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맹으로 (2)
* * *
“이, 이게 무슨 짓이요!!”
배의 뒷부분에 남궁세가 놈 여럿을 매달았다.
발악한 놈이 없지는 않았다.
황천길로 가서 문제지.
수적들은 이빨을 딱딱거리며 두려워하는 무인들을 보고 시시덕거렸다.
해수(海水)의 안개가 무인에게서 점차 수분을 빼앗고 있으니, 몇 시간이나 버틸까 하는 내기가 한창 오갔다.
“그래도 명가의 무인인데 두 시진은 버티지 않을까?”
“야. 우리 수적대왕님께서 가만히 계시겠냐? 반 시진 안에 폭발해서 작살로 옆구리를 쿡쿡 찔러 주시겠지.”
“어이! 거기! 계속 버티다간 슬슬 피부가 너무 따가워서 죽고 싶어질 거다!”
“두 시진에 걸었으면서 겁부터 주는 거냐?”
“끌끌…… 내기에 이기는 것보다 이게 재밌는 걸 어째!”
수적들은 무인들이 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속칭 수적대왕, 만민에겐 척안룡.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배였다.
다른 수로채면 몰라도, 여기선 명가가 어쩌고 하는 엄포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정작 잡힌 놈이 이걸 몰랐다.
“우, 우리는 남궁세가의 무인이다! 우릴 건드렸다간…….”
“건드렸다간, 뭐?”
저 멀리서 생선구이를 우적우적 씹고 있는 척안룡의 목소리가 안개 사이로 퍼져 나갔다.
내력(來歷)을 알 수 없는 신공에서 빚어진 심후한 공력.
무인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십대고수 중에서 말석이라고 들었거늘…….’
‘척안룡이 이리 강대했던가?’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수적들은 무인들의 표정을 보고 낄낄 웃어 댔다.
“야이, 지조 높은 명가 개X끼들아! 아무리 그래도 총채주가 X으로 보였더냐?”
“뭍에 사는 놈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자기들이 아주 잘난 줄 알아!”
보통 호사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녹림과 수로채의 고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로 자리할 뿐, 실제 무공은 뛰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오만이었다.
적어도 담정이 아는 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으니까.
쓰윽.
담정은 입가에 묻은 기름을 닦아 냈다.
“명가의 무인님. 건드려서 뭐? 끝까지 말해 보시지요?”
“아니, 그게…….”
“인장 가지고 있던 사람은 이미 죽고 없는데, 슬슬 털어놔.”
그 말에 무인들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드러났다.
의외였다.
명가라는 놈들은 죽더라도 자기 가문에 누를 끼치지 않겠단 의지가 가득했으니까.
녹림이 수로채의 구역까지 죽자 살자 쫓아온 이유가 저기에 있을 것이다.
담정의 외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이, 좋게 배 탔으면 안전하게 내릴 생각도 해야지?”
“……이미 늦었어.”
“뭐가?”
“당신이 죽인 사람이 우리 목숨을 쥐고 있었는데, 이미 글렀단 말이야…….”
‘이 새끼들, 뭐지?’
담정은 이런 반응을 평생에 걸쳐서 여럿 보았다.
하나는 거대 상단의 물건을 털어서 도망치던 장물아비였고.
또다른 사례론 가문을 잃은 고아들을 데려다가 사교에 판 흑도의 하부 조직이었다.
이새낀 아예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흑도의 본부까지 털어서 말이다.
‘명가의 무인이 아니라 어디 음지서 굴러먹던 쓰레기도 아니고.’
담정은 조용히 물었다.
“뭐, 본가한테 협박이라도 당하시나?”
“말할 수 없어.”
“남궁세가의 본원이 칠성(七星)을 보고 국난과 국원을 셈하던 명가로 알고 있는데…… 그토록 역사 깊은 곳에서 왜 더러운 짓을 했을까?”
“……!”
무인들의 눈이 커졌다.
그저 수적 떼의 대장으로 알고 있던 담정의 학식이 뛰어난 데다, 아픈 부분을 찌르고 있었다.
수치심이 목까지 치밀었다. 욱하는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어디 도적놈이 남궁세가를 함부로 말하느냐!”
“도적놈? 하하, 애들아. 도적놈이란다.”
담정은 고개를 돌려 부하들을 흘낏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자 가장 험상궂고 상처가 많은 부채주가 하늘을 향해 껄껄 웃어젖혔다.
“하이고, 남궁세가가 그리 귀한 가문이신 줄 알았으면 줄이 아니라 침대에 눕혀 줄 걸 그랬네!”
“네놈이 누구기에 감히 능멸하느냐!”
“하하…… 나 말이냐?”
부채주는 조용히 무인에게 다가가 몇 마딜 중얼거렸다.
무인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놀람보다 경악에 가까웠다.
“아니, 그리 귀한 피를 이은 사람이 왜 여기서…… 도적놈이 되어서…….”
“글쎄다. 태조께서 워낙에 성격이 지랄 맞으셨나 보지.”
부채주는 끌끌 웃으며 무인의 얼굴을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긋고 찔러 댔다.
언제든 자기처럼 될 수 있다는 듯.
얼굴의 상처를 똑똑히 보라며 중얼거렸다.
“도적놈이 처음부터 도적이겠냐? 살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 내 듣기로 우리 총채주께서도…….”
“야 이 새꺄. 아주 안 할 말까지 해 주지?”
담정의 말에 부채주가 서둘러 말을 고쳤다.
“크흠. 어쨌든 말만 잘하면 우리 패에 껴 주고…… 뭐…… 살 길이 아주 닫혀 있진 않다는 거지.”
“……뭐?”
“듣지 마라! 저런 도적놈이 되어서 평생을 살고 싶으냐!”
부채주가 속삭인 유혹에 무인들끼리 지지고 볶기 시작했다.
이를 본 담정이 눈을 슬쩍 찡긋거렸다.
안개에 눈이 익숙한 자만이 볼 수 있는 수신호였다.
부채주가 곧바로 호응했다.
“파도가 높다! 모두 선실로 들어가라!”
“하던 일 모두 멈춰!”
수적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내기판은 은근슬쩍 자기들끼리 옷 속에 숨긴 지 오래였다.
그사이에 무인들은 자기가 만들어 낸 공포에서 휩싸여 있었다.
“우, 우리는!”
“당장 풀어 주시오! 선실에 가게 해 주시오!”
“니들 안위가 우리 알 바냐?”
담정은 등을 돌렸다.
여기서는 정말 뒈져도 상관없다는 듯 아무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눈을 가리긴 했지만, 뭐…… 명가의 무인이라면.’
남 몰래 갈고닦은 기감쯤은 있지 않겠나.
담정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자, 잠깐! 나만은 풀어 주시오! 말할 게 있소!!”
“뭐?”
“선실에만 들여보내 주면 진짜 모두 말하겠소!!”
“귀가 먹어서 그런지 잘 들리질 않네.”
“본가에 마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방문했습니다!”
그 말에 담정이 제자리에서 멈췄다.
남자라면 청마나 적마, 아직 세간에 드러나지 않은 칠로두가 많았다.
하지만 담정의 귀에는 남자라는 단어가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
“검, 검은 나비 장식의 비녀를 하고 있었습니다!”
검은 나비.
그 말에 담정의 머릿속에서 수십 년이 흘렀다.
헤집어졌다는 단어가 정확했다.
그밖에도 여러 단어가 떠올랐다.
울분과 분노, 절망과 한.
어느 단어로도 마땅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한데 모였다.
검은 나비가 뛰노는 듯한 장발의 여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어느새 담정은 무인의 안대를 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
“…….”
무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담정의 얼굴에서 비쳐지는 감정은 언뜻 보면 공허했지만, 무시무시한 살기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일부러가 아니라 도저히 숨길 수가 없어서.
심살(心殺)에 가까운 기운이 무인의 머리를 조였다.
중간에 부채주가 끼지 않았다면 진즉 죽었을 터였다.
“총채주.”
“…….”
“진정하시오. 사람 죽겠소.”
“아, 그랬냐. 가끔 정신이 빠져서.”
담정은 실실 웃었다.
언제 살기를 흩뿌렸냐는 듯,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하지만 무인은 도저히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대체 그 여자와 무슨 사연이 있기에?’
무인이 본 남자와 여자는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 아니, 견원지간에 가까웠다.
여자가 수다를 떨면 남자는 말도 섞지 말라고 정색했으니까.
기억을 차츰 떠올리던 무인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여자는 청색의 옷을 입은 남자와 함께였고…… 이름은 듣지 못했습니다. 떠오르는 것이라곤 장발과 검은 나비 장식이 달린 비녀였습니다.”
“누굴 찾아온 거였지?”
“남궁세가의 가주십니다.”
“그 어린놈한테?”
“…….”
무인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전대 가주인 남궁서겸이었다면 모욕을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 남궁명은 명백히 이상했다.
당장 지금 이 꼴을 보라.
삿된 명에 따르다가 녹림에게 쫓기고 수로채에게 붙잡혀 있지 않나.
무인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저, 저희는 사실…….”
“사실 뭐.”
“……가주의 명을 받고 녹림을.”
거기까지 말했을 때.
무인의 얼굴에 검은색 반점이 올라왔다.
“커헉, 컥!”
“이런 씨X!”
담정은 곧바로 무인의 등에 손을 대었다.
대해와 같은 기운이 기혈을 타고 올라갔다.
상단전에 불순한 사기가 맺혀 있었다.
검은 나비였다.
아름다운 문양을 날개에 품고서, 담정의 기운을 날갯짓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 여동생에게 야생화를 따다 주던 어릴 적 추억이, 고관대작을 연거푸 배출하던 유복한 가문의 안온함이.
그리고 횃불과 칼을 들고서 깔깔 웃어젖히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파직!
검은 나비가 형체를 잃고 터져 나갔다.
담정은 무인의 등에서 손을 떼었다.
외눈으로 참상을 보았다.
“…….”
배의 뒷부분에 매달았던 남궁세가 놈 모두 숨이 끊어졌다.
남은 흔적이라곤 뺨에 남은 검은 반점이니.
부채주가 담정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총채주.”
“……알아.”
저 말에 대답은 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알긴 뭘 안단 말인가.
수십 년을 바치고도 아직 쥐뿔도 모르는데, 우연히 잡은 남궁세가에게 단서를 찾은 것이 기쁘고도 비참했다.
‘날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담정은 저도 모르게 왼눈의 안대를 매만졌다.
좌도의 주박에서 벗어날 정신력.
그래, 그녀가 그리 말했다. 의지와 정신력을 주겠다고.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흘렀다.
남들이 십대고수로 치켜세울 만큼 강해졌으나, 살 시간이 줄어들수록 집착이 남았다.
“부채주야.”
“예.”
“너도 언젠가 대장 노릇해야지. 그치?”
“떠나고 싶으면 무공이나 전수해 달라니까요.”
“그게 다 네가 대가리가 멍청해서 그런 거잖아.”
“제가요? 허, 누구보다 귀한 가문에서 자라…….”
“염병할. 나도 그래.”
“거짓말이 심하시네. 누구보다 감정이 앞서고 생각 없으신 분이면서.”
부채주의 말에 다른 수적들이 껄껄 웃었다.
그래서 담정도 웃었다.
무인들의 시신은 그대로 배 위로 옮겼다.
정의맹과 서문경에게 보여 줄 작정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