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67화 (165/250)

등장 (1)

“대호채주라고 했었지.”

“어린놈이 반말은…….”

“서열 정리부터 할까?”

“공자님이 참, 가족 같소이다!”

대호채주가 히죽 웃었다.

은근슬쩍 욕을 넣은 것 같지만, 트집을 잡는 것도 우스운 일.

서문경은 마주 웃었다.

앞으로 그에게 시킬 걸 생각하면 욕 좀 들어먹어도 괜찮았다.

“선배가 가줄 곳이 있소이다.”

“어디? 설마 뒈지러 가라고?”

“여기서 북으로 가면 황도가 있을 터인데. 그곳으로 가서 안휘성의 상황을 전달해 주면 좋겠소.”

“……!”

그 말에 대호채주는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레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내, 내가…… 그런 곳에 가도 되나?”

“뭐 어떻소. 위급한 일인데.”

서문경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미리 준비하고 있던 패를 꺼냈다.

귀명패(貴名牌).

서문세가의 귀한 손님임을 증명하는 것과 동시에 웬만한 품계의 관인은 찍어 누를 수 있는 공용패였다.

대호채주의 입이 흐물해졌다.

“이것만 있으면 여태껏 나한테 개지랄을 했던 새끼들한테 한 방 먹여 줄 수 있겠구만!”

“이번 일만 잘 끝내면 며칠은 빌려줄 수도 있지.”

“정말인가?”

“그렇지.”

“허, 허허…….”

이게 바로 권력의 맛인가?

대호채주는 부하들 앞에서 히죽거렸다.

“야, 인마. 이제 내가 현령이고 지부대인이고 어? 수그러들 이유가 없다 이 말이야!”

“이러다가 총표파자한테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이거 가지고 돌아가면 오히려 그 양반이 좋아하겠지. 안정적으로 장사할 수 있잖아.”

그러다 문득 대호채주가 서문경에게 물었다.

“가는 길이 쉽지는 않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쯧. 그래도 뭐 거기가면 안전하게 손님 대접은 받을 수 있겠지.”

대호채주는 혀를 연신 찼다.

남궁세가가 반드시 틀어막아야 할 길이 바로 관도(官道).

접경지라고 해서 다를 게 없었다.

검단이라고 하는 것들 여럿이서 대기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나마 우리가 제일 낫다고 판단한 건가.’

대호채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문경이 어리다고 하여 은근히 얕잡아 봤는데, 생각보다 담이 컸다.

“관인이 아니라 우리한테 시키는 이유가 있나? 목숨이 위험하면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잖아.”

“얕은 생각은 거기까지 하십쇼.”

“뭐?”

서문경은 말없이 대호채주와 시선을 마주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이 도망쳐도 크게 아쉽지 않았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대호채주를 비롯한 녹림도에게 황실로 가 달라고 부탁한 것은, 어디까지나 절차를 위해서였다.

무림이 명분을 따지듯.

관인은 보고와 절차를 중시하니까.

‘안휘성에 생긴 별고를 우리끼리 처리하되, 최소한 상서를 올리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가뜩이나 천하가 혼란했다.

군문의 명가라고 불리는 서문세가가 모범을 보여야 할 때였다.

지금까지 서문경이 강호를 휘젓고 다닌 게 불효이자 불충이다.

서문이현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물며 정의맹의 수립엔 황상의 입김 또한 들어가 있으니.

‘산길에 밝은 대호채주를 황실로 출발시킨 사실과 기록이 있으면…… 저들이 죽건, 도망치건, 서문세가에 화가 미치진 않겠지.’

서문경은 자기가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군인의 시선으로 보았다.

그 시선에서 녹림이나 수로채나 언제든 배신할지 모르는 도적놈에 불과했다.

그래서 가벼이 여겼다.

지금의 협력도 마교와 남궁세가에게 갇혀서일 뿐, 오래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정의맹에 합류시킨 것도 어디까지나 많은 이들을 들이기 위함.’

서문경의 눈동자에 여유와 차분함이 가득했다.

결국 대호채주가 먼저 시선을 떼야 했다.

“……쳇. 어린놈이 뭐가 그리 얼굴가죽이 질겨서는.”

“최대한 빨리 출발해주시오.”

“알았다. 알았어!”

대호채주의 뒷모습을 본 서문경은 주백경에게 전음했다.

-주 무사, 명군이 올 것 같나?

-……아니요.

-왜?

-공자님도 아시잖습니까. 황실에 마교가 침습하였다는 것을. 가주님과 패 어르신께서 부단히 연락한다고 들었습니다.

혼란한 시대는 위치를 가리지 않는다.

안휘성과 시골, 구파일방이 어지럽듯,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주백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답지 않았다.

-아마…… 보고를 받아도 황실에서 군사를 보내 주진 못할 겁니다. 상비군을 보냈다간 마교가 역도(逆徒)를 일으킬지 모르니까요.

-그렇겠지.

황실에 주둔하는 군엔 서문패 못지않은 고수가 여럿 있었다.

그들의 정체나 수는 서문이현조차 알지 못했다.

오직 황족만이 공유하는 비밀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마교가 숨어들어도 함부로 모반을 일으키지 못하는데, 어찌 안휘성까지 보내겠나.

서문경은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끼리 해결하는 편이 나아.

-열세긴 하지만, 최대한 전략을 짜면 낫겠지요.

서문경 일행과 수로채 본선.

남궁세가와 어디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마교와 왜구.

숫자가 수십 배 넘게 차이 났다. 절대고수에 준하는 무인의 숫자조차 저들이 더 많을 게 뻔했다.

그럼에도 주백경은 웃었다.

-언제는 우리가 자리 보고 누웠습니까?

-내가 할 소리를 왜 해. 긴장했나?

-하하. 뭐, 간만에 미친 짓을 하려니 피곤해졌지요.

주백경은 과거의 기억을 들췄다.

한때는 절벽을 맨손으로 올랐고, 적마와 청마 같은 마도고수와 싸워야 했다.

어디 그뿐이랴?

섬서성의 군문과 함께 북적 떼와 싸워야 했거늘.

그 사이에 서문경은 화산에서 백야흔이라는 칠로두와 싸웠다고 한다. 호위무사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물러설 생각을 포기했다.

“제가 백 명 정도는 감당하겠습니다.”

“너무 적게 잡았네. 이백은 해 줘야지.”

남정네 둘이서 서로 끌끌 웃었다.

적군의 기지 옆에서 나누기엔 너무나도 철없고 어이없는 대화였으나,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둘이서 함께 한 싸움이 너무 많다.

어처구니없이, 불가능한 상대와 싸운 일도 잦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리라.

서문경은 주백경과 서로 가벼운 예를 표했다.

바로 그때였다.

“잠깐. 나랑 따로 이야기 좀 하지.”

담정이 서문경과 따로 얘기하길 청했다.

* * *

배의 갑판 위.

조촐하게 차려진 술상과 달빛이 있었다.

여름의 더위는 거의 다 가시고 좋은 바람이 일렁였다.

서문경은 가만히 앉아서 강에 낀 안개를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얼마나 많은 왜구가 있을까?

그 걱정을 하다가 고개를 돌리니 담정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걱정이 많아 보이네.”

“내 몸이야 내뺄 수 있어도, 그랬다간 죽는 숫자가 일만을 넘을 겁니다.”

“그렇게나 된다고?”

“가는 곳마다 늘 찾아보는 게 하나 있습니다.”

천무학관으로 갈 때도, 구파일방을 돌아다니려고 할 때도.

의식처럼 읽는 것이 있었다.

존귀한 군문에서 태어난 자식으로서, 회귀자로서 가지는 책임감이었다.

서문경은 달빛을 받고서 빛무리가 일렁이는 강을 보았다.

수없이 많아 보여도 자신이 기억하는 숫자보단 적을 것 같았다.

“이십만 구천 삼백여 명.”

“……?”

“안휘성에 거주하는 사람의 숫자입니다. 이보다 적거나 많을 수도 있습니다. 현령이 조사해도 오차가 나기 마련이니.”

“뭐냐. 설마, 그런 걸 기억하고 다닌다고?”

담정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강호에 살면서 수많은 족속을 보았다.

자기가 대단하다,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둥 많은 놈들을 보아도 저런 식으로 미친놈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자기가 지킨단 것처럼 말하지 않나!’

어린 시절 앓곤 하는 병도 저 정도로 심하진 않다.

담정은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무슨 도독이고 병부상서냐?”

“지금 안휘성에선 저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허.”

담정의 눈에 서문경의 결연함이 비쳤다.

죽어서도 마교를 무찌르겠단 게 아니라, 살아서 모두 죽이겠다는 각오였다.

그것이 참으로 어이없었다.

“……누군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살아서 나가면 어찌 될지 각오하고 그러십시오.”

“준비를 이렇게까지 했다면 반드시 죽일 수 있는 수가 있겠지!”

쾅!

담정은 술상을 내리쳤다.

주전부리와 술잔 따위가 뒤엉켜서 젖었다.

감정이 통제되지 않고 출렁였다.

“너, 내 다락방에 들어가 봤지.”

“그렇습니다.”

“대충 예상하고 있는 것도 있겠고.”

“흑향을 쫓고 있겠죠.”

“그게 내 숙원이야. 반드시 이뤄야 할 약속.”

안휘성 사람 전부가 죽어서라도.

담정은 가까스로 뒷말을 삼켰다.

서문경 앞에서 내뱉었다간 절대 안 될 말이었다.

하지만 서문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황이 안 좋으면 빠져나갈 생각이겠지요.”

“……나쁘냐?”

“군법으론 사형은 물론이고 가족에게 불명예입니다.”

“가족도 없는 불명예는 무슨.”

담정은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머릿속에 엉킨 기억과 감정이 더더욱 복잡해졌다.

서문경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여기에 흑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뭐?”

“왜 쫓는진 몰라도, 알 것 아닙니까. 어디 하나가 완전히 몰락하는 모습을 좋아한다는 걸.”

서문경의 고개가 남궁세가 방향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급사한 전대 가주와 마교에 합류한 젊은 가주.

그를 따라서 반역을 저지르는 무림인들.

혼란을 틈 타 권세를 쥐겠다는 모양새지만, 가문의 법이 무너진 꼴이었다.

몰락이 코앞에 있었다.

담정은 그것을 가만히 곱씹다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있을까?”

“술은 그만 드시고 날붙이나 닦아 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런가.”

담정은 탄식을 흘리고는 등을 뒤로 뉘였다.

하늘과 강이 접경하는 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크게 너울 치던 기억과 감정이 점차 잠잠해질 때까지.

그제야 진정한 담정이 서문경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전술과 마교, 무공에 이르기까지.

여러 화제가 빠르게 회전했다.

아예 이해할 수 없던 사람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와중에도 서문경은 벽을 나눴다.

‘수적을 깊게 믿을 순 없는 법이지.’

만에 하나, 흑향을 죽이고 숙원을 이룬 담정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니까.

서문경은 석양이 질 때까지 담정과 이야기하다가 잠들었다.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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