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57화 (155/250)

정의맹으로 (3)

“총채주님.”

“…….”

“총채주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어.”

의자에서 꿈뻑 졸고 있던 남자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왜소한 풍채에 움푹 팬 눈가.

무림인보다는 문사에 가까웠다.

이마에 각인처럼 새겨진 주름과 팔자주름 없는 얼굴에서 까탈스럽고 괴팍한 성격이 드러날 정도.

남자는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곤 눈에 힘을 주었다.

우락부락한 체구를 가진 거한이 공손한 자세로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적은 어찌 되었지?”

“실패했습니다. 수로채의 구역까지 도망쳐서요.”

“그 미치광이가 끼어들었겠군.”

“예.”

“그놈 성격에 작살을 던졌을 텐데, 다친 사람은?”

“죽은 사람은 없고 중상자가 둘, 경상이 다섯입니다.”

“사정을 봐줬군. 미치광이 놈도 상황이 기이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남궁세가 시체를 건지는 것이 고작이겠어.”

남자의 말에 거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로채의 총채주, 척안룡은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 온갖 문젯거릴 만들곤 했으니까.

그자에 비해 눈앞의 남자는 무식한 것들을 참된 길에 이끌어 주는 지휘자였다.

“가만 보자.”

남자, 백담(百啖)은 고개를 돌려 지도를 보았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지도에는 온갖 산길과 관도, 말 가게까지도 표시되어 있었다.

거기다 반투명한 선으로 대형 표국이 선호하는 샛길까지도 정확히.

백담의 의안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아직 남궁세가 놈이 죽은 것이 알려지지 않았을 테니, 대호채주는 성수산과 백전길로 가서 대기해라. 그곳에 남궁세가의 요충지가 있을 것이다.”

“예.”

“숫자는 대략 열둘로 예상한다만, 사람이 더 필요하더냐?”

“아닙니다. 저희끼리 할 수 있습니다.”

녹림칠십이채의 중추, 대호채주는 남자에게 여전히 공손했다.

타인이 보기에 의아할 광경이었다.

십대고수는 아닐지언정 그들에게 근접한 고수가, 그것도 녹림의 채주가 문사로 보이는 남자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하지만 백담의 정체는 척안룡을 비롯하여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총채주의 명을 받듭니다.”

녹림칠십이채의 총채주.

백담은 호사가들이 우연히 때려 맞춘 ‘공포로 자리할 뿐, 무공이 뛰어나지 않은’ 남자였다.

하나 그것뿐이라면 험상궂고 괴팍한 사내들 사이에서 군림하지는 못했을 터.

대호채주의 고개가 더욱 숙여졌다.

“총채주님이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당장 저희만 하더라도 전 총채주 때문에 억울하게 죽을 뻔한 것을……”

“됐다. 지금은 남궁세가 때문에 우리가 고립될 위기이니 그것부터 처리하지.”

“황산채주와 함께 가겠습니다.”

백담은 고개를 끄덕이곤 지도에 한 줄을 추가했다.

일필휘지.

왜소한 체구에서 나온다기엔 힘 있고 강렬한 필체였다.

그 모습을 본 대호채주가 밖으로 나가니.

“……후우. 피곤하군.”

움푹 팬 눈가에 피로가 가라앉았다.

마교가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로 삼 년.

표국의 움직임은 줄어들고 곡식이 창고에서 썩더라도 온전히 보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돌았다.

산적 놈들이 죽기에 딱 좋은 때.

화전을 일구었다가는 관인에게 추포당하거나 일제히 쓸려 나간다.

그걸 방치하고 혼자서 도망치려던 전 총채주를 죽인 것이 백담이었다.

모든 산길을 꿰뚫고 그나마 풀칠까지 해 줬으니, 존경을 받는 것이야 당연한 일.

“하지만 점점 상황은 더 안 좋아지겠지.”

백담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얄팍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래 사람이란 그런 거니까.

다만 극단적인 상황이 오지 않게끔 더욱 방책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총채주의 일이었다.

“남궁세가만 아니었어도 급히 움직이진 않았을 텐데……”

백담의 한쪽 눈이 어두워졌다.

여러 이유 때문에 천하에 밝히지 못했지만, 남궁세가에는 큰 어둠이 있었다.

‘칠성의 명가가 설마 녹림을 사칭하고 약탈을 벌일 줄 누가 알았겠나.’

천하가 암운에 휩싸이고 가뭄으로 시름할 때엔 녹림이나 수로채조차도 자중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통행세를 받더라도 대형 표국의 의뢰비에서 일부 정도만.

평범한 상인에겐 자그마한 물건 하나로 끝냈다.

그러나 녹림을 사칭한 남궁세가는 달랐다.

아예 분란이 일어나면 좋겠다는 듯, 무자비하게 산골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백담은 그 의도를 어렵지 않게 예측했다.

‘오해가 풀리기도 전에 토벌할 명분을 만들어, 녹림과 정파가 제 살을 깎아 먹길 원하는 거다. 이쯤 되면 남궁세가는 마교와 연루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하지만 이 말을 누구한테 하겠는가?

녹림이 양인을 약탈해 놓고 명가에게 뒤집어씌운단 소리나 듣겠지.

백담은 지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대호채주, 자네가 남궁세가의 요인을 생포해 오길 바라지.”

그자를 완전히 포박하여 정의맹으로 보낸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리라.

백담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 * *

“녹림이 파렴치한 짓을 벌였다고?”

“본가에서 온 소식으로는 그렇습니다.”

주백경의 말에 서문경은 인상을 찌푸렸다.

큰 오해가 있었다.

차라리 척안룡이 수장인 수로채면 몰라도, 끝까지 마교와 수성하다가 최후를 맞이한 녹림은 주변까지 약탈할 이유가 없었다.

‘녹림이 신출귀몰한 이유가 주변 사람은 기가 막히게 챙기는 건데, 왜 그러겠어?’

서문경의 눈에는 확실한 악인이었다.

주변 마을과 산 사람들에게 금전이나 곡식을 주고 쉬쉬시키거나 자기 아군으로 만드는 꼴이니까.

그러나 토벌령이 내려질 만큼 선을 넘진 않았다.

그놈들이 아주 잘 알았다.

인명은 죽여도 잘 숨기며, 과도한 통행세를 뜯어서 굶주리게 하진 않는다는 원칙.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사는 놈들이 굳이 마교가 준동하는 이때에 ‘날 죽여 줍쇼’ 하고 나서겠는가?

서문경은 혀를 가볍게 찼다.

“어느 지역에서 나온 건데?”

“안휘성입니다. 남궁세가가 있는.”

“출처가 남궁세가라고 이해해도 되나?”

“겉보기엔 남궁세가와 전혀 연관이 없는 곳이지만…… 서문세가가 금의위에 요청한 결과론 남궁세가 측에서 퍼트린 게 맞습니다.”

“……흐음.”

왠지 모르게 뒤가 구리다.

원랜 무림맹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제갈엽에게 남궁세가의 변화를 듣고 곧바로 들어온 특보가 아닌가?

서문경은 마음을 굳혔다.

이대로 무림맹으로 가는 것보다 남궁세가와 정의맹을 둘러보는 게 나을 듯했다.

“제갈 군사. 혹시 나를 대신해서 무림맹에 있을 수 있나?”

“남궁세가로 가시면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새 가주로 옹립된 남궁명의 심기도 아직 잘 모르고요.”

제갈엽의 목소리가 깨나 단호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안휘는 예로부터 남궁세가가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호족이었으니까.

자칫 잘못하면 관도에서 습격당했을 때보다 더한 낭패를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문경은 그보다 더한 난관을 헤쳤던 남자였다.

‘백야흔이 유독 성급한 놈일 뿐, 다른 칠로두가 막 움직이진 않을 거야.’

오래 살았다는 것은 인내심이 길고 신중하다는 뜻.

확실한 승부처가 아니면 뛰어들지 않았다.

그나마 위협이 되는 건 자기 흥미에 따라 움직이는 청마인데…….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신비한 무공사전을 움켜쥐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많아 의존해선 안 되지만, 이만큼 든든한 게 있을까.’

번천광검결만 하더라도 전생에서 넘어온 서문경에게는 아예 별세계 무공이었지만, 몸에 익은 듯 수련하지 않았나.

칠로두와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공사전은 늘 상대의 움직임을 먼저 읽고 가르쳐 주었다.

서문경은 남궁세가의 위협 또한 넘어설 수 있는 벽으로 생각했다.

“괜찮아. 내 한 몸 지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주 무사와 하민이가 있잖아. 제갈 군사야 삼 년 전을 기억하겠지만, 걱정할 만큼 약하지 않아.”

그 말에 주백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가벼운 움직임이었으나 놀라울 정도로 깊은 동공의 파도가 땅거죽을 흔들었다.

“……!”

제갈엽의 눈빛이 달라졌다.

전략을 배우고 무공에 입문한 그이기에 초면의 무인을 가늠하는 시야가 단련되어 있었다.

대오각성이 머지않은 차기 십대고수.

생각보다 젊은 나이에 높은 경지를 이뤘다.

가히 고금제일의 천재로 불리는 서문경에게도 크게 꿀리지 않았다.

“……정말 놀랍군. 서문세가에 이렇게 젊은 신진고수가 있을 줄은.”

주백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보게 군사.”

“……뭣?”

“내 비록 나이는 어리나 서문 공자를 가까이서 모시고 대사부의 직위에 있었던 사람이네. 달리 말하자면 정의맹에 있는 게 아닌 한, 자네 상급자란 소리지.”

제갈엽의 얼굴이 순간 벙 쪘다.

하지만 주백경이 태도를 달리하는 일은 없었다.

군문은 곧 상명하복과 계급의 사회.

여기서 확실히 정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체계가 애매해진다는 것을 알았고, 혹시 모를…… 기 싸움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내 말이 틀린가?”

“아닙니다. 주 무사님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그리 해야지요.”

제갈엽이 주백경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때 주백경은 아차 했으나 뒷말을 수습하진 않았고.

“……어휴.”

이를 지켜보던 서문경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 * *

“서문경이 가깝다고.”

남궁명은 낮은 목소리로 가솔의 보고를 중얼거렸다.

한때는 서문경을 비웃었다.

명가의 핏줄을 타고났으면서 제 발로 차 버리는 꼴이 우스웠으니까.

하지만 누구보다 쉽게 마교의 침입을 척척 알아내는 비범한 무공과 심계가 드러났다.

싸우고 졌다.

부족하던 인망은 채워졌다.

망나니란 사실은 적마와 싸운 이후로 사라지고, 무영신투의 제자이자 진무신검과 친분을 다졌다는 점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언젠가 저렇게 되리라.

동경하는 마음을 품었었다.

금방 부족함을 느껴 버렸지만, 그 과정은 분명 빛나고 값진 나날이었다.

더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몰랐던 것이 후회스러울 뿐.

“……경아, 지금은 널 기다리는 것이 기다려지는구나.”

남궁명은 자기 머리를 틀어쥐었다.

뒤이어 웃었다. 동경하던 친우를 떠올리면서.

“내 손으로 직접 목을 졸라 죽일 시간이 기다려져.”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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