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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무공사전-176화 (174/250)

독마 (1)

한때 천무학관에서 서문경과 함께 수학했던 아미파의 후기지수.

검봉 유화가 이마에 맺힌 구슬땀을 닦았다.

새벽부터 참선과 수련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일출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장문제자인 은명사태(誾明師太)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화야.”

“예. 사저(師姐).”

“해도 아직 뜨지 않은 시각이란다. 혼자서 수련하고 있으면 사문의 계율에 어긋나잖니?”

“……아.”

유화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우물쭈물했다.

잠이 오질 않았다.

무림의 천하가 마교로 물드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이를 솔직하게 말하니 은명사태가 유화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우리 아화(兒花:유화를 친근하게 부르는 애칭).”

“애 아니에요.”

“말을 듣질 않으니 애지. 몸이 커졌다고 어른이 된 건 아니란다.”

“…….”

사문의 법도를 먼저 어겼으니, 떼쓰는 것밖에 더 될까.

유화는 입술을 삐쭉거리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은명사태의 손길.

따스한 온기가 머리를 둥그렇게 감쌌다. 스륵 하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제 땋아 주셔도 안 좋아할 거예요.”

“왜?”

“애가 아니잖아요. 또, 자기 전에 풀기도 귀찮고요.”

“어머, 그러니?”

은명사태가 호호 웃었다.

유화의 몸이 커지고 검술이 나이답지 않게 날카로울지언정 그녀에겐 아직도 어린 동생이자 푼수 같은 아이였다.

그 아이가 천하를 굽어보고 걱정하는 것을 보았다.

‘천하대세(天下大勢)가 이토록 어두우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겠지.’

은명사태의 내심이 어두웠다.

어린 시절부터 총기가 뛰어나 검술을 가르치긴 했지만, 평생 펼칠 일이 없길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소릴 해 봐야 의미가 없다.

생존이든, 싸움이든, 칼을 휘둘러야만 해결이 될 시기에 접어들었다.

하물며…….

은명사태가 아랫입술을 짓씹는 사이에 유화가 선수를 쳤다.

“당가에서 친교를 맺자고 했었지요. 소가주에게 저를 소개해 주고 싶다고요.”

“네가 어찌…….”

“사저가 근래 심상치 않아서 장문인께 따로 물었지요.”

유화가 방긋 웃었다.

이른 새벽이라, 주변의 풀잎에 물기가 가득했다.

“거절하기 어려워서 심려가 깊으셨겠지요?”

“……화야.”

“몸이 커졌다고 어른이 된 건 아니지만, 어른으로 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요.”

“…….”

“사문이 위태한 것이야 삼대제자의 밥상만 보아도 알 수 있잖아요.”

아미파가 아무리 불가라고 한들, 아이에게 채식을 강요할 수 없기에 열흘에 한 번씩은 꼭 자연사한 동물의 고기를 먹였었다.

살이 붙고 체구가 자라려면 반드시 필요하니까.

……그러지 못한 것이 석 달 전부터였다.

마교가 곳곳에 도사리기 시작하니 동물의 씨가 말랐다.

산꾼을 붙잡아서 책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장문인도 깊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가장 슬픈 것은 따로 있었다.

-아이들이 왜 고기를 주지 않냐고 따지질 않는구나.

한창 떼쓸 나이에 맛있는 음식이 끊겼는데도 누구 하나 손을 들지 않았다.

어려도 아는 것이다.

천하가 암운에 휩싸였다는 것을, 아미파에 시주하러 오는 발길마저 끊겨 버렸다는 것을.

그 이야기를 꺼낸 유화의 얼굴은 무심하리만큼 평온했다.

“얼굴 보러 나가는데 밥을 준대요. 당연히 나가야죠.”

“……화야.”

은명사태는 유화를 뒤에서 껴안았다.

슬픔이 얼굴을 채웠으나 드러나지 않게 애쓰면서.

“가지 않아도 돼. 너도 알잖니. 당가의 소문이 좋지 않아.”

“사저. 저도 불가의 제자예요. 허튼짓하지 않게 조심할게요.”

“당가만 명가니? 서문세가에 도움을 요청하면…… 아니, 하다못해 청성파가 있잖니.”

“그쪽도 우리랑 똑같을 걸요.”

유화라고 귀가 닫힌 게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청성파 제자가 있었다.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천하가 험하여, 긴 길을 타고 마차를 보낼 속가제자나 상단이 귀했다.

그나마도 청성파는 사천성에 있는 제자가 많아서 다행이지만, 누굴 챙길 여유까진 없었다.

그리고.

유화가 입술을 달싹였다.

“서문세가에 연락을 보내면 도와주겠지요. 하지만 우린 불가의 색을 잃게 될 거예요. 장문인께서도 그리 말씀하셨고요.”

“……그러겠지.”

유화를 껴안은 은명사태의 손이 떨렸다.

무력감, 슬픔, 자그마한 분노가 코끝을 찡하게 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마교의 준동이 불러온 것일까, 아니면 원래 세상사가 이런 걸까.

은명사태는 입술을 달싹였다.

“나도 가마.”

“예? 사저, 하지만…….”

“장문인께서 반대하셔도 어쩔 수 없어. 어여쁘고, 어리고, 애 같은 사매를 혼자 가게 둘 순 없잖니.”

그 말에 유화가 고개를 돌렸다.

껴안은 손이 자연스럽게 풀리며 은명사태의 얼굴이 어깨 너머로 보였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온화한 미소로. 안심하라는 듯이.

서문이현이 보낸 전서는 이날로부터 열흘 뒤에 도착했고, 사흘이 채 되지 않아 답장이 왔다.

* * *

쿵, 쿵!

야밤에 굳게 닫힌 서문세가의 정문을 세차게 내려치는 자가 있었다.

마침 정문 안쪽에서 교대를 마친 문지기가 험상궂은 얼굴로 고함쳤다.

“게 누구냐!”

“……파의, 은정…….”

“똑바로 답하지 못할까! 이놈!”

문지기는 철창을 매만지고는 정문을 확 밀었다.

쿵, 소리가 나며 사람 한 명이 뒤로 넘어졌다.

생기는커녕 힘이 하나도 남지 않은 초췌한 도사였다.

문지기의 얼굴에 한 줄기 안도와 의구심, 두려움이 들었다.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건 괜찮으나, 보통 이런 불청객은 칠흑과 같은 소식을 가지고 오기 마련이니까.

반쯤 기다시피 해서 일어난 인영이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아미파의 은정사태입니다, 사문으로 전서를 보낸 가주님께 급한 용무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 외침이 야밤의 서문세가를 대낮처럼 환하게 했다.

화륵, 화르륵!

장원의 수많은 등에 불이 붙는 것과 동시에 문지기가 준엄한 얼굴로 은정사태와 어깨동무했다.

“가주께서 귀파의 소식을 기다리던 차요. 객(客)의 용태가 워낙 좋지 않으니 실례를 좀 범하겠소.”

“아닙니다, 괜찮으니 어서……!”

“흠!”

문지기는 은정사태가 바라는 대로 보신경을 펼쳐 가주실 앞까지 내달렸다.

가뜩이나 초췌하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손 끝에 갈비뼈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만은 형형하여 등불보다 뜨거웠다.

“아미파의 은정사태입니다! 서문세가주께 용무가 있어서 다급히 찾아왔습니다.”

“……들여보내게.”

“예!”

문지기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주실의 문을 열었다.

은정사태는 보았다.

어두컴컴하고 좁은 방 안, 촛불 두어 개의 불빛에 의지한 채 직무에 열중하고 있는 장군을.

천하가 어둡고 밤벌레의 지저귐조차 없어도 고독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은 철인을.

서문이현이 문지기와 은정사태를 보았다.

그의 눈빛이 대해와 같았다.

“손님을 의자에 앉히고 제자리로 돌아가게.”

“예!”

문지기는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답하고는 은정사태를 조심히 옮겼다.

서문이현이 앉은 딱딱한 의자에 비해 빈객용 의자는 푹신하고 등받이까지 있었다.

환자를 앉히기 적합하다는 뜻.

은정사태는 이런 상황이 서문세가에 잦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문은 계속 싸우거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구나.’

그녀가 속으로 놀라는 사이, 서문이현의 입술이 열렸다.

“차분히, 숨부터 고르고. 머릿속에 단어가 정리되면 말하게.”

“아.”

그제야 은정사태는 뛰는 데 온 정신을 쏟느라 할 말을 정리하지 못했음을 떠올렸다.

아미파에서 성도까지.

긴 거리는 아니지만 보신경으로 질주하자면 꽤 멀었으니까.

사력을 다했기에 사흘 내에 주파할 수 있었다.

은정사태는 길게 호흡하고는 가장 중요한 용건부터 말했다.

“사천당가가 아미의 제자를 붙잡고서 내놓지 않고 있어요.”

“사사로운 일이군.”

“뭐라고요?”

“아미파와 사천당가. 무림의 일이 아닌가. 서문세가가 개입하기에 적절치 않지.”

서문이현의 목소리는 사뭇 냉정했다.

“서문이 나서면 무림 간의 일이 아니라, 더 크게 번질 것이고 아미파 또한 연루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나? 아미의 장문인이 허했나?”

“…….”

그 말에 은정사태가 잠시 하려던 말을 망설였다.

저렇게 냉정한 사람이라면, 증거 없이는 믿어 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서문이현은 그녀의 침묵을 좌시하지 않았다.

“겨우 그것 가지고 장문인이 하산을 허락하지 않았겠지. 여한을 남기지 말게.”

“……억류된 제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어요.”

“무엇이지?”

“사천당가가 마공을 통해 독마(毒魔)를 연성하려고 한다고…….”

서문이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천당가에서 아미파의 제자를 붙잡았다, 그것도 독마의 연성에 필요하다면…… 아주 특이하거나 뛰어난 체질일 터.

사람 여럿을 떼놓으니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검봉 유화인가?”

“그걸 어찌……!”

“서문의 귀는 항시 열려 있네. 더군다나 천무학관에 들어갈 만큼 태생부터 뛰어난 재지를 지녔다면 말이지.”

은정사태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깜짝 놀라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당연한 일이었다. 아미파에서 극소수밖에 모를 과거사였으니.

서문이현은 서문경조차도 모르고 있을 유화의 비밀을 논했다.

“과거에 천무(天武)를 몸에 담을 기재가 나타났다는 무림인들 사이에서 떠돌았지.”

“…….”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어. 몸이 워낙 약해서 지닌 재능을 버티질 못했지. 색목인처럼 하얀 피부도 그렇게 생긴 것이고.”

“거기까지 하시지요.”

은정사태는 정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서문이현의 말이 붙잡았다.

“도움을 구하러 온 자리 아닌가?”

“…….”

“그 비밀을 알고도 지금껏 침묵하고 누구에게 말하질 않았어. 사천성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당씨보다는 나은 이웃인 셈이지.”

“…….”

“빈손으로 돌아가 장문인께 용서를 구하는 것도 말리진 않겠지만, 독마를 연성한다는 정보를 들은 이상 서문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아미의 제자는 아미가 챙겨야지.”

조곤조곤하고 낮은 목소리.

서문이현은 깍지를 끼고서 은정사태의 기세를 짓눌렀다.

“자존심을 챙길 텐가?”

“……죄송합니다. 제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은정사태가 고개를 숙이자, 서문이현은 겸허히 용서해 주었다.

뒤이어 가주실 밖에서 대기 중인 병사에게 명했다.

“별동대… 집합.”

파스슥.

서문세가의 장원을 밝히던 등불이 일시에 꺼졌다.

누가 나오는지 알지 못하게, 모든 사람의 얼굴이 어둠에 잠기도록.

야밤에 보이는 것은 수십 명에 달하는 눈뿐이었다.

그 속에 서문세가로 이르게 복귀한 서문패와 서문경이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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