이니, 허공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

도저히 마음에 차지 않아서 혀를 차는 소리.

서문경은 창왕과 달리, 이번 불청객은 불만이 많음을 깨달았다.

시련 혹은 도전.

그 다짐을 머릿속에 품고서 다시 제정신을 차렸으나.

……스슷!

또다시 화살이 가슴을 적중했다.

어디서 쏘아졌을지 모를. 아니, 애초에 화살이 날아온 자리는 구름 밖에 없었다.

서문경의 눈에 핏발이 서는 순간.

허공에서 또다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쯧.”

이번에는 소리가 들려온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서문경은 곧바로 검풍을 날렸다.

어마어마한 돌풍이 구름과 허공을 휩쓸었다.

그 행동이 우습게도, 또 다른 화살은 서문경의 등 뒤에서 날아왔다.

쩌억!

다시 한 번 머리.

서문경의 시야에는 회백색 하늘만이 가득했다.

‘대체 어디서?’

처음엔 가슴을 쏘고, 머리로 결정타.

혀 차는 소리가 속임수인지 진짜인지조차 구분이 가질 않았다.

서문경의 머릿속이 번잡해진 사이에도 불청객은 또다시 화살을 쏘았다.

스슷!

모든 감각을 예리하게 돋워도 어디서 쏘았는지 알 수가 없다.

서문경은 처음으로 화살을 쳐 낸 채 허공에 대고 외쳤다.

“누구시오! 이름이라도 밝히시오!”

“……없다.”

허공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서문경을 비웃었다.

“자격이 없으니, 말할 이름이 없다.”

“……!”

서문경은 인상을 찌푸렸다.

창왕보다 성격이 나쁘고, 훨씬 장기전이 될 상대였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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