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4)
“나를 기만하는 거냐?”
격정(激情)이 너무 크면 도리어 짓눌러지는 걸까?
담정은 자신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진 것을 느꼈다.
놀라웠다.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이렇게 차분해질 수 있다니.
담정의 손아귀에 힘이 더해졌다.
“끄윽, 흑…… 놔주세요.”
흑향의 입가에서 구슬픈 목소리가 나왔지만, 담정은 힘을 꽉 주었다.
이 정도로 흑향이 죽진 않을 것이다.
수백 년을 살아온 괴물이 겨우 이깟 것에 죽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도 기만하고 있다는 거겠지.
담정의 속에서 차가운 불이 치솟았다.
“……왜.”
“오라버니…….”
“왜, 이딴 짓을 즐기는 거냐?”
“놔 줘요. 흑흑…….”
흑향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새파래졌다. 평범한 사람처럼, 목을 조르면 죽는 인간 같았다.
담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쓰레기 년.”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 안에 잔잔한 바다가 들끓고 있었다.
흑향의 등장이 갑작스러워서.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너무 길어서.
점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망대해를 떠돌던 분노가 표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죽어라.”
진즉에 이래야 했을 것을.
담정은 과거에 하지 못한 후회를 마음껏 풀었다.
스걱!
품속에서 기병을 꺼내 휘둘렀다.
목과 가슴. 사람의 형상을 한 이상 베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어머.”
흑향이 배시시 웃었다.
언제 목이 졸렸냐는 듯.
순식간에 담정의 하복부를 발로 찼지만, 닿지 않는다.
쩌억!
담정의 기병이 흑향의 발등을 꿰뚫었다.
신묘한 움직임이었다.
목과 가슴을 노리던 창날이 순식간에 아래로 휘어졌으니.
수십 년, 혹은 뼈를 깎는 십수 년의 기예.
흑향의 얼굴에 웃음이 짙어졌다.
한 떨기 국화처럼 연약하던 남자였다.
귀한 집안에서 책을 보다가 눈이 나빠졌다며 수줍게 웃던 얼굴이 여전히 선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상이, 험해졌네.’
바닥에 내리꽂히면서도 담정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참으로 사연 많은 얼굴이었다.
뺨과 턱에 가득한 상처와 왼눈의 안대, 꽁지머리.
‘예전엔 학모(學帽)가 어울렸는데, 이런 식으로 될 수도 있구나.’
흑향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
이런 식으로 두 번째의 만남을 가진 인연은 처음이었다. 대부분 황야에서 죽거나 거지가 되어 저주를 퍼붓곤 했으니까.
“하, 하하. 이럴 거면 더 있어 볼 걸 그랬어.”
집안을 잃고 맨손으로 수로채의 대장이 될 재목이라면,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할걸.
후회는 언제나 뒤늦다.
흑향은 자신의 발이 대지에 꿰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드니, 그의 증오 가득한 눈동자가 보였다.
하나여서 더 귀했다.
“일찍 죽이지 못한 게, 너무 후회 돼.”
담정은 지체하지 않고 오른 팔뚝을 휘둘렀다.
쩍, 하고 흑향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상처는 없었다. 처음이야 당해 줬지, 이제는 봐주지 않겠다는 듯 샐쭉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아주 먼 과거처럼.
‘X발년.’
참으로 악취미였다.
담정의 얼굴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손목의 기혈을 타고 뇌전이 번뜩였다.
만뢰백우형(萬雷白雨形).
파직!
전류가 튀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만 한 단창을 쏘아 냈다.
통짜 쇳덩이. 소매에 늘 휴대하고 다니는 기병(奇兵).
지근거리에서 시퍼런 광채가 번뜩였다. 피할 수 없다.
적어도 담정이 기억하는 한, 누구도 피하지 못한 필살의 한수였다.
바로 그것을.
“……뜨거라.”
흑향이 맨손으로 잡아냈다.
손바닥에 화상이 생기긴 했지만, 살짝 데인 정도에 불과했다.
그제야 담정은 이변을 깨달았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응?”
“아무리 이른 아침이어도…… 이런 소란이 생기면 일어날 수밖에 없어. 뭘 한 거냐?”
“에이.”
흑향이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옛날에 불을 어찌 질렀겠어요? 다 재우고 했지.”
“……?”
“모르셨어요? 그때도, 지금처럼. 오라버니를 제외하고 전부 재웠는데요.”
그 말에 담정은 외눈으로 과거를 보았다.
온 건물에 불이 옮겨붙어 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누구도 빠져나오질 못했다.
자연히 흑향이 모두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담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거짓말하지 마라.”
“좋은 꿈을 꾸다 가셨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비명 하나 없이 전부 죽었으니까, 응. 정이 있으니까. 고통 없이 보내 준 거예요.”
이 정도면 효녀 아니냐며.
흑향은 엷게 웃었다. 가증스럽고 비열한 살인자의 미소였다.
담정의 시야가 바닷물에 들어간 듯 뭉그러지고 흐려졌다.
“……!”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행동부터였다.
머릿속에서 흑향의 위치가 고정돼 있을 때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계산과, 겉잡을 수 없는 분노가 메아리쳤다.
담정의 양손이 빠르게 교차한 순간.
두 주먹이 마주한 채 앞으로 내질러졌다.
뿌드득, 반사적으로 모은 흑향의 두 팔이 부러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파지직!
밀운경천(密雲擎天)의 우레.
마주했던 두 주먹이 떼어지며 시퍼런 빛이 번쩍였다.
흑향은 가슴팍을 노리는 예리한 살의를 느꼈다.
그녀는 급히 허리를 뒤로 튕기며 상체를 통째로 기울였다. 발등이 세로로 찢어졌다.
그러나 저 뇌전과 우레에 얻어맞는 것보다 낫다.
“강해졌구나.”
“어느 잡년 때문에.”
“입이 험해진 건 안타깝군.”
흑향이 입술을 핥았다. 긴장되긴 했지만 메마르진 않았다.
송곳니는 날카로워도 송곳니인 법.
닿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담정은 알지 못했다.
그 불균형은 주저함을 부르기 마련이다.
필시 그래야 할 텐데.
“……!”
밀운경천이 불러왔던 광채 속에서 날카롭고 확실한 살기가 쏘아졌다.
수는 다섯에서 여섯.
숫자를 셈하기가 무섭게 담정이 고함을 내질렀다.
쐐액!
회전을 머금은 기병이 번쩍하고 쏘아졌다.
뇌전은 회전을 따라서 부풀었다.
초절정고수이자 천하십대고수의 겁뢰(劫雷).
상승의 무학과 공력이 불러온 진동이 사방으로 퍼진다.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파동이 흑향을 갈가리 찢기 위해 나아간다.
“……하아.”
그 속에서 흑향은 한숨을 내쉬었다.
푸대접을 받을 만하지만 그래도 수십 년 만의 재회에 발이 찢어질 줄은 몰랐다.
기분이 나빴다.
“이야기도 여기까지란 거네.”
흑향이 길게 호흡을 뱉고, 다시 삼켰다.
그녀의 전신을 감싼 자색의 강기가 흉악한 살의를 풍기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짜증.
그녀에겐 겨우 그 정도에 불과했지만, 담정에겐 아득한 살의와 흉폭함이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지 않으면 몸이 떨릴 것 같았다.
세월, 수백 년에 달하는 시간.
그 간격이 몸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부족함을 메워도 흑향의 강함은 애초부터 담정보다 먼 곳에 있었다.
저벅, 저벅.
흑향은 담정의 겁뢰를 향해서 걸어갔다. 수백, 수천에 달하는 뇌전이 그녀를 두들겼지만 자색의 강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병 또한 강기를 뚫지 못하고 떨어졌다.
“이게 다야?”
“……X발.”
담정이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이딴 식으로 끝날 게 아니었다.
“너 같은 년이 여섯이나 있다니, 세상이 정말 망하려나 보구나.”
“어머. 우리가 뭐 어때서?”
“무슨 짓을 해댈지야 뻔하지. 대명이 깨끗하기만 한 건 아니라지만, 적어도 너 같은 년이 있는 것보단 나아.”
“하하. 맞아. 난 통치하는 데 관심이 없거든. 즐기는데 있지.”
흑향은 아까처럼 배시시 웃었다.
아주 먼 과거, 담정의 왼눈을 앗아 갔을 때처럼.
허나 이제는 봐줄 때가 아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자색의 강기가 깎여졌음을 느꼈다.
‘너무 아쉽고, 소중한 인연이고, 존재지만.’
사람은 갑자기 성장하곤 한다.
국화 같은 소년이 이런 고수로 성장하거나, 백야흔을 죽였다는 서문경처럼 어린 나이에 급격히 두각을 나타내는 천재가 있기 마련.
담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천재였다. 맨손, 맨바닥에서 천하십대고수가 되었다는 건 그만한 재능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잘 가, 나의 오라버니.”
흑향은 담정에게 가깝게 다가갔다. 당연하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수십 초식을 단숨에 쏟아 내며 공력을 소진했다.
그 와중에 흑향의 피부에 생채기가 났다.
그가 오걸의 수준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음에, 아쉬움과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아. 이런 게 기쁜 거였지.’
개화하기 전 꽃봉오리를 짓이기고 잘나가는 집안의 대들보를 무너뜨려 비극을 만든다.
너무 즐거운 일이었다.
청마는 이를 증오했지만, 흑향에게는 삶의 낙이자 세월을 보내는 이유였다.
흑향은 담정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갔다.
삼백하고도 이십삼 초.
공력을 완전히 소진한 담정의 얼굴은 새하얬다.
얼굴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과거의 인상으로 되돌아온 것 같아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야 옛날 오라버니 같네.”
“…….”
“대답도 안 하고 어떻게든 기력을 회복하겠다는 거야? 서운하네. 정말로 즐거운 재회였는데.”
“…….”
“그래. 마지막으로 안아줄까?”
“……꺼져.”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흑향은 즐거운 마음으로 담정을 억지로 껴안았다.
어떻게든 떨쳐 내려고 하는 발버둥이 품 안에서 느껴졌다.
그래, 마지막.
마지막으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로 고마워…… 내 세월에서 각인될 즐거움이 되어 줘서.”
“…….”
담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로지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번뇌가 가득했다.
겨우 이러려고.
저딴 년의 유희거리가 되려고 절박하게 살았단 말인가?
이래서는 안 된다. 절대로.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담정의 선천진기가 들끓었다.
전신의 잠력을 격발시켜서 상처라도 남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흑향이 허락하지 않았다.
“추하게 죽게 할 생각은 없어. 오래오래 옆에 두고 싶거든.”
푸욱.
흑향의 양손이 담정의 어깨뼈를 관통했다.
순식간에 기혈을 제압하고는 선천진기가 들끓는 걸 막았다.
“자, 이대로 죽자. 조용하게…….”
“……X발.”
“아껴 줄게.”
담정의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소진한 심력과 피가 너무 많았다.
이대로라면 일각도 버티지 못할 텐데.
‘젠장할, 이대로라면…… 다 죽을…….’
담정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꺾이려는 그때.
“뭐 하는 짓거리들이야?”
심상에서 깨어난 서문경이 나타났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