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69화 (167/250)

등장 (3)

첫 일격.

창왕은 겨우 세 번째 싸움임을 떠올렸다.

말도 안 되는 성장이었다. 천마와 마지막까지 자웅을 겨루던 자신에게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 기꺼우면서도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자신의 기예가 겨우 이 정도였던가?

창왕이 고개를 털었다. 잡념을 버리고서 창을 쥔 손에 공력을 우직하게 쏟아부었다.

쩌정!

귀청을 찢을 듯한 소음이 심상을 가득 채웠다. 그의 걸음 소리가 파묻힐 정도였다.

서문경은 반사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진왕마기(秦王磨旗).

가까워지는 호흡을 향해 전진하고 찔러 올려쳤다. 서문의 창과 낡은 창이 공간을 헤집고 파고들었다.

창의 부딪침은 검과는 달랐다.

둔탁한 충격이 두 남자를 강타했다.

“……큭.”

“흠.”

서문경이 난색을 보이는 사이에 창왕은 양팔을 유연하게 비틀었다.

그의 창이 찰나에 공간을 점했다. 이 순간에 창왕이 휘두르는 것은 창이라고 할 수 없었다.

슥하고 운무 사이에 사람 그림자가 뒤섞였다.

운룡대팔식이 허공을 뛰어넘었다.

카가가각!

창왕이 창을 휘두르는 궤적.

창날을 따라서 구름이 찢겼다. 조금 전까지 서문경이 서 있던 공간이 텅 비어 있었다.

그 순간에 서문경은 창왕의 뒤에 있었다.

“……하!”

매섭게 찌르는 창끝을 느낀 창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낡은 창을 크게 휘둘렀다.

구름이 한데 모여 반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어마어마한 힘이 서문경의 가슴을 노렸다.

호신강기로 막아 낼 수 없다. 서문경은 창을 고쳐 잡아 짧게 쳐 내듯 휘둘렀다.

까가가각!

흘리는 것만으로 창대가 깎여 나갔다. 서문경은 자세를 낮추었다. 가벼운 창질에 고수를 죽이고도 남을 위력이었다.

저렇게 몸을 뒤틀고도, 힘 한 점의 낭비 없이 휘두르는 기예 또한.

‘괴물이야.’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서문경이 걷지 않은 또 다른 가능성.

그 끝에 도달한 자, 창왕과 싸우는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미친놈 같겠지만, 기꺼웠다.

서문경의 얼굴을 본 창왕이 껄껄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는 거냐?”

“남 이사.”

두 개의 창이 서로의 사혈을 겨냥했다. 격발의 순간은 보이지 않았다.

끔찍한 폭력이 일점(一點)에서 마주쳤을 뿐이다.

쿠르르릉!

충돌이 운무를 터트렸다. 서문경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창왕의 기교가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사실만이 손목을 시큰거리게 했다.

‘과연, 부족해.’

서문경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창왕에게 창으로 싸워서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창왕이 한 말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무예십팔반의 완성을 논한다는 자가 이래서야 되느냐고.

“……쳇.”

서문경이 혀를 가볍게 찼다. 저놈 몰래 무공사전을 활용하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눈을 새롭게 뜨고서 창왕의 전신을 살폈다. 근육 한 올, 관절의 움직임 하나까지 눈에 담았다.

어렵지는 않았다.

살아간 세월은 다를지라도 ‘서문경’이라는 정기신은 같으니까.

하물며…….

“심상의 주인은 나야.”

“……!”

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왕의 몸이 아래쪽으로 기울어졌다.

창왕이 서서히 얼굴을 굳혔다.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아니다. 천주 자체가 갑자기 움직인 탓이다.

“이 빌어먹을 집주인이……!”

천주가 기울어져 창왕이 자연스레 수세에 처했다.

그가 다시 균형을 잡기까지 찰나, 서문경은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었다.

더 빠르게.

무연창 중 가장 빠른 육합부터 내질렀다.

일절(一戟)부터 이진(二進), 삼란(三攔). 더 빠르게, 창대를 크게 휘두른다.

창왕의 목이 거북이처럼 움츠러들었다. 초속의 일격에 이어진 변칙이 창왕을 강하게 압박했다.

그러나 상대는 평생 창을 수련하여 왕(王)이라 불린 자.

쫘아악!

찢어진 구름 사이로 창왕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서로의 창이 뒤로 튕겼다.

불리한 지형에 처해도 창왕이었다.

창왕은 고함을 내지르며 낡은 창을 매섭게 휘둘렀다. 섬전에 가까운 연격이 서문경의 창대를 깎았다.

찢긴 파편은 너저분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창왕이 의도한 듯, 서문경의 눈가와 목을 향해 날아갔다.

“……!”

서문경은 찌릿한 위기감에 표정을 굳혔다.

결사(決死). 창왕이 품은 뜻이 그대로 전해지는 반격이었다.

“적당해서는 안 돼.”

창왕이 중얼거렸다.

“천마에게 통하지 않을 테니까.”

창왕의 창이 계속해서 진동했다. 위치를 고수하는 것만으로 위태로울 텐데,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서문경의 목숨을 노렸다.

그러지 않으면 이기지 못할 것이란 계산이 섰다.

‘첫 번째는 일 초, 두 번째는 삼 초, 세 번짼…… 반격까지 해 오지 않나.’

아니꼬웠다.

겨우 두 번 죽고 저렇게까지 부딪쳐 오는 것이, 몹시 아니꼽고 기꺼워서. 창왕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도 겨우 세 번으로 꺾일 순 없거든.”

“……끈질기기는.”

서문경은 피를 퉤 뱉었다. 내상이 깊었다. 창왕의 창질 한 번마다 무시무시한 내상을 입히기 위한 살심이 가득했다.

온전히 받아 내는 것은 무리.

하지만 조금씩 보이는 것이 있었다. 사소한 버릇부터 시작하여, 어떤 식으로 휘둘러야 ‘서문경’의 창법이 되는지 보였다.

창왕이 평생 수련했을 고뇌의 흔적이었다.

“감사하지만, 너무 암담해.”

“뭐가 말이냐?”

“당신도 천마에게 졌다면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할까.”

“…….”

창왕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측은한 마음까지 들었다.

자신이야 이미 죽고 구천을 떠돌았다지만, 저놈은 아직 마교와 싸우고 있는 몸이 아닌가.

필시 고통스러울 것이다. 사방을 의심하고 다독여야 하는 위치일 것이다.

저 나이에.

창왕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인재가 없으니까 그렇지. 무림인 좀 잘 구슬리고 그래.”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

“알아서 잘하네. 어린놈의 새끼가.”

“……허.”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창왕은 자신이 회귀한 사람인 걸 모르는 눈치였다.

다행이었다. 눈치 보지 않고 조언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하나 창왕의 손 속은 어리다고 하여 둔해지지 않았다.

쩌억!

한순간의 실수, 혹은 빈틈.

그 짧은 사이에 창왕이 서문경의 가슴을 꿰뚫었다. 벽력이었다. 창왕의 창은 언제든 뇌전처럼 될 수 있음을 뒤늦게 보았다.

되살아난 서문경은 창왕에게 물었다.

“숨기고 있던 절초인가?”

“흥…….”

창왕이 코웃음을 쳤다. 더 이상은 알려 주기가 그랬다.

겨우 세 번째 싸움에서 수십, 수백 초를 따라왔는데 네 번째가 얼마나 성가실지 가늠이 되질 않았으니까.

그와 동시에 무언가 아련한 감정이 들었다.

‘젠장, 죽고 나니 사람이 이러나.’

천마와 싸우다 죽고 나니 막상 제자를 들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변명도 있었지만, 싹수 있는 놈이 없었다. 창왕의 기교를 눈으로 보고 따라할 기재는 흔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서문경은 어떠한가?

“내가 여기 불려온 이유가 뭔지 대강 알겠어.”

“그게 무슨…….”

“똑바로 들어라.”

창왕은 한 손을 폈다.

“나에게 창을 배우면…… 칠로두 중 다섯에겐 능히 이길 수 있을 거다.”

“다섯이나?”

창왕이 씩 웃었다.

“내가 직접 이겼으니까 믿고 배우란 말이야.”

* * *

서문경이 심상에 빠져 창왕과 싸우는 사이.

담정은 해안을 보다가 문득 부끄러움에 빠졌다.

“에라이 X발, 내가 무슨 놈한테 죽기 싫다고 징징거린 건지.”

부끄러웠다.

저 어린것도 마교와 싸우겠다고 그러는데, 자기는 이룰 것이 있다고 목숨이 아깝다고 부탁한 셈이니까.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이만큼 말했으면 중간에 도망치는 일이 생겨도 원망은 안 하겠지.”

적어도 말하지 않고 몰래 도망치는 것보다야 낫지 않나.

담정은 여러 변명거릴 중얼거리다가 얼굴을 굳혔다.

특이한 냄새였다.

어린 시절 맡아, 평생을 잊지 못하고 기억할 수 있는 냄새.

쿠당탕!

담정의 뜀박질이 다급했다. 배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뛰어내리는 것에 가까웠다.

발목을 접질려도 아픔이 느껴지질 않았다.

저 멀리에 한 여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긴 머리카락에 나비 장식의 비녀.

더 가까이 가니 축 처진 눈매와 왼눈 아래 점, 붉고 도톰한 입술.

담정의 눈이 뜨거워졌다. 감정이 북받쳤다.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해서, 입술을 어물거리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저벅, 저벅.

걸음 소리에 여자가 등을 돌렸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배시시 웃었다.

“어머.”

“……야.”

“목소리가 차가우셔요.”

“왜 여기 있어.”

“예전엔 세상을 자유롭게 다니라고 하셨잖아요. 오라버니.”

여자는 담정의 왼눈으로 손을 가져갔다. 안대가 있는 자리였다.

닿기 전에 담정이 손으로 쳐 냈다.

“닥쳐.”

“오라버니가 살아계실 줄 알았다면…… 묘비는 해두지 말걸.”

“네년이 그런 거였냐?”

“제집이었잖아요. 그 정돈 해 드려야 부모님께…….”

“함부로 지껄이지 마!”

담정은 고함을 내지르며 여자의 목을 졸랐다.

온 힘을 다해서, 아예 죽일 듯이.

그러나 여자의 혈색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예 고통을 받지도 않는다는 듯했다.

“놀라워요. 그 여렸던 사람이 이렇게 강해질 줄 몰랐거든요. 게다가…… 제가 들은 척안룡의 성격과 너무 달라서. 예상조차 못했어요.”

여자, 흑향은 깔깔 웃었다.

너무나도 기뻤다.

청마가 무슨 일을 벌인다기에 놀러 왔는데 여기서 과거의 인연을 만나다니.

가히 수백 년 만에 기쁨을 느꼈다. 수많은 기억 파편 속에서 보석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우리, 이러지 말고 대화나 나누는 건 어때요?”

“……죽어.”

“재회한 기쁨을 누리고 싶지 않아요?”

“뭐가? 뭐가 기쁨이야?”

“아하. 싫으시구나. 오라버니는. 예전에 이러지 않으셨는데.”

흑향은 선이 곱고 자상했던 오라버니를 떠올렸다.

귀한 집 규수로서 길러지는 자신에게 늘 잘해 주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이렇게 목을 조르는 걸 보자니 조금 슬펐다.

“놔주면 안 되나요?”

흑향이 한쪽 눈으로 눈물을 흘렸다.

담정에게는 너무나 가증스러운 눈물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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