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75화 (173/250)

본심 (2)

언제부터였을까.

대략 삼 년 전부터였나.

서문패는 서문경의 얼굴을 보고서 묘한 섬뜩함을 느꼈다.

조카의 나이가 아직 열일곱.

깊은 심계를 짜내기에 어려울 나이였다.

하물며 자기가 죽을 위험을 수없이 감내하는 건 누구도 쉽지 않았다.

‘이제 보니 휘에게 소가주의 자리를 내놓은 것도…… 이 때문이었나?’

서문세가와의 연결고리를 최소한으로 만들어 무림인에게 관인으로 보이지 않을 것.

그리고 언제 연락이 끊어질지 모르니 가문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걸어 둔 것.

도대체 몇 년 전부터 시작한 심계일까?

서문패의 얼굴에 겸연쩍은 미소가 번졌다.

“사과부터 해 두마.”

“예?”

“나는 지금껏 네가…… 철없이 다니는 줄 알았다. 그 좋은 재능을 놔두고 구주를 떠도는 것이, 무림인의 삶을 동경하는 건가 했지.”

“…….”

“하지만 어쩌겠냐, 네 진의가 네 나이에 나올 것이 아닌데.”

서문패는 슬쩍 주백경을 곁눈질했다.

삼 년 전부터 서문경과 함께했던 호위무사.

그라면 자신보다 먼저 알고 있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이 마주치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서문패의 표정이 불퉁해졌다.

“호위무사란 작자가 지켜야 할 자가 그런 무리를 하는데 말리지도 않고, 하물며 나한테 보고도 하지 않았다?”

“하하…….”

주백경이 머쓱하게 웃었다.

변명하자면 할 수야 있겠지만, 서문경과의 충의를 저버리는 일 아니겠는가?

하물며 서문패에게 여러 말을 덧붙인다고 한들 용서해 줄 리가 없다.

그저 얻어맞는 수밖에.

주백경의 입술이 자그맣게 열렸다.

“물어보시지 않으셔서…….”

“뭐?”

“물으시지 않았으니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뭐 하는 놈이지.

서문패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으로 주백경을 노려보았다.

원체 눈치가 없는 놈이니 이딴 식으로 딴청을 피우려는 건가,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야, 너…….”

“삼촌. 거기까지 하시지요. 사실 저도 서운한 게 있습니다.”

“네가?”

“제 정체성은 늘 서문세가의 군관이자 군인이었고, 천무학관으로 간 이유 또한 아버지에게 말씀드린 그대로 들었을 텐데…… 철없이 다니다니요.”

서문경의 표정이 곱지 않았다.

사뭇 진심인 듯, 자신을 쳐다보는데 짙은 실망감이 가득했다.

‘어, 음. 그럴 만한가?’

여태껏 서문경이 헤친 사경(死境)이 몇 번이었나?

그걸 보니 철없는 객기 혹은 무림인에 대한 동경으로 여겼다면 진심으로 화가 날 수도 있었다.

서문패는 그답지 않게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속에 없는 말을 뱉었다.

“미안하다. 그래도, 어, 나는 네 나이가 흔히 할 수 있는 걸 예상한 거라서…….”

“어떤 놈이 철없이 마교와 싸웁니까?”

“음.”

“칠로두 중 하나를 죽이는 공로까지 철없는 겁니까?”

“……음.”

서문패의 입술에서 연신 신음만 흘러나왔다.

차라리 칼로 싸우는 게 낫지, 이런 식으로 말로 두들겨 맞으니 정신이 조금 혼미했다.

‘내가 그래도 체면이 있는데, 여기서 더 어쩌라는 거지?’

속에서 스물스물 성질이 올라오다가, 문득 서문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언뜻 조카의 얼굴에서 눈웃음이 보였다.

‘젠장, 놀리는 거였구나.’

서문패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망신이었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은 곳에서 조카에게 된통 당하니 정신이 어지러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정의맹을 만드는 것이 단순히 마교에게 대적할 세력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구나.’

일찍이 서문이현에게 물었다.

첫째 아들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아냐고, 전말을 모두 들었냐고.

이에 서문이현이 말한 바가 있었다.

-가벼이 행동할 아이가 아니야.

남들이 서문경을 천무검왕이다, 천하십대고수라고 부를지언정 서문이현에게는 아이였고 아들이었다.

그만큼 가깝고 격의 없는 사이여도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서문경이 무림과 가까이 지낸다고 한들 뜻은 서문세가와 똑같다는 것을.

서문패는 문득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졌어도 행동거지가 너무 위험천만하여 아직 애구나 싶었는데.’

기실, 누구보다 천하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지 않았나.

서문패의 시선이 정위경에게 향했다.

“정 조장. 아니, 다른 직위로 부르면 좋겠는가?”

그 말에 정위경이 한순간 기겁하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서문 장군님.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우리 가주께서 무관들에게 이미 말씀을 해 놓았겠지만, 여기에 내 이름까지 덧붙이려고 하네.”

“……!”

정위경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서문이현이 서문세가 자체라면, 서문패는 장군들 사이에서 가히 최강자라고 불리는 몸.

그의 위치는 장군에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무력만으로 상징이 된 남자였다.

[서문패가 정의맹의 설립을 원한다!]

이 소식만으로 군문(軍門) 사이에서 서문패의 큰 지지를 받을 터.

서문세가의 별동대에 임관하기 위해 얼굴을 들이밀 숫자 또한 만만치 않으리라.

정위경은 저도 모르게 뒤를 흘깃거렸다.

역시나, 황군들도 서문패의 말에 한순간 혹하는 것이 보였다.

서문세가의 별동대.

그들의 존재는 은밀한 곳에서 소문처럼 퍼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 황군이 놓친 남궁명을 완벽하게 죽임으로써 존재와 강함을 증명하지 않았나.

‘……돌아가면 군기를 새로 잡아야겠군.’

정위경은 붕대 안쪽이 쓰리는 걸 느꼈다.

그 고통만큼, 아끼는 수하가 서문세가로 흘러 들어가리란 예감 또한.

* * *

“잘 해결됐다니 다행이군.”

서문이현은 가주실에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 일, 그러니까 안휘성에 황군을 보내길 간청한 건 서문세가에 있어 출혈이 큰일이었다.

첫째로, 월권(越權)으로 오해받아 평지풍파를 일으킬 수도 있었고.

둘째는 실패의 가능성이었다.

‘만약 황군이 전멸당했다면…… 끔찍해졌겠지.’

관리의 행사엔 반드시 책임이 붙는다.

특히 마교의 준동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때에 벌어진 착오와 실패는 준엄한 칼날로 화한다.

수십, 수백 년 동안 한족을 위해 일한 서문세가도 피하지 못할 만큼 엄정할 것이다.

다행히도 서문경과 서문패는 아주 완벽하게 성공해 주었다.

칠로두를 붙잡지 못한 건 아쉬우나, 변절한 남궁세가와 왜구를 소탕한 작전은 황상께서도 크게 기뻐할 전공이었다.

‘안휘성은 성도와 가까우니…… 그곳이 마교의 교두보로 쓰였다면 전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해졌겠지.’

황실 주변에서 마교의 교의를 전파한다는 흑향.

그녀의 움직임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서문이현은 가주실의 책상에 놓인 보고서를 들었다.

-별동대 일조, 임무 보고서.

그곳에는 전공뿐만 아니라 안휘성의 전반적인 분위기, 정의맹이 설립되는 과정과 비용까지 잘 정리되어 있었다.

서문이현의 눈이 글귀를 하나하나 훑었다.

‘다행히 서문패가 쓰지 않았군.’

몸을 쓰는 일 외에는 워낙 재주가 없는 동생인지라.

서문패가 보고서를 쓰는 날에는 다시 써 오라고 시키는 일이 많았다.

정보가 정확한 게 아니라, 필치의 문제.

서문이현은 저도 모르게 서문패의 보고서를 떠올렸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마지막 장에서 시선이 멎었다.

-서문경의 대의에 대하여.

이 부분은 서문패가 급히 갈겨 쓴 듯 글씨가 자질구레했다.

하지만 그의 형은 서문이현은 피식 웃었다.

무슨 마음으로 쓴 건지 알 것 같았다.

“녀석.”

기분이 한껏 좋을 때마다 서문패는 공적 문서와 사적 문서를 망각하고는 했다.

특히 대승을 이루었을 때.

공적 문서 마지막에 여러 가지 뜻이나 글귀를 써 놓고는 했다. 대부분 자기 자신을 찬양하거나, 기름진 음식을 준비하란 소리였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형님의 아들은 범이 아니라 용이요. 그리 깊은 뜻이 있는 줄 여태껏 모르고 착각하고 있었소.

저 글귀를 시작으로 종이 한 장이 더 있었다.

서문이현은 그것을 세심히 읽었다.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세간에서는 철인으로 불리지만, 아들의 칭찬이 한껏 적힌 걸 보자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 대상이 자신이 인정하는 장수 서문패라면 더욱이.

-형님은 경이를 아이라고 보지만, 경이가 품은 것은 여의주요. 앞으로 관이 무림을 완벽하게 지배할 계책과 대의까지 말이요.

여기선 서문이현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아는 게 너무 늦었다.

정의맹을 만들겠다고 한 순간부터 알았어야지.

장수라는 놈이 서문경을 천지분간 모르는 사람으로 보았나.

서문이현은 서문패가 돌아오면 점잖게 꾸짖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곳에는 서문패의 직인이 있었다.

‘얘가?’

웬만하면 자기 직인은 절대 찍지 않는 놈이었다.

서문세가의 별동대장으로 활동하는 한, 자기 명성은 초야에 묻힐수록 빛을 발한다고 생각하는 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세상에 자기 뜻을 알려야만 하겠다는 듯, 직인이 찍힌 자리가 뚜렷했다.

-내 힘과 인망, 명성을 모두 경이에게 두고자 합니다. 형님이 막고자 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수락해 주십시오.

“설마 막겠느냐.”

서문이현은 서문패가 뭘 걱정하는지 알았다.

자기가 행한 행동이 어떻게 돌아올지, 혹여나 서문세가가 피해를 입을지 걱정하는 거겠지.

하지만 서문이현의 뜻 또한 서문패와 같았다.

단지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혹시나 휘가 들었다가 자기한테 소가주의 자격이 없다고 하면 그것도 문제니까…….’

첫째 아들이 너무 뛰어난 것도 문제인가.

서문이현은 웃음을 머금고서 보고서를 접었다.

고이 보관할 생각이었다.

언젠가, 마교의 준동이 끝나고 나면 가문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보고서였으니까.

‘앓던 이가 빠져서 그런 거야. 팔불출 같은 게 아니라.’

서문이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참으로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서문경 덕분에 정말로 큰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황실에 드리웠던 암운을 걷히고 안휘성의 남궁세가까지 잘 처리하지 않았나.

또, 왜구를 척결함으로써 민심을 잃지 않게 되었다.

‘정의맹을 발족하는 데 세금을 걷을까 노심초사하던 판에 좋은 소식을 널리 퍼트릴 수 있겠어.’

서문경이 강호에서 명성을 올리는 동안, 서문이현은 집무실에서 수많은 협잡질과 싸워야 했다.

서문세가가 성도로 터를 옮겨 사천성을 버린다는 악의 깊은 소문이나, 마교로 가면 흉년으로 곯은 배를 채워 준다는 둥.

뱀의 혀가 많았다.

특히 사천당문의 낌새가 심상치 않은 터다.

아미파의 동향이 너무나도 조용하여 슬슬 사람을 보낼까 하던 차였다.

‘그러고 보니 아미파에 경이의 동문이 있다고 했던가.’

검봉 유화.

뛰어난 재능을 지녀 천무학관에서 성과를 얻었다고 했나.

서문경의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으나, 동시에 인상이 찡그려지기도 했다.

한때 아들의 동문이었던 남궁명이 변절했었기에.

‘적어도 아미파는 아니겠지.’

서문이현은 신중함을 기하는 사내였다.

스윽, 슥.

한 통의 전서가 인편(人便)을 통해 아미파로 향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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