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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무공사전-177화 (175/250)

독마 (2)

‘이제 좀 쉬나 했더니만.’

서문경은 입이 찢어지라 크게 하품했다.

상황은 아직 전달받지 못했다.

별동대 집합이 본래는 흔하지 않은 일지만, 마교가 준동하여 이곳저곳을 집어삼키는 만큼 사나흘에 한 번씩 부른다고 들었다.

서문경이 다시 한번 하품하며 쩝쩝거리자, 서문패가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냐?”

“워낙 피곤하지 않았습니까. 삼촌도 잘 아시면서.”

“……쯧.”

서문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혀만 찼다.

군기에는 기율(紀律)이 있다. 별동대장으로서 나태한 서문경을 꾸짖어야 기둥이 바로 서는 법이었다.

하지만 지난 보름.

그동안 서문경이 무엇을 하는지 보았다.

오걸과 대등하다는 검치와 그의 제자인 양명성, 진무신검 사이에서 능숙하게 줄다리기하고 정의맹의 전력으로 끌어왔다.

명분은 간단했다.

-각자 빚이 있지요?

흘러가듯 자연스레 한 말이었다.

사실, 그들의 무위라면 빚을 아예 잊고 살아도 됐다.

심상만으로 사람을 죽이고 산을 동산으로 깎아 버릴 재주가 있는 자들 아닌가.

서문패조차도 그들이 거부한다면 속으로 ‘X발’ 하고 끝나야만 했다.

그러나 서문경의 물음에는 힘이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검치는 지난 숭산에서 있었던 빚을 잊지 않았고.

“소협과는 인연이 깊고, 성품을 확인하였으니 함께하고 싶소.”

진무신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파 본산까지도 설득하겠다니, 반쯤은 넘어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들의 말을 듣고도 무림맹주가 가만히 있었다.

여태껏 서문경이 무림에서 쌓아 온 인망과 명성.

그것이 곧 설득력이 되었다. 서문경이 여러 명사와 만나서 점잔을 떠는 모습은 신묘하기까지 했다.

‘에휴, 너무 잘난 조카를 둬도 문제구만.’

이러다간 군기와 기율이 망가지고 말 터인데.

서문패는 속으로 불만을 꿍얼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둔중한 기세였다.

믿고 따르는 존재, 가주 서문이현이 장원의 구령대에 표홀히 나타났다.

“전부 나왔는가?”

“…….”

“좋아, 그럼 하명하지.”

서문이현은 가문에 누가 찾아왔는지, 은정사태의 소망이 무엇인지조차 말하지 않았다.

‘사정까지 말하면 본질이 흐려진다.’

별동대의 역할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것.

정(情)을 덧붙였다가는 손발이 느려진다.

게다가 상대는 사천성의 성도에서 오랫동안 주인처럼 군림해 온 당가였다.

서문이현의 눈이 어둠 속에서 서늘히 빛났다.

“사천당가에 있는 인질을 구출하고, 그들을 멸하라.”

* * *

유화의 눈은 뜨이지 못했다.

온통 어둠이었다.

사천당가에 도착하고 하루도 되지 않아, 얼굴에 헝겊이 씌워졌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방법은 오직 하나.

촤아악!

차가운 물이 헝겊에 쏟아진다.

하루에 세 번, 죽지만 않게 목숨을 연명시키는 방법이었다.

“커헉, 컥…….”

바로 옆에서 은명사태의 기침이 들렸다. 고통스럽고 힘겨워했다.

유화도 마찬가지였다.

헝겊을 적신 물을 입술로 빨아먹는 것 외에 살아남을 방도가 없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가장 힘겨운 것은 어둠.

그녀가 가늠하기로 일주일에서 보름여, 빛 한 점 보지 못하고 지내는 것이 고역이었다.

“……언제까지.”

유화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요. 먹지 못하면 죽을 거예요.”

“죽진 않아. 힘들 뿐이지.”

한껏 예민해진 청각(聽覺)이 중년인의 목소리를 빨아들였다.

그마저도 억양을 숨기기 위해 단답이었다.

유화는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왜요……?”

“힘을 빼놓아야지. 탈출을 시도조차 안 하겠지.”

“사저는 놓아주세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화의 어깨에 무언가가 닿았다.

바늘이었다. 그것도 아주 작고 뾰족한 철침(鐵針).

뒤이어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놓아준다는 건, 죽이란 소리야.”

“…….”

“원한다면 그러지. 입이 없는 게 덜 귀찮으니.”

“안 돼요…….”

“흥.”

중년인이 가볍게 코웃음쳤다.

어깨에 닿은 침이 멀어졌다.

유화는 바늘에 찔린 자리가 소스라치게 아팠다. 긴 시간 동안 어둠에 있어서일까, 통각이 한쪽으로 쏠린 것 같았다.

“……으.”

그 통증은 유년기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한참 동안 열병에 끙끙 앓았더랬다. 몸이 약한 거야 알았지만, 그날은 정말로 죽을 것 같아서 사저들끼리 발을 동동 굴러 댔다.

그녀들 중 은명사태가 나섰댔다.

목소리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뭣들 하는 거야! 사매를 살려야지!

은명사태가 직접 전대 장문인께 가서 간청했다던가.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모른다. 막연히 기억나는 건 목소리와 온기였다.

목소리가.

“화야…….”

“사저, 힘내요. 누가 도우러 올 거예요.”

“으음, 으…….”

은명사태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래 전부터 지병이 있었다고 들었다. 냉기가 가득한 곳에 갈 때마다 기침을 심하게 하곤 했다.

이번에는 축축한 헝겊이 폐부를 압박해서였다.

유화의 다급함이 고함처럼 터졌다.

“이대로 사저가 죽을 거예요. 하다못해, 코만은 열어 주세요!”

“관심 없어.”

“협력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곤란한데.”

중년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말을 들어 줄지도 모르겠다.

유화의 기대감은 그대로 배신당했다.

푸욱.

피부를 찔러 오는 바늘, 몸이 그대로 멈춘 듯한 이질감.

사천당가의 점혈이었다. 내공이 온전했어도 쉬이 풀지 못할 만큼 꼼꼼하기까지 했다.

유화가 뻣뻣하게 굳자, 중년인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하하. 이제 협력할 수밖에 없을걸.”

“…….”

“사저라고 했나? 왜 애꿎은 데까지 데려와서 죽게 만드나. 쯧쯧.”

“…….”

유화는 속으로 중년인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그러다 한 가지 변화를 느꼈다.

이번에는 온기가.

“괜찮아…… 괜찮아…….”

목소리가 희박해지는 만큼 천천히 온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은명사태는 죽어 가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웃음기조차 목소리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내가 멋대로 따라온 거니까. 탓하지 말고. 알겠지?”

“…….”

“아화. 아화야…….”

바람 소리가 들렸다.

푹 젖은 헝겊에 목소리가 막혀서일 것이다.

온기도 그 축축한 한기에 덮였다.

툭.

유화의 어깨에 무거운 것이 얹어졌다.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아…….’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지르지 못했다.

눈물만 흘렀다. 어둠 속에서 막연히 상상만 했다.

자신의 어깨에 기댄 채 죽은 은명사태의 최후를.

어린 시절, 열병에서 꺼내 준 가족과의 결별을.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메였다. 차라리 가슴이 터졌으면 했다. 함께 죽었으면, 이토록 고통스럽진 않을 테니까.

유화는 깊은 증오를 느꼈다.

‘죽일 거야…….’

중년인의 목소리를 똑똑히 떠올렸다.

적색, 피로 만들어진 채무(債務)가 머릿속 깊이 새겨졌다.

‘당씨를 쓰는 핏줄 모두…… 온전히 남기지 않고 전부.’

대체 무슨 조화가 도운 것일까?

유화는 제 얼굴을 덮은 헝겊과 손발의 밧줄이 풀려나가는 걸 느꼈다.

점혈과 금제를 당해 내공을 일으키지 못하는데도. 묘했다.

“뭐야?”

중년인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헝겊 너머, 세 걸음이었다.

당장 몸을 일으켜서 처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능히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유화는 그러지 않았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옆에 있었다.

“사저.”

점혈을 당했음에도 유화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나왔다.

은명사태에게 대답은 없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어깨를 기대던 몸을 똑바로 눕혔다. 헝겊과 밧줄까지 풀었다.

“……밧줄 자국.”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유화는 은명사태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차가웠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런데 곡소리는 나오질 않았다. 왜일까, 목이 메서일까.

그 순간 유화의 기감이 중년인의 움직임을 잡아냈다.

“도망치지 마.”

“병신 같은 것. 네가 무서워서 피하는 줄 아느냐?”

중년인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오히려 잘되었다는 듯 후련한 목소리였다.

“본가 내에 의심하는 놈들이 있었는데, 마침 잘됐다. 네 꼴을 보면 누구도 연성의 성공을 가늠할 테니까!”

“…….”

“잠력을 터트리고도 무사한 까닭이 무엇일까? 허, 네 사문이 감춘 것이 많다고 생각하진 않았더냐?”

“조용히.”

유화가 손가락에 입을 댔다.

“시끄러워서 영면에 들지 못하시면 어떡해.”

“허, 미친 것! 미친 것! 하기야. 성품 자체가 범인과 다르니 그런 재능을 가진 거겠지!”

중년인이 크게 웃어젖혔다.

“자, 모두 저것을 붙잡아라!”

그 말에 몸을 숨기고 있던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독이 묻은 바늘을 들거나 독연을 조금씩 흘리고 있었다.

무공으로 온전히 제압이 힘드니 독으로 기절시키겠다는 뜻.

유화는 그 의도를 알고도 주먹을 쥐었다.

‘비록 몸에 힘이 하나도 없지만…… 적어도.’

저 중년인은 죽이고 가리라.

유화의 전신에 잠력이 올라왔다. 눈에는 핏발이 서서,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위태했다.

그러나 그 기운만큼은 안정적이었다.

완전무결한 호신강기.

언제든 갑주와 칼날이 될 수 있는 유연함까지 갖췄다.

중년인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얼마나 버틸지 기대가 되는구나.”

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인들이 바늘을 날렸다.

그리고…… 중년인 등 뒤의 벽이 터졌다.

콰아앙!

부옇게 일어난 먼지구름 사이로 누군가의 발끝이 보였다.

“최대한 빨리 왔는데, 인사를 나눌 분위기는 아니네.”

유화는 저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했다.

“서문…….”

“이거부터 받아.”

탁, 유화가 반사적으로 물건을 받았다.

척 보아도 환약이었다.

“호흡이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살릴 수 있어. 당장 먹여.”

“……!”

그 말에 유화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은정사태에게 환약을 먹였다.

아주 미세하지만 온기가 돌아왔다.

그녀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사람의 온기가.

유화의 얼굴에 자그마한 기쁨이 맺히자, 중년인의 등을 밟은 남자가 선포했다.

“당가를 멸하라.”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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