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3)
선산은 서문세가에서 눈으로 보이며, 멀지 않고, 양지 바른 남쪽에 있었다.
서문경은 일행과 함께 정문으로 향했다.
그곳에 두 사람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서문휘와 은조영.
소가주로 내정된 동생과 과거에 사이가 불편했던 새어머니였다.
새어머니와의 인사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으나, 전처럼 적의는 없었다.
오히려 미안함까지 품고 있었다.
“……왔니.”
“예.”
“내가, 전에는…….”
“이미 잊었습니다.”
전생의 시간까지 포함하자면 가히 삼십 년.
해묵은 감정을 털어 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소가주의 자리를 괜히 서문휘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은조영의 입장에선 무척 어려웠다.
“저어, 으음.”
“편히 말씀하십시오.”
“……미안해.”
“아닙니다. 되레 저 때문에 눈치를 보느라 서문세가의 외곽에서 사시지 않았습니까?”
“…….”
은조영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그 말대로 서문경에게 괄시를 받거나 눈치를 보느라 터를 옮기기도 했지만…… 소가주의 자리를 집요하게 노리지 않았나.
지금까지 어른답지 않게 못되게 굴었는데, 서문경에게 위로를 받는 것이 참으로 어색했다.
“……여태 어른스럽게 행동하지 못한 거지.”
“그건 맞습니다.”
“뭐?”
서문경은 태연히 웃고는 속에 품고 있던 말을 툭툭 뱉어 냈다.
“휘에게 과한 공부를 시키고, 사람도 못 만나게 하지 않았습니까? 한창 사고 칠 나이에 손발을 꽁꽁 묶어 놨으니, 그건 어머니의 잘못입니다.”
“……!”
은조영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서문경의 타박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라는 호칭에서 놀라고 만 것이다.
앞으로 평생, 죽을 때까지 서문경에게 제대로 된 호칭은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서문세가의 선산으로 향하는 이때에 들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은조영은 목이 메여서 잠시 헛기침하고는 대답했다.
“고맙구나…… 아들아.”
“뭘 고맙다는 겁니까, 꾸짖었는데.”
서문경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서문패가 끌끌 웃었다.
웃기지 않는가, 한쪽은 진심으로 꾸짖었는데 정작 듣는 쪽이 다른 부분에서 놀라서 감동을 받고 있으니.
서문패는 히죽 웃고는 은조영에게 다가갔다.
“거, 형수님.”
“예?”
“휘가 소가주도 됐고, 경이도 이제 가깝게 대할 것 같으니 본가에게 우리 좀 도와달라고 해 주시지요.”
“……원래 그랬어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지 않겠냐는 듯, 은조영의 눈가가 매섭게 좁혀졌다.
서문세가의 안주인으로서 현 상황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황제의 총애를 입고 있기에 활발히 움직이지만, 언젠가 폭풍이 다가올지 모르는 일.
특히 서문세가의 재산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정의맹과 연계하여 구주 곳곳에 병참을 세우느라 드는 비용과 병사가 특히 그러했다.
은조영의 본가에서 큰 결심을 해 줘야 할 때.
은조영은 서문패의 어깨를 슬쩍 밀어냈다.
“하루가 다르게 허락이 떨어지고 있으니, 삼십 일이 지나기 전에 결과가 나올 거예요.”
“그쪽 가문도 참 피곤하구만. 대가문이란 원래 그런가.”
서문패가 혀를 가볍게 차고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대부분 가문 간의 정세와 관리끼리 나오는 알력 다툼.
서문경은 그것을 한쪽 귀로 흘리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휘는 저런 곳에 관심이 많나.’
자신과 다르게 서문휘는 두 중년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저 나이에 뛰어노는 게 아니라, 어두운 정치 싸움에 관심이 깊다니.
은조영의 무리한 교육이 문제였을까, 원래 저런 걸 좋아했던 걸까.
이제는 구분이 가질 않아서 피식 웃고 지나갔다.
오히려 좋았다.
서문경은 저런 화제나 다툼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동생이 알아서 하겠지. 소가주잖아.’
자연스레 어린 동생에게 불편한 걸 떠넘긴 서문경은 자기 딴에 잘 꾸민 성하민을 보았다.
“……푸흡.”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여태껏 무공이나 수련하던 성하민이 자기 얼굴을 꾸미는 데 익숙할 리가 없다고.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진짜로 우습긴 했다.
대가문의 여식으로서 표정 관리에 익숙한 은조영조차 한순간 웃음을 드러낼 정도였다.
‘죽웅(竹熊:판다)인가?’
얼굴을 하얗게 그리다가 차마 눈까지 제대로 하지 못해서, 저런 꼴이 되어 버린 것.
시선이 마주친 성하민은 금방 울상으로 변했다.
“끄아아아…….”
“울지 마. 번질 텐데.”
“다, 닦을 거예요.”
성하민은 황급히 물병을 꺼내서 얼굴에 흩뿌렸다.
소매로 이리저리 홱홱 닦고 나니, 옷은 더러워졌지만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차라리 이게 낫지.
서문경이 속 편한 표정을 짓자, 성하민이 입술을 삐죽였다.
“잘 보이려고 한 건데…….”
“원래 얼굴이 낫지. 아니면 도움을 구했으면 됐잖아?”
“그건…….”
성하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할지야 잘 알았다.
“우리가 군문이라 여인도 몇 없고, 어머니한테 도움을 청하긴 내 눈치가 보여서?”
“…….”
“뭐 너까지 눈치를 보고 그래. 어찌 보면 빈객이나 마찬가진데.”
“아, 그치만.”
“그렇게 보지 않아도 돼. 우리가 짧게 본 사이는 아니잖아.”
“……응.”
그 말에 무언가 느껴진 바가 있는지 성하민이 시선을 피했다.
삼 년하고도 넉 달.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동안 강적과 싸우고 수련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정말 든든한 전우지.’
서문경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성하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앞으로도 함께하자고.”
“그, 그래.”
성하민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데, 뭔가 바라는 바가 있어보였다.
그 모습을 본 서문경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슬슬 선물을 바랄 땐가?’
하기야, 함께 다닌 시간이 있는데 너무 무정했을지도 모른다.
서문경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언제 가문으로 돌아가면 수소문해서 좋은 검을 찾아볼게.”
“…….”
성하민의 얼굴에 실망감이 비치자, 서문경도 입술을 씰룩일 수밖에 없었다.
‘안 본 사이에 욕심이 조금 늘었나? 좋은 검이라면 그냥 좋아할 줄 알았는데.’
잠시 고민한 뒤, 뒤늦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검에 검갑, 무공서까지 찾아볼게. 어때?”
“……고맙네.”
말은 저렇지만, 목소리엔 냉기가 가득했다.
성하민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지더니 서문경을 지나쳤다.
서문경으로선 어이가 없었다.
어렴풋이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긴 했다.
‘설마 날 좋아하나?’
예감이 들긴 했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몸은 어려도 정신은 이립을 넘은 장성이었으니까.
여동생으로 보일 순 있어도 도저히 연인의 상상이 들지 않는 것이다.
……물론 외견상 어려서 많은 이득을 보기도 하고, 깽판을 치기도 했지만 남녀 사이가 쉽게 달라지진 않는 법.
서문경은 복잡한 마음을 품은 채 성하민을 뒤쫓아갔다.
“같이 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중년인, 서문패와 은조영이 킥킥거렸다.
앞으로 서문세가 내부에서 무슨 소문이 퍼질지야 뻔했다.
* * *
가문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정오.
서문경은 선산의 정상에 도착했다.
“……스읍, 하.”
공기는 맑았으나, 보이는 곳곳에 위령비와 묘비, 언제 세워졌을지 모를 공적비(功績碑)가 가득했다.
사자(死者)의 터였다.
서문경은 미리 챙겨온 물품을 꺼내고는 가문에서 배운 예법에 따라 수많은 봉분과 묘비에 예를 다했다.
“…….”
“…….”
평소라면 이리저리 까불었을 서문패조차도 엄숙한 표정으로 예를 다했다.
대가문의 여식인 은조영이나 서문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단 한 명.
“아, 엇.”
오직 성하민만이 허둥지둥했다.
전밤에 배웠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예법을 배운 사람보다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워.’
여기서 좋은 모습을 보여서 호감을 얻고 싶었건만.
성하민이 시무룩하는 사이에 은조영이 다가왔다.
“여기선 이렇게.”
“……아, 예!”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내심 적으로 삼았건만, 이렇게 다가와서 도와주니 얼마나 든든한지.
성하민은 은조영의 도움으로 예법을 완벽히 마쳤다.
“고, 고맙습니다…….”
“별 말은. 첫째 아들의 부인이 될지도 모르잖아. 며느리한테 몇 가지 알려 준 거야.”
“……아.”
성하민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막연히 상상하고 있는 것을 직접 들으니 몸이 비틀어질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로 싸우는 것이 좋아서 서문경과 함께하겠나.
마교가 싫어서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길 구해주고 도와준 서문경에 관한 은혜와 감정.
그것을 따라다니면서 표현하고 싶었지만, 정작 받아 주질 않으니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은조영은 깊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아비도 마찬가지거든.”
“……예?”
“내 남편 말이야. 저런 식으로 다 알면서 거리를 두고, 어색하게 군단 말이지. 정말 나쁜 사람 아니니?”
“…….”
“그럴수록 더 가깝게 부딪쳐야 해.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니까, 먹힐 거야.”
“아, 아주…….”
“미리 시어머니라고 불러 볼래?”
“…….”
성하민의 입술이 조개처럼 닫혔다.
도저히 은조영을 그렇게 부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서문패가 끌끌 웃다가 손을 흔들었다.
“놀리는 건 거기까지 하고! 다들 모여!”
그 말에 은조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등을 돌렸다.
“자, 가자.”
“……예.”
성하민은 서둘러 표정을 고치고는 은조영을 뒤따라갔다.
그곳에는 깔끔하게 관리된 묘가 있었다.
-화영(花影), 그를 기리며.
서문이현의 필체임이 분명한 묘비.
그리움과 추억으로 가득한 일화를 빼곡이 적은 묘비 하단에 서문경이 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약한 일면이었다.
서문경의 등이 저렇게 작을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성하민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뒤이어 서문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머니.”
세 음절.
한 단어를 꺼내는 목소리에 슬픔이 가득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