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71화 (169/250)

등장 (5)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잖아.”

정광(正光)이 비치는 눈.

빈손으로 왔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는 자신감.

서문경의 얼굴을 본 흑향은 샐쭉하게 웃었다.

“우리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외부인은 비켜 주시겠어요?”

“외부인은 너지.”

혀를 가볍게 찬 서문경이 땅에서 나무막대를 주웠다.

물을 잔뜩 머금은 나무막대.

무림인이라면 한손으로 부러뜨릴 정도로 연약했다. 무기로 쓰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문경은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흑향에게 겨눴다.

“당장 척안룡한테서 떨어져. 대가리를 깨 버리기 전에.”

“당신이 누군데요?”

“서문경.”

“아하. 백야흔을 죽였다는 그분.”

흑향의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가소롭고 귀여운 동물을 보는 시선이었다.

“그때는 두 오걸과 함께하시지 않았나요?”

“그랬지.”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향의 말이 맞았다. 혼자서였다면 백야흔을 쓰러트리기는커녕, 화산과 함께 사라졌을 터였다.

게다가 그녀는 백야흔과 다른 방향으로 완성된 마인.

서문경 혼자서는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불과 한두 시진 전까지는 그랬겠지.’

서문경은 막대를 꽉 쥐었다. 낡은 창을 들고서 껄껄 웃어대던 창왕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래, 겨우 한두 시진.

그 짧은 시간 동안 서문창법의 모든 것을 이어받았다.

끝내 이기고서 돌아왔다.

이제는 증명해야 할 때다.

서문경의 오른발이 들렸다.

아무런 예고 없이 흑향을 향해서 흑향을 향해 달려들었다.

“겨우 그딴 막대로……!”

따악!

흑향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막대가 이마를 때려, 새빨간 자국이 선명했다.

그녀의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눈이 저절로 크게 떠졌다.

‘호신강기가 따라가질 못했어?’

전신에 퍼뜨린 강기막.

한 점 한 점마다 완벽한 강도는 아니다. 본능에 가까운 속도로 재빠르게 공격을 막아 내고 반탄하는 데 있었다.

담정의 겁뢰를 막아 냈을 때처럼.

하지만 서문경의 공격은 겁뢰처럼 복잡하거나 뛰어난 무학이 담기지 않았다.

의표를 찔렸다.

단순하기까지 한 그 의미가.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발로 걷어차였다.

담정의 어깻죽지에서 양팔이 빠졌다.

“뭐, 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무막대가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말을 잇기도 전에 시야를 반쯤 가리고서 날아오는 연격이 있었다.

흑향은 뒤쪽에 둔 왼발을 미끄러뜨리면서 중심을 잡았다. 그러고는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서문경의 막대를 쳐내기 위해서였지만.

터엉!

막대를 쳐내는 감촉에서 힘이 없었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막대를 비집고 새로운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끈 뭉치였다.

군병(軍兵)이 흔히 사용하는 장창 끄트머리에 달린 끈 뭉치.

그것이 반원으로 회전하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오로지 직선과 사선으로 움직이는 강직함에 환(幻)을 더했다.

그 뒤에 서문경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감정도 담기지 않은, 차갑고 서늘한 얼굴.

온전한 살의가 흑향에게 내리꽂혔다. 끈 뭉치 사이에 숨겨져 있던 창날이 흑향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심장에는 닿지 못했다.

“으윽…….”

흑향은 신음을 흘린 채 제자리에서 쓰러졌다.

눈을 슬며시 감고 있자니, 서문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재생하잖아. 죽은 척하지 마.”

“아, 어떻게 알고 있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눈을 떴다.

흑향은 서문경의 손아귀에서 장창이 회전하는 걸 보았다.

부족한 힘과 속도를 보충하기 위해 창의 움직임에 몸의 회전까지 집어넣는다.

파앙!

창과 함께 회전한 서문경이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것으로 모자라 발길질로 창날 반대편을 후려쳤다.

완전히 심장을 관통할 작정이다.

흑향의 웃음이 얼굴에서 지워졌다.

이놈은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다. 그 자체가 위협이었다.

“……어떻게 아는지는 몰라도.”

흑향은 발을 뒤로 끌어 거리를 벌렸다.

창을 내지르는 속도와 도망치는 속도. 누가 빠른지야 자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마공을 믿고서 자만하지 않았다.

“내가 알지 못할 때 노렸어야지.”

예리한 살의가 서문경을 향해 쏘아졌다.

자색의 강기가 수십 개로 분열했다. 주변이 순식간에 밤이 된 것처럼 시꺼메졌다.

서문경은 가볍게 호흡을 삼켰다.

한 번 뻗었던 창이 세차게 흔들렸다.

공진(共振).

창왕의 기예를 베껴 내어 펼쳤다. 수백 개의 강기가 부르르 떨리다가 뒤로 퉁겨져 나갔다.

흑향의 귀에서 피가 흘렀다.

“무슨 마공을…….”

“마공이 아니야. 무공이지.”

수백. 아니, 천 번에 가까운 죽음을 겪으며 배운 창법.

창대에 굽혀져 있던 서문경의 새끼손가락이 펴진다.

창의 궤도가 기이하게 휘어졌다.

직선에서 사선으로.

순식간에 창날이 흑향의 가슴팍에서 목으로 쏘아졌다. 창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이는 듯했다.

스걱!

쇄골과 목덜미를 동시에 베었다. 하지만 서문경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머리와 심장.

둘 중 하나를 완전히 베지 않으면 흑향은 죽지 않을 테니까.

서문경의 호흡이 멈췄다.

편법으로 이기는 순간까지도 파훼하지 못한 창왕의 절기를 펼치기 위해서였다.

칠사참(七死斬).

하나의 창이 쏘아졌다. 창에서 분열한 잔영은 겹겹이 겹치고 크게 부풀었다.

공기가 갈라지다 못해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겁뢰인가?’

서문경의 등 뒤에서 몸을 다스리고 있던 담정이 저도 모르게 자신의 무공을 떠올렸다.

얼핏 보면 만뢰백우형과 밀운경천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형상이 비슷할 뿐, 그 안에 담긴 무게는 달랐다.

‘동시에, 일곱 번.’

만뢰백우형이 파도라면 저 창은 일곱 번의 번개다. 살초가 겹겹이 겹쳐서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 초식을 향해 흑향은, 정면 돌파를 택했다.

허도(虛道).

사라진다. 허도는 그런 마공이었다.

거대한 힘을 상대로 자색의 강기를 쏘아서 구멍을 만들고, 흐름을 무너뜨렸다.

칠사참은 그렇게 사라진다.

일곱 번의 살초가 허물어져도 서문경의 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다음 초식을 펼치기 위해 손아귀의 창을 굴렸다.

쉬리릭!

진왕마기에 이어지는 봉점추.

무연창의 절기가 동시에 이연격으로 이어진다.

자색의 강기가 무수히 잘려나가고 허물어졌다.

서문경의 기량이 흑향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너, 뭐야?”

흑향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물었다.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어떻게?”

저 나이에 오걸이나 할 법한 기예를 펼치고, 자신의 마공에 완벽하게 대응하고 있다.

상식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감탄스럽지만 몹시 불쾌하단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죽이는 편이 나아. 아…… 이래서 백야흔이 죽었으려나?’

백야흔의 능력에 오걸 둘과 서문경을 무시하고 도망치자면 능히 그럴 수 있었다.

워낙 단단하고 강력한 몸을 가진 마인이었으니.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화산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다. 청마도 그 사실을 듣고서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향은 이제야 진실을 알았다는 것처럼 웃었다.

“너, 하늘이 내린 놈이니?”

“……?”

“천인(天人)이야?”

“뭔 말 같잖은 소리를…….”

서문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뭐, 워낙 오래 살아온 칠로두니까.

진실로 천인을 보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또한 신묘한 기물이었으니, 천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무공을 보고 마공이라 하지 않나, 천인이냐고 묻는 건…… 자신의 노력을 부정하는 짓 아닌가.

서문경의 입술이 씰룩여졌다.

“끝까지 싸워. 죽을 때까지.”

자신감이 내심 있었다.

창왕이 말하기를, 자기한테 배우면 칠로두 중 다섯에게 이긴다고 했으니까.

흑향이 괴물이긴 해도 칠로두에선 중간에 불과했다. 그녀를 이기지 못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읏.”

흑향도 서문경의 얼굴을 보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괜한 허세가 아니라, 끝까지 싸워서 이길 능력이 있음을 내심 깨달았다.

어쩌면 오걸 이상일지도.

그 상상이 주저함을 불렀다.

서문경은 창을 앞으로 쏘아 냈다.

쐐액!

흑향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다가오는 창의 모습을 보려 했으나, 서문경이 출수한 창은 조금 앞으로 나아갔다가 가슴팍에 박히는 것으로 끝났다.

“흐읍.”

서문경은 아까 하지 못한 것을 마무리하겠다는 듯 장창을 발로 걷어차 깊이 쑤셨다.

팍 터진 피가 강물과 뒤섞였다.

사람이면 치명상이나 흑향에겐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창날을 손으로 붙잡고서 천천히 밀었다.

스륵, 스르륵.

어느새 흑향의 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자색의 강기, 흑환마공(黑換魔功)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빠득, 소리가 나며 창날이 부서졌다.

‘이제 창은 못 써먹겠네.’

서문경은 숨을 끌어 올리고서 옆구리의 칼을 붙잡았다.

여기서 흑향을 베리라.

그런 의지를 실어서 검강을 유형화하고 무공사전을 붙잡았다.

번천광검결부터 시작하여 여러 무공을 배우고 단련한 시간들.

그 시간 또한 값졌다. 창왕과의 싸움보다 귀한 나날이었다.

‘오걸 없이, 나 혼자서.’

과연 칠로두를 쓰러뜨릴 수 있을까?

서문경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런 생각조차 전생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연히 마주한 무공사전과 회귀가 준 기회.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과 함께 흑향에게 검을 휘두르려는 그때.

“거기까지만 할까.”

한 남자가 나무에서 갓 내려온 듯 옷깃에 매달린 나뭇잎을 털었다.

그리고 왼눈 아래의 점.

서문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청마?”

“잘 기억하는군. 모르면 섭섭할 뻔했어.”

정말로 최악의 상황에 나타나지 않았나.

칠로두 둘의 합공은 애초에 상정하지 않았거늘.

서문경은 청마에게 말했다.

“끼어들 테냐?”

“흠, 그럴까?”

청마는 엷게 웃었다. 서문경이 당황하거나 약한 꼴을 보이길 기대하면서도 혐오할 것 같아서, 감정이 복잡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까지 줄곧 지켜보다가 끼어든 까닭은 단 하나.

“흑향.”

“……왜?”

“지금 당장 이곳에서 떠나라.”

그 말에 흑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보나마나 그놈의 이야기니 뭐니 하면서 서문경의 행적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청마가 불쾌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서 말했다.

“나라고 서문경을 안 죽이고 싶은 게 아니야. 완전히 빈틈을 노리면 처리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대체 왜? 왜 떠나라고 하는 거야?”

흑향으로선 미칠 노릇이었다.

담정이라는 사냥감도 놓치고 서문경을 죽이지도 못하고 떠나게 되는 꼴이니.

때문에 목소리가 더 격정적으로 변했다.

“여기서 서문경을 죽이자. 대의가 코앞이잖아?”

“그 대의를 지키기 위해서 떠나라는 거다.”

“정확하게 말해.”

“……흠.”

청마가 서문경의 얼굴을 흘쩍 곁눈질했다.

정말로 운이 좋은 놈이었다.

완전히 벼랑 끝까지 몰려서, 이곳을 무덤으로 만들 작정이었건만.

“황군이 오고 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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