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심 (1)
따끔하고 무더운 바람이 서문패와 별동대의 뺨을 쓸었다.
반쯤 불탄 나뭇잎이 이리저리 비산했다.
어지러운 시야를 서문패가 꿰뚫었다.
스윽.
재와 불길 속에서 반쯤 찢기다 만 옷감을 주웠다.
강한 열기에 바스러진 살갗이 달라붙어 있었다.
서문패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놈이 몸을 뺐다. 샅샅이 수색하라.”
“…….”
별동대는 말없이 기척을 죽였다. 발소리는 없었다.
지휘자가 조율한 길을 따라서 조가 나뉘고 인원이 쪼개졌다. 그들의 눈은 강한 열기 안에서도 빛을 발했다.
흰 장갑을 낀 조원이 발자국을 찾아내고, 발 빠른 조원이 이인일조로 움직여 탐색한다.
누구도 주저하지 않고 움직였다.
소성(小成)이 나올 때마다 조장과 서문패에게 각각 보고되어 그물망을 짰다.
소림의 백팔나한진이 천라지망으로 불리던가?
서문패는 그들보다 별동대가 뛰어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불법(佛法)이나 닦는 중놈들이 어찌 은닉과 수색을 알겠나.’
겨우 머릿수로, 한정된 지형에서나 우위를 점한다면 천라지망이라고 할 수 없다.
피잉!
손가락 세 마디만 한 나뭇조각이 날아왔다.
견(見). 불급(不急).
보았으나 급하지 않다.
남궁명의 용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뜻.
그러나 서문패는 자만하지 않았다.
빠르게 신법을 펼쳐서 남궁명을 쫓았다.
“허억, 헉…….”
처참한 낯이었다.
숯처럼 시꺼멓게 불탄 면이 있는가 하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헐어 버린 살이 있었다.
폐부까지 열기가 닿은 것인지 숨을 쉴 때마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꺽꺽거렸다.
목숨은 건졌으되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남궁명의 모습을 본 서문패가 입술을 달싹였다.
“후회는 안 하더냐?”
“하늘을 바꾸는 대업에 이만한 각오도 하지 않았을 성싶으냐?”
“대업? 허, 과거에 경이에게 들었던 것과는 다르군.”
“……그게 무슨 말이냐.”
어차피 죽을 텐데, 부질없는 마음일 텐데.
남궁명의 속에서 어둡고 끈적끈적한 열등감이 꿈틀거렸다.
“그딴 놈이 무슨 말을 지껄였든 상관없다.”
“자기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거라고 했지. 어딘가 엇나갈 수도 있지만, 본성은 곧으니…… 자기가 헛짓거릴 하면 한 번은 붙잡아 줄 거라고.”
서문패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고했다.
사실, 이마저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적과 대화는커녕 인질로도 잡지 않아 이민족의 증오를 사고 있었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서문패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눈앞에 있는 건 서문경의 친우가 아니라, 마공을 수련하다 최소한의 도의까지 저버린 마인이었다.
더 이상 시간이 아까워서, 마침내 검을 든 순간.
“그랬나.”
남궁명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끝까지 날…… 그런 식으로 보았단 거지.”
청마가 처음 찾아왔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결국 무공을 수련한다고 한들, 서문경과 평생 비교당할 처지일 거라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변절했다.
서문경과 친교를 다지라는 아버지의 뜻까지 꺾어 가며 강행했다.
눈앞의 장군은, 후회하라고 말했지만, 도리어 뜻이 똑바로 섰다.
“저주를 내릴 것이다.”
남궁명은 핏발이 선 눈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서문패, 서문경. 그 외의 서문세가를 향해서 저주를 퍼부을 작정이었다.
그러고 싶었건만.
“괜한 말을 섞었군.”
서문패의 오른팔이 움직였다.
칼날이 뜨거운 바람을 베고 지나갔다.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베였다.
호신강기를 두른 남궁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걱!
남궁명의 몸이 그대로 스르르 무너졌다.
서문패는 그것을 착잡한 눈으로 내려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가장 아끼는 조카, 서문경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놈이야 별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그래도 한때 친구가 아니었나.’
서문패의 한숨이 깊었다.
* * *
“잘하셨습니다.”
서문경은 서문패의 심란함을 덜어 주기 위해 애써 웃었다가, 웃는 게 이상한가 싶어서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그 대신에 다른 화제로 돌렸다.
주위에 있는 황군까지 들리도록.
“청마와 흑향은 어떻게 됐습니까? 특히 흑향은, 다시 황실로 돌아가서 황상의 눈을 어지럽힐 겁니다.”
“……?”
서문패가 순간 이게 미쳤나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 일로 인해 큰 전공을 세웠다고는 하나, 서문패는 대명의 일원이자 군인일 뿐.
황상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불충이었다.
하지만 정위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잘됐다는 듯 속 시원하게 말했다.
“그년은 이번 일로 황실에 발도 못 붙이도록 손을 쓸 겁니다. 그러기 위한 출정이기도 했고요.”
“……허. 황상의 눈이 개인 겁니까?”
“서문경 공자와 서문패 장군께선 모르셨겠지만, 불과 며칠 전에 마교와 밀약을 맺은 고관들을 동시에 쳤습니다. 시의(時宜)가 적절하지 않아 가문까지 불태우진 못했으나 꼼짝도 못하고 굶어죽을 겁니다.”
아사(餓死).
정위경은 끔찍한 형벌을 입에 담았다.
“궁궐 같은 집에서, 아무런 음식을 입에 담지도 못하고 물로 배를 채우다가 죽는 건 본보기가 되겠지요.”
“그것 참 좋은 일이요.”
본보기의 중요함이야 서문패도 잘 알았다.
상대가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긴 시간을 들여서 처참하게 죽이는 건 아랫것에게 큰 경고가 된다.
서문패는 한순간 서문경의 눈치를 살폈다.
“……남궁세가 또한 그에 준하는 벌을 주어야겠지요.”
“…….”
서문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정의맹의 큰 동맹이 될 줄 알았던 남궁세가의 변절이 뼈아프지만, 그렇다고 안일하게 일을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정위경의 말대로, 철저하게 발본색원하여 벌을 주는 것이 천하에 큰 파장을 일으킬 테니까.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래도 마교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백야흔을 죽였다고 한들, 칠로두 중 하나.
남궁세가 또한 마교의 말석에도 들지 못했다.
그들이 숨긴 힘과 세력은 강호 전역에 깔려 있을 터였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중 더 있을지도 모르기에.
서문경의 목소리는 더욱 신중해졌다.
전생의 아픈 기억과 숱한 배신이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렸다.
“지금이야 연승을 거두어도…… 정녕 이기고자 했다면 칠로두가 나섰을 겁니다. 청마와 흑향이 자리를 떠난 것도 다른 전장이 있어서겠지요.”
“……말하지 않았나. 흑향은 이제 황실에 말도 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가능하시겠습니까?”
서문경은 정위경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 또한, 자신 만큼 흑향의 능력을 안다면 저리 확실하게 말하지 못할 것이기에.
한참 동안 버티던 정위경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궁의 신분으로 위장해서 올 수도 있겠지. 어쩌면 문관이 아니라 무관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크네.”
“서문세가 말입니까?”
“상대적으로 본가의 방비가 허술한 명가를 예상하고 있네.”
그 말에 서문경과 서문패가 동시에 한 가문을 떠올렸다.
홍가.
지금이야 혼약이 깨졌지만, 홍가는 서문세가와 함께 대명의 방위를 책임지는 기둥 중 하나였다.
‘홍가야 항상 본가보단 기지에 주둔하는 걸 선호하니…….’
‘마교의 침입이 쉬운 환경이지.’
한순간 뜻이 통했다.
서문경은 정위경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홍가에 사람을 붙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거야 서문세가의 가주께서 이미 해 두셨네.”
“오, 역시……!”
“정기적인 연락이 조금 지체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네만, 서문가주께서 기다려 달라고 하셨으니 기다려 보게.”
그 말에 서문패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건 난리구만. 마교 놈들 때문에 제대로 돌아가는 꼴이 없어.”
평범한 민초조차 마교의 준동에 벌벌 떠는 실상이고, 대명의 심장과 가까운 안휘성조차 큰 위험에 직면했다.
강호 전역에 귀가 열린 서문패에겐 어떻겠는가?
매일 아침 마다 보고하는 서류가 책상에 쌓였다.
어디를 가서,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판단해야 하는 그에게 있어 늘 골치였다.
외세와 마교, 그리고 혼란을 틈 타는 흑도들.
서문패는 불만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덩치가 큰 사파야 몸을 사린다지만, 흑도 놈들은 자기들이야 세력도 작으니 도박하는 심정으로 마을을 약탈하고 다니니, 거 참.”
“정의맹이 제대로 수립이 된다면……”
서문경의 말에 서문패가 눈을 부릅떴다.
“이봐, 조카.”
“예.”
“정의맹 주위의 우방조차 마교에게 이 지랄이 났는데…… 다른 곳이라고 괜찮을까? 네가 말한 대로 각 성마다, 주둔지를 세워서 방비한다는 건 탁상의 좋은 공예품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나?”
항상 서문경을 지지하고 아끼는 서문패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정의맹의 결성과 주둔지 설립.
이 문제는 수많은 인력과 시간을 소요시킨다.
자칫 정보가 새면 수많은 관군이 몰살당하거나 분열이 일어나고도 남을 일.
서문패의 걱정에 서문경은 쾌활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서 무림을 끌어들인 겁니다.”
“……?”
“왜 관만 피해를 본다고 여기십니까? 하하.”
그 말에 서문패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한 가지 착각하고 있었다.
천무학관에 가서, 친교를 다지고, 무공을 배웠다기에…… 서문경이 무림에 가까워진 줄 알았다.
관이 주축이 되어서 정의맹을 설립한다는 점에서 특히, 무림인의 소모를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서문경은 아버지, 서문이현에게 말한 그대로를 서문패와 정위경에게 고했다.
“주둔지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혹은 사파와 명가로 정할 것입니다.”
저 말에 담긴 뜻이 새롭게 들렸다.
서문패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감시인가?”
“지금까지 저와 주 무사가 피를 흘리고 구주를 떠돌며 명성을 쌓은 이유는…… 이를 구축하기 위한 최소한의 발판이었습니다.”
무림은 약한 자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또한, 협의를 지닌 고수에게 존경을 표하기 마련.
낯선 관인이 고하는 뜻을 따를 리가 없으니, 차차…… 시간이 필요했다.
강호의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업적이 신용이 되길 바랐다.
서문경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교가 끝난 이후에, 강호는 대명에게 묶여서 다닐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불복한다면 어쩔 것이냐?”
“오걸 전부가 그리 말한다면 감히 그리 말할 수 없겠지요.”
서문경이 천무학관으로 가서, 많은 고수와 친교를 쌓고 신뢰를 준 이유.
그건 전생의 후회도 있었지만 관인으로서, 그리고 군관으로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기도 했다.
서문경은 뼛속까지 대명의 군관이자 서문세가의 일원이었다.
“가장 먼저 마교부터. 그 후는 천천히 논하시지요.”
“……허.”
서문패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