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맹으로 (4)
* * *
흉년이었다.
초록빛으로 푸르러야 할 논에 황색 죽음만이 가득했다.
벌레조차도 자기 먹을 것이 없어 몇 차례 꿈틀거리다가 숨을 죽였다. 움직이질 않았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마가 왔었는데…… 그랬었는데…….”
배 곯는 농민이 애꿎은 하늘을 노려보았다.
삶이 곤궁하여 생긴 증오가 향할 곳이 없어서였다.
“끄으응…….”
등 뒤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다 죽어 가는 개새낄 보듬은 아이의 신음이었다.
개나 아이나 갈비뼈가 훤히 드러났다.
애잔하다 못해 흉측하다.
농민은 하늘을 향한 증오에서 차가운 현실로 돌아왔다.
“살이 더 빠지기 전에 잡아먹자고 했잖니?”
“개도 우리 가족이잖아요…….”
“가족은 얼어 죽을, 오래 길러 줬으면 해 줄 몫은 다 해 준 거지!”
“안 돼요…….”
아이가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농민은 정문에 모인 사람들을 보았다.
“황 씨……”
“물을 어렵사리 구해서 끓여 왔네. 결단해 주게.”
다 죽어 가는 개를 지그시 쳐다보는 눈에 갈망이 가득했다.
살고 싶다. 원초적인 의지와 집념이 아이가 껴안은 개를 음식 보듯 했다.
황씨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이마저도 같은 마을에서 동고동락하며 지낸 정 때문에 존중해 준 것이다.
아들이 단념할 때까지.
“살자. 일단은 살고 보자. 응?”
“안 돼요…… 안 돼요 아버지…….”
황씨의 손아귀가 다 죽어 가는 개를 빼앗아갔다.
여러 날을 쫄딱 굶었을지언정 농사로 거칠어진 손을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버지…….”
아이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개는 낑낑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저 멀리, 물과 풀떼기로 끓여 온 솥의 열기가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관에서 무언가 씨앗을 잘못 준 거야…….”
“가뭄이 긴 것도 아니고, 장마도 없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농민들이 한탄하는 소리가 깊었다.
흉작이 다가오기엔 징조가 조금도 없었다.
현명하다는 마을의 노인을 붙들어 묻기도 했으나, 그들 또한 고개를 내저었다.
의심할 것은 마을마다 나누어 준 씨앗뿐.
평소보다 물을 더 많이 써서 이상하긴 했지만, 우물이 마를 줄 누가 알았겠나.
“옆 마을은 산적이 되었다는데…… 우리도 그러지 못할 이유가 뭔가?”
“먹고는 살아야지.”
“강 씨 아들네는 정의맹을 지으러 가서 세 끼 잘 먹고 산다던데?”
“그나저나 이런 흉작이 오면 남궁세가에서 곳간을 열어 줬다고 하지 않았나? 대체 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대체로 한탄이 많았으나 마교로 가자는 말은 없었다.
여러 마을의 존경을 받는 현령이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인면수심이 되려거든 자기부터 먼저 죽이라고. 너무 결연해서 감히 맞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였다.
“우릴 누가 살펴 주신다고!”
“황 씨가 기르는 개마저 잡아먹게 된 꼴을 보세. 도리를 지킨다고 누가 입술에 풀칠이라도 해 주나?”
“정의맹도 마찬가질세. 우리가 이리 굶주리고 있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현 지부대인을 보세! 남궁세가와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물고 있지 않나!”
원념이 깊었다.
이름만 꺼내도 자라목이 되는 지부대인의 욕을 하는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도리를 지켜서 굶어 죽느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연명하자는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그 와중에 황씨는 두 손으로 개를 들었다.
가벼웠다.
“자, 자, 솥에 넣기 전에 털부터 정리하세!”
“…….”
솥 앞에 선 남자가 칼을 들고 있었다.
예전에는 몸집이 컸었는데 지금은 쪼그라들었다.
마을 최고의 장사로 불리던 시기와 달랐다.
저 변화가 애잔하면서도 서글펐다.
그는 본디 동물을 아꼈다.
자기 집 지붕에 새가 둥지를 틀어도 웃던 사람이었다.
하나 지금은 어떤가?
“지붕의 손님은 잘 있는가?”
“……알을 빼 먹으니 사라지더군. 애석한 일이지. 다들 배고플 텐데 말이야.”
남자가 쓰게 웃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
황씨가 남몰래 중얼거리곤 하늘을 보았다.
장마가 끝나고 청명해서 불쾌했다. 쓸데없이, 맑았다.
“단번에 끝내주게.”
“그래야지.”
남자는 칼을 역수로 쥐었다.
개의 목으로 가져가서, 단숨에.
“몇 가지 묻지요.”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황씨를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개의 목을 그으려던 것도 멈췄다.
참으로 허깨비처럼 나타난 청년이었다.
훤칠한 얼굴에 깨끗한 천으로 상하의를 차려입어, 품이 귀해 보였다.
존경하는 현령과는 다른 의미로 높은 사람.
황씨가 먼저 두 무릎을 꿇었다.
“황 아무개가 귀인(貴人)을 뵙습니다!”
“뵈, 뵙습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뒤따라 했다. 허리에 묶은 검이 유난히 서늘 퍼런 빛을 품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무림고순가?
젊은 남자 몇몇이 눈빛을 빛냈으나, 장년인이 그놈의 머리를 짓눌렀다.
청년은 그 모습을 모두 눈에 담고는 말했다.
“저는 화산파의 연준호라고 합니다. 어르신들께서 무릎을 꿇을 사람이 아니니, 속히 일어나셔서 젊은 것의 부끄러움을 없애 주십시오.”
“연준호……?”
“화산파라면 마교에게…… 흡.”
마을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연준호는 개의치 않았다.
“맞습니다. 화산은 마교에게 패하여, 수복 중에 있습니다.”
“하, 하면은…… 대협께선 어이하여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소문?”
“안휘성이 궁핍하고 곤궁하여 산적이 창궐하는데, 세간에선 모르고 있다고요.”
연준호는 하늘을 보았다.
그저 증오로만 가득하던 황씨와는 다르게, 연준호의 눈은 더 먼 곳을 볼 수 있었다.
‘웬 매가 저리 많은지…….’
본디 여름은 곡식이 익는 계절이라, 작은 새를 노리는 매가 내륙에 많아지곤 했다.
하지만 며칠 동안 안휘성을 돌며 본 숫자는 상식과 달랐다.
누군가가 일부러 매를 풀어놓은 듯했으니까.
연준호의 시선이 뜨거운 솥으로 향했다.
“본산의 상황이 좋다고 할 순 없으나, 차차 나아지고 있으니 저라도 강호에 나서서 협행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윽.
연준호가 품에서 말린 곡식과 육포 따위를 꺼냈다.
망설임은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식량을 전부 솥에 털어 넣었다.
“대, 대협……!”
“어떻게 해 드실지는 어르신께 맡기겠습니다. 부족하면 제가 주변의 관아로 가서…….”
그 말에 젊은 청년 하나가 연준호의 팔목을 붙잡았다.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
“이런 흉작이 왔는데도, 관아에선 미동도 없습니다! 대협께서 나서 주신다면 안 되겠습니까?”
“음.”
연준호는 잠시 갈등했다.
첫째론 혼란 속에 더 큰 혼란을 일으켜선 안 되는 선현의 가르침이었고, 둘짼 서문경의 얼굴이었다.
유일하게 친하다고 할 수 있는 관인.
그에게 민폐를 끼치게 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마을 사람의 응원을 뒤로하고 연준호는 관아로 향했다.
문지기를 하는 사람은 도통 보이지 않았고, 문에 기름칠한 흔적이 없었다.
끼이익…….
관아의 대문을 가볍게 밀자, 소름끼치는 소리가 귀를 난타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사람도 반응했다.
남루한 복식의 남자였다.
“누구시오?”
“화산파의 연준호라고 합니다.”
“협객?”
“그리 불릴 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아, 그러시나. 그것 참 다행이군. 쉽게 처리할 수 있어서.”
연준호의 기감이 여러 기척을 잡아냈다.
하나하나가 일류에서 이류.
검기를 다룰 줄 알거나, 상대를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는 살검을 구사한다.
마을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때 연준호는 관아 구석의 땅을 보았다.
‘……구덩이를 판 흔적이야.’
저 만큼 땅을 파헤쳤는데 표식 하나가 없다. 핏물 또한 어렴풋이 남아 있다.
연준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상대가 관인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대들이 배운 자라면 사람을 장사 지낸 자리에 비석을 남겨야 한다는 예를 알진대. 인명을 그리 쉽게 해한 이유가 무엇인가?”
“대단한 도인 납셨군.”
“인의(人義)다.”
“……뭐?”
“인의를 지키는데 대단한 사람은 필요하지 않아.”
스르릉……!
연준호는 칼을 뽑았다. 검의 울음소리가 선명했다.
이에 관아에서 클클거리던 무인들이 표정을 굳혔다.
“고수다!”
“젠장, 저렇게 새파랗게 젊은 놈이……!”
무인들의 기세가 한데모여 커졌다.
집단의 묘(妙)를 살리기 위한 움직임이 연준호에게 읽혔다.
‘진? 진이라고?’
연준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이라고 함은, 서로의 무공을 깊이 아는 무인끼리 합을 이루어 적수를 상대하기 위한 기법이었다.
어중이떠중이가 알 만한 것이 아니다.
명가에 속한 무인이어야 어렴풋이 배우는 상승의 무론.
“그만한 무공을 익히고도 흉작을 겪은 마을 사람들을 핍박하였느냐? 부끄럽지도 않느냐?”
“…….”
그 말에 무인들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관아의 땅에 사람까지 묻은 악적들이 보일 반응이 아닌데.
하지만 연준호에게 보인 살기는 흩어지지 않았다.
“단숨에 쳐라!”
일검일살.
무인들의 형세가 네 방위를 점했다.
연준호가 빼어난 초식을 펼치더라도 사혈을 찔러서 즉사시키겠다는 의도가 훤히 읽혔다.
연준호의 오른팔이 시원하게 휘둘러졌다.
휘르륵……!
네 개의 칼을 단숨에 끊는 일선(一線).
포위망을 뚫는 초패왕의 기세였다.
연준호는 검으로 매화의 향을 풍겼다.
향이 주위 삼 장을 넉넉히 점했다.
“……젠장, 피할 수 있는 검기가 아니야. 이건!”
호신강기를 단단히 굳히고 검향의 중심에 있는 연준호를 꺾어야만 한다.
매향지경의 진수는 그것에 있었다.
화려한 검기를 받아쳐도 향 그 자체에 있는 검기의 잔향까지 넘어서야 했다.
무인들의 낭패 섞인 얼굴에 연준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알겠군.”
“……?”
“남궁세가의 무인이 어찌하여 관아에 있는 건가?”
연준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이 부끄럽지 않으냐?”
“…….”
무인들은 깨끗한 천으로 차려입은 연준호와 남루한 복식의 자기 꼴을 보았다.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그 다음은 짐승에 가까운 윽박질이었다.
“네놈이 무엇을 안다고!”
“닥치고 죽어라!!”
“죄는 차차 묻겠다.”
갈지(之)자를 그리는 일검.
연준호의 검광이 마른하늘에 번개를 일으키듯 했다.
“커헉, 컥!”
“으윽…….”
각자 팔과 다리를 베인 무인들이 땅바닥에서 신음했다.
조금 전, 황씨가 껴안고 있던 개보다 처참해 보였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