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장 (2)
“반갑지. 삼 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그러게.”
“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진 않았어.”
서문경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정의맹이 이 땅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나서 거창한 구령대를 만드는 거야. 금으로 길을 만들고, 황제께 간청하여 붉은색으로 칠하여 만든…… 아주 호화로운 계단으로 말이야.”
“그거 참 멋지네.”
“그 길을 따라서 네가 오르는 거지. 정의맹이 세워지기까지 큰 도움을 준 남궁세가의 가주님이라고, 도독과 지부대인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북 소리가 쿵쿵 울리고.”
구령대에 오르는 남궁명을 서문경과 다른 동기가 지켜보며 환한 웃음을 드러내는 한 장면.
서문경은 그런 미래를 원했다. 전생과 다른 역사의 한 장면에 함께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길이 달라졌다.
정도(正道)와 사도(邪道)로 나뉜 두 길목에서 헤어지고 말았다.
서문경의 눈에 남궁명이 담겼다.
의와 도리를 논하던 맑은 눈에 불순물이 많았다.
“네가 정의맹을 이끌길 바랐어.”
“지금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구나.”
“어. 너도 알잖아. 네가 해 놓은 짓을.”
“알지.”
남궁명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죄의식은 전혀 없었다.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구파일방도, 오대세가란 말도 없어질 거야. 절대지존은 될 수 없겠지만…… 뭐,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잖아?”
“마교에 줄 서서 한다는 짓이 천하를 한 번 태우자는 거냐?”
“네가 말하는 천하는 기껏해야 중원이겠지. 아니면 너네 가문이 길을 막고 있는 서역까지가 전부겠고.”
남궁명이 두 팔을 넓게 폈다. 손가락까지 쭉 펴고서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달이 크고 둥글었다. 여름 중 가장 크다는 보름달의 밤이었다.
곧 계절이 바뀌어 간다는 증거였다.
천하도 마찬가지로.
“나는 더 먼 곳을 원하거든. 중원 너머로 더 넓게.”
“……미친 거냐?”
“집 지키는 개라서 포부가 작은 거야. 네가 외적이라고 부르는 것들 모두, 저 멀리서 온 타인이잖느냐. 대명(大明)이 세워진 때와 다를 게 무어냐?”
그 말에 서문경의 적의가 더욱 격해졌다.
“너…….”
“내 말이 틀렸나? 결국 이 나라의 기틀도 그리 깨끗하진 않았다는 것을, 너도 잘 알면서.”
남궁명이 태조의 흠결을 논했다.
서문세가의 군관으로서 가만히 두면 안 될 이야기였다.
서문경은 눈가를 좁혔다. 장심에서 흘러나온 공력이 자연스레 검을 들어 올렸다.
“거기까지만 말하지 그래.”
차가운 경고에 훌륭하기까지 한 이기어검술.
남궁명은 입술을 짓씹었다.
오랫동안 보지 않아서 괜찮았던 마음이 다시 요동을 쳤다.
혼탁하고 비루한 감정이 가슴을 쿡쿡 찔렀다.
“더 말하면 반역죄인가?”
“잡아가겠지.”
“아하, 그 명목으로 일단 잡고 후에 다른 걸로 엮겠단 소리군.”
“……미친놈. 언제 그렇게 삐뚤어진 거냐?”
저게 한때 천무학관에서 제일 꽉 막히고 정의롭다던 소가주라니.
서문경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하지만 남궁명은 저 웃음을 똑바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전에 들었던 아버지의 꾸짖음과 청마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명가의 소가주라는 것은 그리 급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찌 대가문을 무력으로만 다스리겠느냐?
-몇 번을 깨지고 나니 깨달으신 겁니다. 아, 이런 쪽으로 싸움을 걸면 안 되겠구나. 다른 쪽으로 타일러 봐야겠다.
-명아. 저런 자는 가까이 두어서 좋을 일이 없다.
-잘 들어 보십시오. 정종의 무공을 그대로 둔 채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난 삼 년.
아버지의 가르침과 달콤한 속삭임이 있었다.
처음에는 청마에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지만, 갈수록 급해졌다.
동기가 빠르게 강해지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볼수록.
천무학관을 제 발로 나간 서문경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좁은 우물에서 천하로 몸을 들이밀고 싶었다.
그때는 몰랐다.
우물에서 충분히 몸집을 불리고 천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큰 굴욕을 겪고 나서야…… 남궁명은 길을 택했다.
“삐뚤어진 게 아니야. 다른 길을 뒤늦게 안 거지.”
“……뭐?”
“대명의 명가가 아니라, 더 넓은 세상이 있으며…… 꼭 올바르지 않아도 강해질 방법이 많았다는 걸.”
남궁명은 서문경을 보았다.
만월 아래서도 서문경의 풍모는 여전히 깊고 멋있었다.
검에 통달한 무인이자 천하십대고수에 준하는 고수.
그에게 조금이라도 대적하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남궁명의 입에서 숨이 내쉬어졌다.
“오늘 일은 정의맹에서 따질게.”
“내뺄 생각이냐?”
“그게 무슨 소리야, 애초에 내 집인데. 죽이기라도 할 거야?”
“…….”
서문경은 잠시 침묵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계산이 충돌하고 가능성을 의심하다가, 검을 거뒀다.
‘여기서 베면 상황이 귀찮아져.’
죄가 큰 만큼 당장 베어도 이상하지 않겠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다른 명가의 시선이 불편해질 터.
서문경이 뒤로 물러나자 남궁명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 발을 물러나게 만드는데 우리 집 곳간이 타는 걸 방관해야 한다니, 너무 비싼 거 아니야?”
“목숨값이야.”
“……뭐?”
“목 위에 달린 거, 살린 값이라고 생각해.”
“그것참 무섭네.”
남궁명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의 손끝에 검고 새빨간 얼룩이 져 있었다.
마공을 수련한 흔적이었다.
* * *
“공자님.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내가 봐도 그래.”
주백경과 성하민이 서문경의 얼굴을 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얼마나 구겨져 있었으면 그랬을까?
서문경은 억지로나마 웃었다.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지만,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가슴 한편이 따스했다.
“잠깐 남궁명을 만났어.”
“뭐?”
성하민이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말없이 있었지만, 안휘성의 흉년을 보고 내심 남궁명의 근황이 궁금했던 차였다.
“어땠는데? 정말로 이…… 상황을 만든 거야?”
“어. 작정했더라.”
“그랬구나.”
성하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무학관에서 잠깐 있었지만, 가장 귀한 몸으로서 모범을 보이던 친우가 그렇게 되었으니 애석한 마음이 들었다.
하물며 서문경의 마음이 어땠을까?
‘명이가 큰 도움이 되어 줄 거라고 안휘성에 정의맹을 세운 걸 텐데.’
정작 남궁세가가 안휘성에 흉년을 부르고 곳간을 빵빵하게 채우고 있지 않았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서 그렇지, 반역을 모의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성하민이 조심스럽게 서문경을 위로하려는 찰나.
“여, 여기까지 들어오면 안 되오!”
“여긴 길 아니야?”
“당장 멈추시오!”
“거 누가 계시기에 이렇게 비싸게 굴까?”
저 멀리서 시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창 공사 중인 곳, 그것도 관인과 무림이 연루된 곳에 발길을 들이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기에 주백경과 성하민이 숨을 죽였다.
마인일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이 저절로 솟았다.
하지만 서문경의 표정은 달랐다.
“하필이면 여기서 만나나.”
“아는 목소리십니까?”
“왜 모르겠어. 주 무사도 되게 고생한 놈이잖아.”
“……아!”
주백경이 뒤늦게 탄성을 터트렸다.
이제야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어이, 여기 귀한 몸이 있었구만!”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이자 십대고수 중 하나.
척안룡 담정.
그가 웬 남자를 업고서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왔다.
왼눈의 안대나 꽁지머리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인상적인 등장이었다.
서문경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뭡니까?”
“어어! 어째 손님 대접이 왜 이래?”
“손님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어야지요.”
“내가 누굴 데려왔는지 알면…… 술이라도 꺼내 와야 할 텐데?”
그 말에 서문경이 남자의 뒤통수를 잡고 들어 올렸다.
아는 사람도 아니고 항상 기억해 두는 고수의 얼굴도 아니었다.
서문경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뭔 생사람 잡고 와서 나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거 아닙니까?”
“생사람이라니, 남궁세가의 귀하신 분인데.”
“……!”
서문경이 깜짝 놀라 남자를 붙잡자, 담정은 어깨를 비틀곤 히죽 웃었다.
“에헤이, 사람아. 갑자기 그렇게 뺏어 가려고 하면 안 되지.”
“술이라도 꺼내 오면 되겠습니까?”
“나 방금 상처 받아서 말이야. 이젠 술로 안 되겠는데.”
“여기서 당장 더 귀한 걸 주자면 시간이 걸립니다.”
서문경은 대화를 하면서도 남자를 슬며시 쳐다보았다.
조금 전, 남궁명의 낯짝을 보고도 물러선 이유가 저자에게 있었으니까.
잘 포박해서 안휘성을 빠져나가기만 해도 남궁세가를 멸문시킬 명분이 되어 줄 터였다.
하지만 담정의 대답에 생각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우린 정의맹에 당당히 가입도 못 하잖아. 그럼 마교가 다 뒈지고 나면…… 수군으로 옮겨 줘. 경력 다 따져서 그대로.”
“……뭐요?”
“아, 그리고 하나 더.”
담정의 외눈에 증오심이 있었다.
“남궁세가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넘겨줘야 해.”
서문경의 머릿속이 순간 혼미해졌다.
수적을 갑자기 수군으로 옮겨 달라고 하지 않나, 남궁세가에 있을지도 모를 사람을 넘겨 달라니?
의도를 도저히 읽기 어려웠지만, 기억을 되짚어 보면 몇 가지 단서가 있었다.
‘전생에서 누굴 쫓고 있다고 하던 때와, 삼 년 전의 서책들…… 마교와 싸우다가 죽어 버리기까지.’
담정은 대다수가 생각하는 수적과 궤가 달랐다.
하물며 수군으로 자리를 옮겨 달라는 건, 자기가 없더라도 양지로 옮겨 달라는 뜻.
서문경은 칠로두의 면면을 떠올리다가 저도 모르게 한 마인을 떠올렸다.
“아는 사람이라는 게 설마 흑향인가?”
“뭔가 알고 있다면.”
툭.
담정은 업고 있던 남자를 땅바닥에 내던지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놈은 그냥 주고, 나까지 이번 일에 한해서 충성을 다하마.”
“…….”
“뭐라도 알려 줘. 부탁할 테니까.”
미친 소리를 해 대거나 낄낄 웃어 대던 담정 같지 않았다.
서문경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제자리에서 일으켰다.
“마교와 함께 싸운다면 동지죠. 안 그렇습니까?”
“……물론이지.”
담정은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흑향, 그 여자를 잡기만 한다면 물거품처럼 사라질 생각이었기에.
마교와 함께 싸우겠단 약속은 지키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 생각을 서문경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수적 놈들을 수군으로 편입시키려면 너도 있어야지. 도망칠 생각 하기만 해 봐라.’
서문경은 담정의 속을 꿰뚫어 보고서 히죽 웃었다.
전생을 안다는 것이 이리도 사람을 현명하게 만들어 주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