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68화 (166/250)

등장 (2)

이른 새벽.

서문경은 벽에 등을 기대고서 편하게 앉았다.

눈을 지그시 감았으나 틈새에서 빛이 환했다.

점차 날이 밝아진 탓이리라. 쓰게 웃었다.

사방에 왜구와 마교, 변절한 남궁세가가 있어도 해는 똑같이 뜨는구나 싶었다.

“……날 참 더럽게 밝네.”

감은 눈이 뜨끈할 날씨.

여름이 다 지나가는데 햇볕은 여느 때와 달라지질 않았다. 천하를 따사롭게 보듬어 작물을 영글게 하는 생명의 빛이었다.

그 아래서 가만히 있자니 마교가 어쩌고저쩌고하는 고민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과거로 돌아온 나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일이 아니지.’

그제야 고민을 버렸다.

온몸에 힘을 풀고 강물 위에서 떠다니듯.

벽에 머리까지 편하게 기대고서 잡념을 지웠다.

지극히 편안한 참선이었다.

쿠르르르…….

편하게 앉은 바닥에서 차가운 운무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감은 눈을 간지럽히던 햇볕마저 사라졌다.

생경한 바람이 뺨을 간지럽힐 때쯤, 서문경은 눈을 떴다.

“그새 또 달라졌구나.”

사람 하나를 티끌만 한 먼지처럼 보이게 하는 큰 기둥.

서문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둥의 테두리에 음각된 구결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건 서문경의 행적이오, 인생이기도 했다.

“다시 태어나서, 만나고, 배운 무공들이라.”

홍가권부터 시작하여 많은 고수와 마주했다.

때로는 억지로 마주쳐서 싸워야 했다. 그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거나 몸을 피했다.

그 행적이 무공사전과 천주심경의 기둥에 있었다.

“…….”

고치고, 지우고, 덧붙여 쓰고.

긴 고민의 과정이었다. 마교와 싸우기 위한 고뇌의 과정.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고통만 있지 않았다.

탈각의 즐거움이나 여운도 뒤따라왔다.

전생의 편협한 마음 때문에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던 무림인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마교로 변절하긴 했지만, 애통하진 않았다.

무덤덤했다. 언젠가 찾아올 일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래도.

“……쓰라리구나.”

서문경의 입가에서 자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따사로운 봄볕이 언젠가 혹한의 겨울 칼바람으로 변하듯, 마교로 전향하는 무림인이 생겼을 걸 알았을 텐데.

감정을 쉬이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기대를 품어서였다.

전생과 다르게 맺은 인연에게 정을 주어서였다.

그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언제부터 유약한 생각을 품었는지.’

애초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서 본가에 알리지도 않고 천무학관으로 출발하지 않았나?

기껏해야 몇 달.

그 사이에 마음이 제멋대로 가까워졌다.

특히 양무연의 창법을 개량하고 바꾸는 과정에 끼어든 건 오지랖이었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 과정과 감정, 일 모두 천주에 적혀 있었으니까.

스으윽.

서문경은 다시 기둥의 테두리를 매만졌다.

“이기고 싶다.”

관군은 올지도 모르고 사방에 마교와 남궁세가, 왜구로 가득하다.

이 난관을 꿰뚫으려면 지금보다 더 뛰어난 무공이 필요했다.

꽈아악!

반사적으로 신비한 무공사전을 꽉 쥐었다.

천마에게 죽고 회귀한 이후부터 함께 한 귀물이자, 아직도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 기물(奇物)이었다.

“도움이 필요해.”

서문경은 간절함을 담아서 중얼거렸다.

천마에게 죽었을 때만큼은 아니겠지만, 성심을 다해서.

“역시 아무 일도 없나.”

이런 걸로 뭐가 생겨나지는 않겠지.

서문경이 껄껄 웃으면서 지나가려는 그때.

시야가 갑자기 달라졌다.

“……!”

자연스럽게 기수식을 취한 채 주먹을 쥐었다.

눈앞에는 온통 운무(雲霧)가 가득하여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자신의 심상이기에 아는 것이 있었다.

“……천주의 위인가?”

하늘에 가깝게 세운 강철의 기둥.

무공의 구결로 온통 음각된 정상에 발을 딛고 있었다.

심상의 최상층이니 구름과 안개가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창.’

주먹을 쥐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창이 쥐어져 있었다.

하물며 열 걸음 밖에서 자신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놈이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얼굴에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야?”

한쪽 뺨에 새겨진 십(十)자 상처와 덥수룩한 머리.

오른손으로 쥔 낡은 창.

야인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운무 사이로 언뜻 비치는 눈동자에선 공허함이 가득했다.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문제지.

“뭐야?”

“…….”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놈은 고개를 가볍게 털고서 창으로 천주를 두들겼다.

하나, 둘.

세 번이 지나기 전에 놈이 돌진했다.

쩌엉!

쇳덩이를 때린 소음이 귓가를 찢는 듯했다.

단순히 천주를 두들겨서가 아니라, 저 낡은 창에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었다.

“……!”

서문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창을 쥔 파지가 익숙한 모양새였다.

어릴 적, 서문창법을 배우면서 자기만의 파지를 잡겠다고 억지를 부렸던 그때.

새끼손가락 한 마디를 굽혔던 시절이 있었다. 곧장 꾸지람을 듣고 고쳤지만, 저놈은 그대로였다.

“너……!”

“…….”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서문경은 이를 꽉 악물고서 무연창을 펼쳤다.

자연스럽게 두 개의 창이 얽히며 서로를 밀어내고 찌르기 위해 애썼다.

창 하나의 간격을 두고서 펼쳐지는 연격.

아차 하는 순간 창날의 끈 뭉치에 시야가 희롱된다.

서문경의 감각이 최고조에 이르며 놈의 손목과 팔뚝을 집요하게 노렸다.

‘제압해서 자초지종부터 묻자.’

그 생각이 안이했다는 건 삼십 초가 지났을 때였다.

스윽.

어릴 때 고쳤던 새끼손가락 한 마디.

서문경의 옛 버릇을, 그놈은 치명적인 무기로 바꿨다.

‘궤적이……!’

새끼손가락이 펴지며 창의 궤적이 직선에서 사선으로 바뀌었다.

스걱!

순식간에 목이 베였다.

피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고 온몸에서 힘이 쫙 빠졌다.

그제야 놈이 말했다.

“……부족해. 그 정도로는. 턱도 없어.”

패자를 놀리기 위한 조롱이나 한심함 따위는 없었다.

그저 안타깝다는 동정심으로 가득했다.

조금 더 힘내 보라는 응원 또한 섞여 있었다.

서문경은 핏빛으로 가득한 시야로 그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시야를 한껏 채운 운무와, 창을 든 자신.

그놈이 낮게 중얼거렸다.

“놀라워할 것은 없다. 네가 가진 것은…… 그런 물건이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가지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지.”

놈이 창으로 자기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억지로 웃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수십 년은 제대로 웃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어색했으니까.

서문경은 그제야 놈의 정체를 알았다.

“너…… 설마.”

“창왕. 그거면 족해.”

놈은 자기 이름을 그렇게 밝혔다. 창왕이라고.

무림인이 말하는 별호로서 자길 증명했다.

서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원한다면.”

“좋아.”

창왕이 다시 기수식을 취했다.

서문경의 직감이 재차 창왕을 꿰뚫었다. 어렴풋이 그럴 것 같다가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얼굴이 비슷한 게 아니라, 그냥 나야.’

창을 궁구하게 익힌 서문경.

그 가능성의 궤적이 눈앞에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이 불러온 환영이거나, 천주심경의 공능일 수도 있었다.

서문경은 문득 궁금해졌다.

“너는 천마에게 이겼나?”

창왕이 실재했는지에 대한 질문.

의도가 훤히 보이기에 창왕은 고개를 내저었다.

“모른다.”

“……?”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졌다는 거 아니겠나.”

“기억이 온전치 않다고?”

“그게 중요하나?”

창왕은 히죽 웃었다.

“나에게 졌으면서 천마를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

“……그렇지.”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얼굴만 비슷한 게 아니라 성격까지도 잔망스러운 놈이었다.

꽈아악……!

창을 꽉 쥐었다. 눈은 크게 뜨고 창왕을 직시했다.

놓치지 않는다. 저 낡은 창에 무슨 장치를 해 두었든, 어느 사소한 움직임이든 속아서는 안됐다.

“이제야 자세가 되었군.”

창왕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자, 시작해 볼까. 두 번째 싸움을.”

창왕과 서문경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카가각!

두 개의 창대가 시끄럽게 얽히며 지근거리에 가까워졌다.

창왕은 곧바로 창 아래를 발로 찼다.

끈 뭉치가 순식간에 뒤에서 앞으로 휘둘러지며 서문경의 목을 노렸다.

쫘악!

채찍처럼 휘둘러진 끈 뭉치와 서문경의 팔뚝이 부딪쳤다.

부딪치는 도중에 피부가 시꺼멓게 죽었다.

핏줄이 터지다 못해 내출혈로 이어진 까닭이다.

‘뭐 이런 미친 공력이.’

서문경은 발을 뒤로 빼면서 공력을 끌어올렸다. 분심조화결로서 두 가지 무공을 각기 다른 무기에 담았다.

창과 권.

두 가지 심상이 무연창과 홍가권으로 화했다.

단숨에 창왕의 두 급소를 노렸으나 상대는 백전백승의 노장이자 창의 화신이었다.

타닥, 쩌억!

창왕은 창 하나로 능히 서문경의 공격을 쳐 내고서 역공을 날렸다.

끈 뭉치로 시야를 희롱하고 창날로 목을 노리는 교묘한 합격.

두 사람이 동시에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서문경은 인상을 찡그리고서 서문검법의 초식을 창으로 펼쳤다.

그 모습을 본 창왕이 말했다.

“번검유회라면, 창과는 어울리지 않지.”

잘 보라는 듯.

창왕은 반보를 앞으로 밟았다.

서문경이 자아낸 수많은 잔영을 일일이 쳐 내고서 창을 앞으로 찔렀다.

순식간에 창날이 서문경의 심장을 관통했다.

“커억!”

“무예십팔반의 완성을 논한다는 자가 이래서야 되나.”

창왕은 한참은 멀었다는 듯 혀를 찼다.

“세 번째를 준비하지.”

“이…… 개놈.”

서문경은 피거품을 물면서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떠오른 운무와 창왕.

그는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다시 기수식을 취했다.

서문경의 보신경이 앞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창왕이 움직이질 않았다.

타앙, 탕!

공진(共振).

낡은 창이 천주를 두들기니 어마어마한 소음이 서문경을 향해 질주했다.

음공 같은 것이 아니라, 순수한 폭력에 가까웠다.

주르륵.

서문경의 귀에서 피가 흘렀다. 균형이 어그러지고 시야가 흐늘거렸다.

‘뭔 놈의 잔재주가……!’

“천마에겐 통하지 않았다.”

창왕의 한 마디가 서문경의 변명을 없앴다.

이겨 내야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의지는 곧 심상의 심지.

백사농풍을 앞으로 내질렀다. 하얀 뱀으로 유형화한 강기가 창왕을 집어삼킬 듯 부풀었다.

이에 창왕은 거대한 바람을 일으켰다.

단 일수. 창을 가볍게 휘돌린 것만으로 돌풍이 무수한 운무를 밀어내고 백사농풍의 강기를 찢었다.

뒤이어 또다시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카르르릉!

쇠사슬이 암반에 마구잡이로 긁히는 듯한 괴음.

서문경은 귀를 막고 싶다는 감정을 참았다. 아팠지만, 발은 여전히 가볍다. 괜찮다.

서문경은 몸 상태의 점검을 끝내고 창을 휘둘렀다.

봉점두.

창극의 극점에 실린 힘의 파도가 창왕을 향했다.

두 번째 싸움에서 창왕이 번검유회의 약점을 찔렀듯, 창왕의 돌풍을 꿰뚫었다.

“제법.”

창왕의 뺨에 실선이 그어졌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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