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2)
다음날 새벽.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서문경은 직접 물을 써 세안했다.
얼굴을 깔끔하게 닦고서 복장을 다듬었다.
구김없이 잘 펴진, 깨끗한 백의(白衣)를 미리 준비한 터다.
잘 차려입고서 밝아지는 하늘을 보았다.
“…….”
바람은 찼다. 가을은 어느새 겨울로 변하고 있었다.
삼 년이 지나고 또 일 년. 해가 지나도 시간이 지났다는 감각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 사명감이 있었다.
마교와 싸워 본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진실에서 기인한 사명감.
정의나 도의 같은 걸 붙일 수도 있었다.
만일 자신의 무림인이었다면 가당찮은 하늘의 뜻을 덧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서문경은 군인이었다.
서문세가의 일원이고, 대명에 속한 관인이었다.
그래서 경계를 그을 수 있었다.
해야 하는 것, 안 해도 되는 것.
여러 가지를 구분 지으며 강호를 떠돌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체감이 안 될 만큼, 너무나도 바빴다.
“……불효막심했구나.”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 빈소에 찾아가질 않았을까.
서문경의 입김이 하얀 연기를 피웠다.
“경아.”
서문경은 조용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추위로 빨갛게 상기된 성하민의 얼굴이 보였다.
“뭐야?”
“들었어. 정오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나도 여기 지낸 지 오래됐는데, 한 번쯤 괜찮을까?”
“……음.”
서문경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뭐라고 서문세가의 묘소에 들려서 인사를 드린단 말인가?
부인이라면 모를까…… 묘지기부터 시작해서 좋지 않은 소문이 두 사람 사이에 퍼질 것이야 뻔한 일이었다.
“…….”
“…….”
서문경은 성하민과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그녀가 웃었다.
“아…… 예절이 아니었나? 내가 그런 건 잘 몰라서…….”
“아냐. 같이 가지 뭐.”
“응?”
“뭐 어때, 인사드리러 오는 사람이 많으면 좋아하시겠지.”
빈말은 아니었다.
성하민은 여태껏 함께했고, 앞으로도 함께할 동료이자 친우였으니까.
오히려 그녀를 빼놓고 가면 인사를 하러 가는 의미가 줄어들 것이다.
서문경은 그리 생각했지만, 성하민은 달랐을까.
“……좋아.”
결심을 품은 듯 자기 뺨을 툭툭 두들기는 성하민.
뒤이어 성하민이 다시 집으로 들어가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외쳤다.
정오까지 단장이라도 하려는 건가.
서문경은 길게 하품하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제는 무공사전을 쥐지 않아도 심상에 입장할 수 있었다.
쿠구궁……!
둔중하게 울리는 울림.
제천대성이 썼다는 여의봉보다 커진 천주의 정상에서 서문경이 눈을 떴다.
“후우.”
가벼운 심호흡.
정신이 맑게 갰다.
서문경이 자연스럽게 오른팔을 뻗자, 장창이 손아귀에 잡혔다.
후웅, 훅!
좌에서 우로, 우에서 사선으로.
수많은 선이 운무를 베고 희롱했다.
창왕에게 배운 것과 스스로 터득한 것을 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서문경은 창왕과 싸우던 때를 떠올리며 창을 휘둘렀다.
수백에서 천의 움직임을 행해도 지치질 않았다.
심상이어서 가장 좋은 점이었다.
아무리 고수여도 현실에서 이렇게 펼친다면 기절해서 하루를 꼬박 정양해야 했을 테니까.
그러다 문득.
‘슬슬 나타날 줄 알았는데.’
서문경은 아쉬움을 표했다.
창왕에게 승리하고서 약 삼십 일이 지났다.
자신이 목표하는 무예십팔반, 혹은 무의 끝을 보고자 하는 향상심은 꾸준히 일어나고 부풀었다.
그와 비견되는 고수가 천주의 정상에서 나타나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 일 이후로 심상은 적막하기만 했다.
언제 신묘한 일이 생겼냐는 듯, 적막한 공간과 천주만이 서문경을 맞이했다.
‘격이 부족한 건가?’
서문경의 입술이 비틀렸다.
다급함에 가까운 갈망이 심중에 불티를 일으켰다.
창을 휘두르는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강맹해졌다.
후웅, 콰아앙!
창이 곧 돌풍이 되어 하늘을 비틀었다.
운무가 걷히고 모아지길 반복했다.
이는 사천당가에서 있었던 싸움을 되새기는 과정이기도 했다.
언젠가 다시 적마와 싸우게 된다면, 그의 적혈마공을 창 하나로 모으거나 흩어내는 기예를 펼칠지도 모를 테니까.
실제로 창왕은 성공했다고 했다.
그래서 적마만큼은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
‘이 예기를 유지해야 해.’
서문경의 창에 집념이 담겼다.
창왕을 이긴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 겹겹이 겹쳐서였다.
그의 기예를 숙달한 것은 아니었다.
급히 배워서 모방한 수준.
그 틈을 완벽하게 메우려면 창왕과의 싸움보다 더 많은 수련이 필요했다.
“더, 더…….”
서문경의 창이 가속했다.
선은 보이지 않고, 끝에서 터지는 파공성과 파문만이 남아서 꿰뚫렸다.
손목의 내관혈이 타오르듯 쓰라렸다.
근육에 과도한 운용이 쌓여서 병폐로 자리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몸과 정신에 하나의 길을 제대로 새기기 위해서는, 뼈와 살을 깎는 아집(我執)이 필요했다.
어리석다 못해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불굴의 집념.
그것을 강호에서는 무인의 소우주라고 부른다.
대우주라는 돌에 박치기하기 위해 계란을 단단하게 만드는 꼴이었다.
또, 그 행동을 증명(證明)이라고 하니.
상단전 심상에서 빚어 낸 무적의 초식을 실체화하는 것이야말로 고수의 격(格)이다.
콰르르르……!
한줄기 격류가 하늘의 구름을 꿰뚫었다.
관천(貫天)의 창.
창왕은 자기 심상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천마 또한 마귀의 하늘이라면, 자연히 하늘을 꿰뚫는 창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막힌 것이 애석할 뿐이라고, 했던가.”
서문경은 패배자의 한과 기술을 익혔다. 그래서 더 덧붙이길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비한 무공사전을 통해서 창안한 무연창.
모방만으로 명가의 창을 숙달한 천재의 기술을, 노력으로 관천을 행한 패배자에게 접했다.
“……!”
마지막 일점.
서문경의 두 다리가 천주를 강하게 짓밟았다.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이대로라면 창을 휘두르기 전에 몸이 버티지 못하기에.
눈을 부릅뜨고서 하늘을 노려보았다.
천마를 꿰뚫지 못하고 스러진 관천.
그것을 더욱 날카롭게 정련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 필요한가.
서문경은 망아(忘我)에 빠진 채 창을 하늘로 휘둘렀다.
* * *
“……!”
서문패는 자기도 모르게 검을 붙잡았다.
아주 강렬한 존재감.
순간 칠로두가 나타났나 싶을 만큼 큰 위화감이 서문세가 내부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건 다른 사람도 다르지 않았는지, 가주실 내부에서 장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금방 알아오지.”
서문패의 발걸음이 땅을 박찼다.
사천당가에서 당한 상처가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 발이 불편했지만, 기껏해야 가문 내부였다.
도착한 그곳에는 묘한 미소를 머금은 서문경과 우스꽝스러운 꼴의 성하민이 있었다.
“뭐냐?”
“아니,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중간에 뛰쳐나왔는데…….”
성하민이 뒤늦게 자기 얼굴을 가렸다.
이미 늦었다. 단장을 하다가 만 꼴이 어디 쉽게 잊히겠나, 앞으로도 많이 놀려먹을 건수지.
서문패는 히죽 웃고는 서문경 옆으로 다가갔다.
“뭔가 큰 소득이라도 있었냐?”
“……조금요.”
“조금?”
“예. 아직은 잡히려다 만 것 같긴 한데…….”
서문경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별것 아닌 행동이었지만, 서문패의 눈썹이 휘었다.
조카의 손아귀에서 잔향이 남아 있었다.
그것도 조금 전에 느낀 존재감과 뒤지지 않는 묵직한 기운이.
‘앞으로 서문세가 고금제일인은 정해졌구만.’
서문패는 속으로 혀를 찼다.
너무 이른 시기에 서문제일인을 내줘야 한다는 것이 속이 쓰렸지만, 흐뭇하기도 했다.
앞으로 무림인이라는 것들이 서문세가 앞에서 입을 나불거릴 일이 백 년은 없지 않겠나.
오걸이고 십대고수고 서문경 아래서 빌빌 길 것이 우스웠다.
“뭔데 그래. 나한테도 알려 주지 그래.”
평소처럼 별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군문이라고 하나 자기가 뼈를 깎아서 만든 성취를 나누고 싶겠는가?
게다가 그런 게 가르치기 쉬울 리가 없었다.
깊이 궁리하여 만든 초식이란, 대개 치수를 짜서 만든 옷처럼 정교한 법이니까.
그러나 서문경은 즉답했다.
“정확하게 알게 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뭐?”
“전에 사천당가와 싸우면서 검으로는 한계가 좀 있지 않았습니까? 이번 기회에 창도 알면 좋죠.”
“창법이었냐?”
서문패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검법을 완성했다는 놈이, 사천당가에서 갑자기 창을 펼친 것도 신기한데 강렬한 존재감까지 만들 줄이야.
‘재수 없는 놈.’
서문패가 속으로 투덜대는 사이에, 서문경이 물었다.
“삼촌. 묘소로 갈까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어디 묘소?”
“어머니요.”
“…….”
서문패는 저도 모르게 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군문에 시집 온 여식답지 않게 유약하고 여렸던 얼굴을.
물론 그 인상은 서문경에게 단 하나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단 한 가지.
‘성격이 참 좋았지.’
서문이현처럼 맺고 끊는 게 단호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이 많고 가진 걸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성정이 서문경에게 이어졌다고 한다면, 거 참.
‘군문에게 너무 안 어울리는 걸 넘겨준 거 아니요, 형수.’
서문패의 코끝이 시렸다.
“그래. 같이 가자.”
“동생이랑 새어머니도 온답니다.”
“……그 녀석도 철들었네.”
해묵은 갈등을 언젠가 풀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미 그랬을 줄이야.
서문패는 호쾌한 웃음을 머금은 채 서문경과 어깨동무했다.
“좋아! 오늘은 밖에서 밥이라도 사마!”
“내부에서 먹을 겁니다.”
“……재미없기는.”
서문패의 인상이 왈칵 찡그려졌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이런 평화로움 자체가 군관으로서 잘 움직였다는 뜻이니까.
‘앞으로도 이랬으면 좋으련만…….’
서문패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문세가의 선산.
서문의 가족이 묻힌 곳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