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마 (4)
-천수독안은 너에게 맡기마.
서문패의 전음이었다.
서문경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장로들 중 가장 악독하고 강한 것으로 알려진 장로.
그를 상대하면서 부대를 지휘할 순 없다.
서문패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러나 당각 또한 생각이 같았다.
“어딜 가려고 하느냐?”
당각은 서문패가 부대장임을 직감했다.
여기서 서문패를 죽이면 별동대의 기세를 꺾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을 품었다.
바로 그때였다.
휘르륵!
서문경의 검기가 당각을 향해 날아갔다.
반원의 형상에 담긴 살기는 놀라우리만큼 차갑고 날카로웠다.
제자리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을 정도.
“네 이놈!”
당각의 눈썹이 비틀렸다. 금방이라도 독장을 쏘아서 죽이겠다는 듯 손가락 마디가 뒤틀렸다.
그럼에도 서문경은 담담하게 말했다.
“정하는 것은 나다.”
“뭐라?”
“한낮 지네나 뱀 따위가 언제부터 사천을 칭하였는가. 그리고 서문세가 앞에서 사천성의 안정을 어지럽힌 죄는 갚지 않고 넘어갈 생각이었나?”
서문경의 얼굴에 냉소가 스쳤다.
“그래서는 안 되지.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러지 못한다.”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당각이 진노를 금치 못하고 눈을 부릅뜨자, 서문경은 칼로 땅을 내리찍으며 답했다.
“말했을 텐데.”
“……!”
투쾅!
기습적으로 휘둘러진 검기가 당각의 옆구리를 때려, 엄청난 모래구름이 휘몰아쳤다.
그 속에서 인영(人影)이 춤추듯 흔들렸다.
“너에게 선택권은 없다.”
“놈!”
당각의 얼굴에 독심(毒心)이 어렸다.
지체하지 않고 서문경을 죽여 버리겠다는 살기가 흉하게 번졌다.
그걸 느낀 서문경은 서늘하게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뒤이어 인영(人影)이 한순간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꽈앙!
당각이 휘두른 독장과 검의 끄트머리가 부딪쳤다.
그 충격에 부옇게 번졌던 모래구름이 양옆으로 흩어졌다.
후읍.
당각은 찰나의 숨을 머금었다.
시선으로 검의 미세한 움직임을 추격했다.
‘나에게 행로가 읽혀지는 순간,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죽을 것이다.’
지금이야 검으로 자신을 압박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승기를 쟁취할 수 있을 터.
당각은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여기저기 흩뿌린 독연과 독기가 서문경을 완전히 중독 시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일식경.
‘당가를 여기까지 키우는데 수십 년이 걸렸거늘, 어찌 일식경을 기다리지 못하겠는가.’
당각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발목이 기괴하게 꺾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서문경의 눈앞까지 움직였다.
“……흠.”
서문경의 얼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제법.”
하나 거기까지라는 듯, 서문경은 말을 아꼈다.
변칙적인 움직임은 다소 의외였으나 반응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환영이었다.
쩌쩍!
서문경의 발꿈치가 당각의 발등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당각은 발등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감내했다. 작은 신음이 전신을 울리는 듯했다. 하나 물러서는 일은 없었다.
스슥, 팡!
끓어오른 독기가 서문경의 상반신을 집어삼켰다. 바야흐로 지천명, 오십 년 동안 정련한 독기였다.
새파란 애송이가 막아 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당각은 비소를 머금은 채 서문경의 비명을 기다렸다.
……휘르르.
무언가 휘돌려지는 소리가 당각의 귓전을 스쳤다.
비단 소리만이 아니었다.
핏.
코끝이 날카롭게 긁혀졌다. 당각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야만했다.
멍하니 있었다간 돌풍에 휩쓸려 전신이 쓸려나갔을지도 몰랐다.
당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팔방풍우?”
단순히 검을 둥그렇게 휘돌리는 초식처럼 보이나, 실상은 달랐다. 그 안에 새겨진 묘리가 만상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서문경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번검유회(繁劍遊回).”
“……!”
당각은 초식이 본래 검초인 것에 놀랐으나, 서문경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빠악!
칼날이 명치를 베었다. 독혈이 뿜어져 나왔으나, 서문경은 아무렇지 않게 피해 내며 옆으로 파고들었다.
당각은 내상을 추스르며 뒤로 물러났으나,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서문경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것처럼 보여도, 점차 독기가 서문경을 좀먹고 있었다.
상처가 썩어 들어가고 피부가 점차 보라색으로 물든다.
따끔거리는 고통에서 갑자기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순간 서문경은 자지러지며 목숨을 구걸할 터였다.
바로 그때였다.
“……음.”
서문경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작은 신음이 흘렀다.
당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질주했다.
후읍.
티끌만 한 숨이었지만, 모든 근육을 짜 내는 덴 충분했다.
쿵!
왼발로 땅을 짓누르고, 쌍장을 모아 앞으로 내지른다.
십지독룡(十指毒龍).
당각이 당가의 비전을 모두 총망라하여 만든 성명절기이자, 그가 가진 최고의 무학이었다.
사르르륵…….
독기로 이루어진 열 마리의 독룡이 발출되며 모든 걸 부식시켰다.
심지어는 독룡과 맞닿은 대기가 썩어 문드러져 누렇게 변할 정도였다.
그걸 본 서문경은 미묘한 웃음을 드러냈다.
“필요 없겠군.”
그 말을 끝으로 서문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단전에 잠들어 있던 내공을 빠르게 일주천시키자 창백했던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서문세가의 무공만큼 대단치 않아.”
휘르륵…… 파앙!
검이 빠르게 회전하며 번검유회의 초식이 펼쳐졌다.
하나 아까 전과는 달리, 서문경의 검에 청명하기 그지없는 내공이 맺혀 있었다.
‘겨우 이립이나 되었을 법한 놈이 저토록 완벽한 강기(罡氣)라니!’
그것도 망했다고 알려진 서문세가에서!
당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뒤이어 경악이 담겨졌다.
독기를 한없이 응축시킨 십지독룡이 서문경의 강기에 지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각의 마음은 꺾이지 않은 채 다음을 노리고 있었다.
‘독기가 몸을 좀먹은 이상, 열 걸음조차 버티지 못할 거다……’
자신이 우위에 서있다 확신하는 오만.
당각은 번검유회가 멈추는 순간을 기다렸다.
독에 당한 이상, 초식이 완벽할 수 없었다.
찰나라 할지라도 틈이 있다면 비집고 들어가리라.
당각이 투기를 누그러뜨리지 않자, 서문경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바보 같은 짓을.”
서문세가의 무학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 다듬어지고, 완성되었다.
전쟁에서는 하나의 칼만 상대할 수 없다.
멀리서 날아오는 활과 창, 심지어는 폭풍우처럼 떨어지는 폭연과 마주해야 했다.
그런 무공에 틈 따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서문경은 번검유회를 멈추고 찰나의 순간 동안 검을 반회전시켰다.
뒤이어 검을 역으로 쥐었다.
“……!”
그걸 본 당각은 완전히 썩어 버린 검을 부수려 우장을 휘둘렀다.
아무리 강기를 둘렀다고 한들, 주체인 검을 부러뜨리면 무위로 돌아가니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내가…… 이대로 물러날 것 같으냐!’
중원무림에 도전하기 위해 천수독안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사천의 문파를 모두 복속시켰다.
당각의 얼굴에 강한 집념이 어렸다.
“강호에서 태어나, 웅비하려는 목표에 어떤 죄가 있단 말이냐!”
“…….”
“강호의 어느 누구도 나를 심판할 수는 없다!”
서문경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말했지만, 이것은 서문세가의 삼공자로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천명(闡明)이었다.
서문세가를 건드린 이상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
감히, 감히…… 서문세가의 가주에게 독수를 쓴 사천당문의 멸족(滅族).
서문경의 얼굴에 서늘함이 짙어졌다.
일검적심(一劍赤心).
벼락과도 같은 강기가 당각을 스쳐 지나갔다.
“……큭.”
당각은 자신의 오른팔이 잘려 나간 것을 보고 고소(苦笑)를 머금었다.
만일 찰나에 반응하지 못했다면 반신이 잘려 나갔을 터였다.
나이에 비해 너무도 강하다.
아무리 일인전승과 기연이 숱한 강호라지만 서문경의 성취는 나이를 초월한 데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 남자가 뇌리에 떠올랐다.
‘독왕…….’
사천당가의 마천루에서 고고히 내려다보는 자.
당각은 주위를 바라보았다.
서문패와 별동대의 쉴 틈 없는 합격이 장로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하물며 천무의 기재를 몸에 품었다는 유화마저도 완전히 개화하여 아미파의 절기를 펼치니.
불타는 사천당가가 눈에 훤히 그려졌다.
“……도와주십시오, 지존.”
“뭐라는 거냐.”
서문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주변을 극히 경계했다.
사천당가가 인의와 도리를 저버린 것이 의아하긴 했다.
지금까지 정파의 가면을 잘 써 온 놈들이 갑자기 유화를 납치했다는 건,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을 테니까.
‘마교인가?’
서문경은 자연스럽게 마교의 칠로두를 떠올리며 전방을 주시했다.
장로가 일제히 흩뿌린 연보라색 독연.
그 위로 불타다가 멈춘 지하실의 시꺼먼 연기가 나풀거린다.
서문경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어느덧, 불을 향해 몸을 던지던 행렬이 멈췄음을 깨달았다.
“한 번 더 불을…….”
“아니. 그렇게 둘 순 없지.”
중년의 목소리에 깊은 울림이 있었다.
서문경은 반사적으로 대해(大海)를 떠올렸다.
그만큼 목소리에 담긴 공력은 지금까지 본 고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신승에 가깝다……!’
칠로두처럼 아주 오랫동안 살았거나, 대를 이어서 축적하였거나.
서문경의 검이 지하실로 겨눠졌다.
그러자 중년인이 껄껄 웃었다.
“첫 인사가 험하군.”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친절할 순 없지.”
“그리 말하는 너야말로 당가의 불청객이자 침입자 아닌가?”
“…….”
서문경은 침묵으로 고했다.
어차피 벨 것이라면, 불손할지언정 대화조차 필요치 않다고.
그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중년인이 말했다.
“단호하군. 어린것이 무림의 노강호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기를 헤치고 나오는 두 인영이 있었다.
체구가 칠 척에 가까운 중년인과 면사를 쓴 여인.
중년인이야 대화를 나눴지만, 여인의 기척이 묘하게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유화?’
면사를 쓴 여인에게서 아미파의 내공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유화의 시선이 저절로 여인에게 향했다.
면사 아래로 여인의 미소가 드러났다.
미세하게 풍기는 독연.
그러나 장로들이나 당가의 무인이 펼친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모두 복면을 고쳐 써라!”
서문패의 호령에 별동대가 몸을 낮추며 복면을 썼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었다.
지하실도 아니고 밖에서 이렇게까지 연기를 조심할 필요가 있나?
그 안일한 생각은 곧 무너졌다.
파스스스…….
연기가 닿는 것과 동시에 생기를 잃어 가는 새싹들.
별동대의 표정이 굳어지자, 중년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사천당가의 전설이 재림하였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