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마 (5)
* * *
바야흐로 백 년 전.
이름조차 말살되어 사라진 구(舊) 마교가 있었다.
밀림에서 나타나, 한족을 공격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당시 사천당가는 존재치 않았다.
당(唐)씨의 무인이 독물을 잘 다룬다는 소문만 파다했다.
그때, 당씨는 오독(五毒)의 마인을 보았다.
숨을 내뱉는 것만으로 사람을 핏덩이로 만드며, 고수조차 하독의 순간을 알아채지 못하는 기예.
당씨는 그보다 약했다. 하지만 눈은 마인보다 뛰어났다.
자연스레 마인의 한계를 깨달았다.
‘강하지만, 완성되지 않았어.’
독을 다루는 것만으로 벅차다. 결국 패하고 말 테지.
당씨의 예상대로 오독의 마인은 무림맹에게 격퇴당했다.
용소(龍沼).
폭포수가 떨어지는 깊은 웅덩이에선 마인의 독조차 속수무책이었다.
물방울이 연기를 붙잡고, 독은 아래로 고였다.
오독의 마인이 죽은 자리가 정화되기까지 수십 년.
사천의 성도에 자리 잡은 당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웅덩이에 고인 독을 긁어내서 연구했다.
은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끄윽……끄아아…….”
“제, 제발…… 돈은 돌려드릴 테니…….”
가죽 주머니가 점점 많아지고, 무거워질수록 진척은 빨라졌다.
하지만 오독의 완성은 이루지 못했다.
당씨는 한탄했다.
“누구도 버티질 못하는군.”
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해.
몸이 한 개가 아니라, 최소한 두 개는 되어야 해.
당씨는 그날로 일가(一家)를 꾸렸다.
사천당가.
가문의 이름이 건방지다는 둥 흠집을 내려는 놈이 자주 찾아왔다.
오히려 좋았다.
당씨는 그들을 통해 오독을 다섯 개로 분리했다.
‘하나하나가 절명독(絶命毒)이니, 이것만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릴 수야 있겠지.’
당씨의 생각대로 사천당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오대세가에 발을 들였다.
누구보다 가장 은밀하고 날카로운 무기를 가졌기 때문이라.
하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이래서야 오독의 마인을 넘어서기는커녕 뒤꽁무니나 좇다가 멸문할 게 뻔했기에.
‘어쩌면 좋을까?’
당씨가 고민에 빠져서 뒷마당을 걷던 어느 날이었다.
“히, 하하.”
아이의 웃음소리를 따라갔다.
보나마나 흙 놀이나 암기를 던지는 연습을 하고 있겠지.
별생각 없이 좇아간 곳에는 나이를 약관이나 먹고도 한량처럼 사는 막내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무얼 하느냐?”
“……!”
막내가 황급히 무언가를 숨겼지만, 당씨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기꺼웠다.
“허, 이놈. 비고에 있는 오독(五毒)을 훔쳐서…… 실험을 하고 있었구나.”
“…….”
막내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흙을 덮어 놓은 자리에는 여러 마리의 쥐와 바늘들, 오독이 담긴 작은 호리병이 있었다.
당씨는 천천히 다가가서 살폈다.
“바늘마다 조금씩 오독의 양을 다르게 해서 간이나 손끝, 발끝을 찌른다라…… 내가 수십 년 전에 해 보았던 것이다.”
“…….”
“이미 해 본 것을 되풀이하는데 오독을 낭비해서야 되겠느냐?”
“……칫.”
막내가 한순간 혀를 차더니 손끝을 튕겼다.
손톱 아래에 숨긴 암기가 섬전처럼 날아간다.
당씨는 타고난 눈으로 암기에 묻은 독을 보았다.
‘오독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만든 건가.’
하독한 다음 해독약으로 협박이라도 할 심산이었나.
당씨의 미소가 짙어졌다.
스무 해 동안 여태껏 자신을 숨기고 꾸민 짓이 귀엽기도 하고 동질감이 느껴졌다.
뒤이어 화가 치밀었다.
“애비한테 말하면 도와줬을 것을, 시간을 이토록 낭비하고 있었다니!”
당씨가 소매를 휘둘러 암기를 쳐 내고 막내의 멱살을 붙잡았다.
자안(紫眼).
독기를 쐬다가 어느새 눈동자까지 물들었다는 당씨의 기세가 막내에게 쏘아졌다.
“내가 누구더냐.”
“……사천당가의 초대 가주이신 독왕입니다.”
“아버지란 소리는 죽어도 안 하는구나.”
“어차피 자식이라고 해 봐야 무쓸모하면 독에 절이다 버릴 놈들 아닙니까?”
막내가 입술을 비틀었다.
“죽느니 독이라도 훔쳐서 독립하는 게 낫지요. 그걸 위해서 이십 년이나 버텼습니다.”
그 말에 당씨, 독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쓸 만한 놈이 보인 것 같아서.
독왕은 막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는 가주가 되지 못할 거다.”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막내의 표정이 묘해졌다.
당장 자길 죽일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때 독왕의 말이 이어졌다.
“나의 진전을 이을 거다.”
“……예?”
“가주가 되어 보니 알겠다. 내가 이루려는 건, 가주와 병행해선 불가능해. 세간의 눈치를 봐 가면서 어찌 대업을 이룰까!”
독왕은 히죽 웃었다.
“사천당가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 싶지 않더냐.”
* * *
한때 초대 가주의 막내아들이었던 남자.
중년인은 머릿속의 기억을 지웠다.
마침내.
자신의 아버지이자 초대 가주조차 이루지 못한 오독의 완성을 이룬 전율이 온몸을 강타했다.
“저놈들을 죽여라.”
독왕의 말에 면사를 쓴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걸음걸이마다 시퍼런 발자국이 남았다.
흙이 짓무르고 초목이 꺼멓게 물들었다.
그야말로 독인(毒人)을 넘어선 영역.
유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요?”
“……글쎄.”
여인이 입술을 달싹였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듯, 유화와 시선을 맞추더니 슬며시 눈웃음 지었다.
“그게 중요할까?”
“어떻게, 아미파의 내공을…….”
“뭐, 같은 피를 공유한 셈이니까. 아미파 내공의 잔흔(殘痕)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지.”
“……!”
유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으니까.
상식을 벗어난 이야기에 몸이 순간 굳었으나, 서문경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적마의 도움을 받았느냐?”
“……호오, 그걸 어찌 알았느냐?”
독왕이 감탄성을 흘렸다.
마교와 싸운 사람이야 많지만, 그들의 실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으니까.
사천당가처럼 구 마교의 잔재를 먹고 자라난 게 아닌 이상, 모르는 게 당연했다.
“저렇게 시퍼렇게 젊은 놈이 마공을 알 줄이야. 허나, 그것이 실수다. 몇 놈이라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 손으로 내다 버린 것이야.”
“마교와의 접점을 부정할 생각이었나.”
“클클…… 부정이라니, 독마를 더 많이 만들어 낸다면 그놈들조차도 내 발아래로 둘 수 있을 텐데.”
독왕은 웃으며 말했다.
“시간만 끌면 그만이다.”
“왜, 적마 말고 다른 칠로두가 알면 큰일인가?”
“…….”
의표가 찔린 듯 독왕이 인상을 찡그렸다.
서문경은 그제야 사천당가의 변화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깨달았다.
과거 자신에게 패한 적마.
그가 다시 힘을 되찾기 위해서, 마교가 아닌 사천당가와 접촉하여 사특한 비원(悲願)을 이루도록 도와준 것이다.
서문경의 검이 똑바르게 쥐어졌다.
“마교도 피곤한데, 너희들까지 활개 치게 둘 순 없지.”
“우습군.”
독왕의 얼굴에 비웃음이 올라왔다.
눈앞에 있는 서문경과 서문패, 별동대의 무위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겨우 이 숫자로 이길 수 있겠느냐?”
유화의 피로 만들어 낸 독마는 위험하기로만 따지자면 칠로두 이상.
백야흔 때처럼 오걸 둘이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기껏해야 서문패와 서문경을 제외하면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독왕 자신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잘되었다. 서문경, 네놈의 재주가 그리 뛰어나다는데 붙잡아서 피 주머니로 써야겠구나.”
“……하, 하하하.”
“실성했느냐?”
“그럴 리가.”
서문경이 가만히 고개를 털었다.
확실히, 이곳의 상황만 따지자면 어려웠다.
독마는 전생에서 존재하지 않았기에 얼마나 위험한지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사천당가가 독마를 얻었듯, 서문경 또한 전생과 다른 힘을 얻었다.
“잘됐어.”
서문경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제까지고 합공에 의존할 수 없다.
스스로의 힘으로 칠로두 중 한 명을 확실하게 죽일 힘을 지녀야 한다.
그것을 위해 무공사전과 천주심경의 수련을 꾀하지 않았던가.
“창 좀 빌리지.”
“……예!”
서문경은 별동대원의 창을 받고는 자세를 잡았다.
과거, 심상에서 마주했던 창왕처럼.
놀라우리만큼 날카롭고 정련된 살기를 독왕과 독마에게 쏘아 냈다.
“시작할까.”
“흥. 검이 아니라 창이면 하독당하지 않을 줄 아느냐?”
독왕은 가소롭다는 듯 끌끌 웃었다.
뱀처럼 가늘게 찢어진 눈에서 살기가 진득하게 뚝뚝 떨어졌다.
독마만큼은 아니더라도 오독을 수없이 실험하며 완벽하게 다룰 줄 아는 몸이기에.
실명독, 삼보절독.
두 가지를 장침에 발라서 쏘아 냈다.
기이하게 구부러진 장침은 기류에 따라 이리저리 꺾이며 날아갔다.
서문경은 그것을 똑바로 보면서 상반신을 기울였다.
독왕의 얼굴에 비웃음이 맺혔다.
“그깟 것.”
암기가 비틀거리다가 단숨에 꼿꼿이 날아간다.
상반신을 기울인다고 한들, 독왕의 암기술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서문경은 몸을 기울인 상태로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철창이 한순간 휘어지는가 싶더니 암기를 역으로 쳐 냈다.
“……!”
독왕은 인상을 찡그리고는 손목을 휘둘렀다.
두 장침이 허공에 부딪치자 자줏빛 연기가 퍼졌다.
‘너 같은 놈이 어디 한둘인 줄 아느냐?’
재주가 뛰어나, 장침쯤이야 가볍게 쳐 내는 무인은 숱하게 많다.
서문경도 마찬가지로 쳐 냈지만 하책이다.
오독이 뒤섞여서 만들어진 독연은 드넓은 평지에서도 살상력이 줄어들지 않는다.
독왕은 서문경을 비롯한 별동대가 쓰러지길 기다렸다.
바로 그때, 바람이 일었다.
후우웅…….
창으로 일어난 돌풍이 삽시간에 독연을 한곳으로 몰더니, 위로 승천시켰다.
“이게 전분가?”
서문경은 태연히 말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