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맹으로 (1)
바로 다음날.
터엉!
짐마차에 종이 뭉치가 쌓였다.
서문경은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높이를 셈했다.
대충 두 치하고도 반. 최소한 삼십 장은 넘었다.
“이게 뭡니까?”
“아, 이거 말이지요.”
제갈엽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밤을 새웠는지 눈이 퀭했다.
“출발하기 전에 열의를 내봤는데…… 생각보다 길어졌습니다.”
‘열의 두 번 냈다가는 사람 잡겠네. 애도 아니고.’
제갈세가에서 벗어난 것이 그리 기쁘고 복잡했던 걸까?
어쩌면 자기 쓰임새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서문경은 짐마차에 걸터앉아 종이 뭉치를 하나하나 넘기기 시작했다.
“앗…… 중간에 멈추면 제가 엮어서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괜찮습니다. 이게 더 편해서.”
전생에선 줄로 엮어서 오기는커녕, 글씨라도 온전하면 다행일 정도였으니까.
스륵, 스륵.
첫장 개론(槪論)을 이해하는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두세 장을 넘기고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오호.”
서문경은 탄성을 흘렸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동향, 대명에서 삼악(三惡)으로 규정한 세 외적에 대한 정보와 예측도가 상세했다.
북적의 적성.
남만의 야수궁.
왜구에 속하는 구두룡까지, 성심성의가 느껴지는 분석이었다.
그러다 남궁세가에서 시선이 멈췄다.
“제갈 군사님.”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제갈 군사, 여기 적힌 게 사실인가?”
서문경의 손가락이 한 대목을 짚었다.
-남궁명이 가문의 주인이 된 이래로 두문불출하나, 흑도와 연관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마교와의 접선을 의심해 볼 만하다.
“예. 남궁세가주와 동기셨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제가 아는 한 남궁명 가주는 정의맹에게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음.”
서문경은 침음성을 흘렸다.
천무학관에서 본 남궁명은 혼자 있길 즐기기는 했지만 늘 똑바른 태도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릇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서, 감시망에 넣지는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교가 주는 유혹이란 가볍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전생에선 어땠었지?’
남궁세가는 남궁서겸을 주축으로 정의맹에 뒤늦게 합류했다.
얌체 같은 면이 있긴 했지만, 뒤통수를 치진 않았다.
그렇다면 남궁명은 어떤가?
서문경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전생에선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아는 바라곤 내가 직접 본 것뿐인가.’
너무 낙관했던 걸까?
서문경은 남궁명에게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아직 제갈엽의 정보를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예 없는 소린 아닐 터였다.
턱.
종이 뭉치를 다시 순차로 정돈하고서 주백경을 불렀다.
“주 무사. 엽 군사와 함께 적힌 내용을 정돈하고 요약해서 본가에 보내 줘.”
“예. 알겠습니다.”
대답은 똑바르지만, 주백경의 시선에는 마뜩찮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기껏해야 제갈세가 안에서 애나 가르치던 서생의 사견(私見)이 뛰어나겠냐는 의심.
그건 머지않아서 씻겨 내려갔다.
“……오, 혼자서 이렇게까지?”
“예. 서문세가의 대사부께서 보시기에 어떨지 부끄럽습니다만.”
“제가 대사부였다는 건 어찌 아십니까?”
“천하에 주백경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를 수가 없지요.”
그 말에 주백경의 웃음이 짙어졌다.
-공자님, 이 서생이 보는 눈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말했잖아. 명망이나 명성이 깎여 있을 뿐이라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야.
거기까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제갈엽이 불쑥 물었다.
“한데…… 공자님께선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글쎄.”
서문경은 확답하지 못했다.
제갈엽의 사견을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진 참이었다.
‘원랜 가장 가까운 무당파로 가려고 했는데…… 정의맹의 본단을 세운 곳이 남궁세가 근처였지 않나?’
찝찝함이 머릿속에 감돌았다.
감을 신뢰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번 생에선 틀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쪽으로 가면 무림맹과 멀어지게 된다.
낭왕과 후일 합류하고 무림맹주에게 힘을 실어 주기로 한 약속을 미루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서문경은 팔짱을 끼고서 서쪽과 남쪽을 바라보았다.
* * *
장강 한복판의 검은 배.
“얼씨구, 저 새끼들 뭐 한대?”
척안룡 담정은 젓가락을 질겅거리다가 한 무리를 발견했다.
익숙한 상판대기가 있는가 하면, 허여멀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놈들도 있다.
담정을 따라서 고개를 앞으로 쭉 늘린 수적이 대답했다.
“한쪽은 산적 놈이고 한쪽은…… 정파 같은데요?”
“산적 놈? 진짜 녹림?”
“예. 가짜 말고 진짜요.”
“아, X발. 요즘 세상이 지랄 맞으니까 내가 녹림이요 하는 새끼들이 워낙 많으니까 자주 헷갈려. 그지?”
“이럴 때 우리가 많이 해먹을 수 있는데…… 쩝.”
그 말에 담정이 수적의 뒤통수를 딱 소리 나게 때렸다.
“새꺄. 씨가 남아 있어야 나중에 어? 수확을 하고 배불리 먹는 거지, 마교가 있으면 안 남는다니까?”
“거 서문 씨 애새끼한테 감화되신 거 아뇨?”
“에이. 내가 설마.”
퉤.
담정은 씹고 있던 젓가락을 뱉었다.
차마 부하한텐 이야기하지 못할 뿐, 서문경에게 기대하는 것과 함께하는 뜻이 있었다.
전자와 후자는 완전히 달랐다.
지극히 공적인 대의와 개인적인 용무의 차이였으니까.
이번 일은 전자였다.
“배 돌려라. 저기 정파 놈이나 구하자.”
“예에? 언제부터 우리가 도적이 아니라 협객으로 업종을 변경한 겁니까?”
“아가리는…… 야!”
“아이고 외눈깔 새끼 지랄병 도지셨다.”
수적이 끌끌 웃으며 깃발을 휘둘렀다.
그러자 한산했던 갑판이 부산해졌다.
제각기 노를 젓기 위한 위치로 달려가는 소리로 분주했다.
“좌현! 땅에 갖다 박을 각오로!”
“좌현!”
촤르르륵!
돛이 펴졌다.
검은 배, 척안룡이 타고 있는 선박은 강호에서 제일 빠르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서로 쫓고 쫓기는 무인일지라도 능히 따라가며…… 배의 주인은 장강에서 제일 강하다고 불리는 무인.
척안룡 담정이었다.
“어이, 더 빨리!”
담정은 노잡이를 채근하면서 오른손으로 작살을 쥐었다.
쐐기꼴의 날과 반대편에 달린 줄.
적을 죽이고 회수하기 위한 형태였으나, 단 한 가지가 달랐다.
꽈아악…….
담정의 손바닥이 부드럽게 파고드는 철제 손잡이.
오직 단 한 사람의 악력을 이겨내기 위한 특제였다.
담정의 공력이 물밀 듯이 작살로 모여들었다.
“더, 더!”
담정의 눈이 거리를 셈했다.
배가 다가가는 속도와 무인들과의 거리.
그것이 머릿속에서 점차 구체화하기 시작했을 때, 산적 쪽에서 담정을 알아보고 기겁했다.
“야! 개눈깔! 오지 마!”
“새끼가 나한테 뭐?”
“오해다! 던지지 말고 일단 듣기라도 해 봐!”
“해봐?”
가만히 듣자 하니 말이 너무 짧지 않나.
담정은 산적의 무례를 작살로 단죄했다.
쐐애애액!
전력을 다해 내던진 작살이 산적 떼를 향해서 날아갔다.
양옆으로 일제히 갈라지는 수면에서 작살의 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산적 떼의 얼굴이 노랗게 물들었다.
“에이 X발! 산개해! 그 작살이다!”
꽈아앙!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작살이 산적 떼 중앙으로 내리꽂혔다.
시체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추격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아악!”
“씹…… 악독한 새끼…….”
작살이 땅에 꽂히며 튕겨 나간 철제 파편.
담정의 힘을 견디면서도 강한 충격을 받으면 사방팔방으로 쪼개져 날아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산적들은 파편에 얻어맞은 등과 다리, 허벅지를 부여잡은 채 산으로 기어 들어갔다.
“하, 꼴좋다.”
담정은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나 산적 놈은 산으로 돌아가야 어울리는 법이다.
그러다 저놈들에게 쫓기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어이, 거기!”
“……예?”
“나다 싶으면 바로 대답이 재깍재깍 나와야지. 야! 너네 누구야!”
“아…… 저희는.”
무인들은 담정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대답했다.
“남궁세가입니다.”
“왜 눈치 보냐? 사칭하는 거냐?”
“아, 아닙니다! 여기 징표도 있습니다!”
무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남궁세가의 인장을 꺼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이했다.
‘명가의 무인이란 새끼들이 왜 강변까지 쫓겼지?’
굶다 못해 산적이 된 놈도 아니고, 진짜 녹림 소속의 산적이 강변까지 쫓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남 영업장.
그것도 수로십팔채의 구역까지 내려왔다가는 큰 싸움을 벌여야 했으니까.
담정의 한쪽 눈이 가늘어졌다.
“어이!”
“예!”
“저놈들한테 뭐 죄라도 지었어?”
“그게…… 가주님께서 주변을 정돈하라고 해서…….”
“아하, 도망치셨다?”
“…….”
그 말에 무인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워서 몸을 비트는 것이 훤히 보여서 담정은 피식 웃었다.
그제야 이해가 되는 점이 하나 있었다.
‘왜 거지꼴인가 했더니만, 산적한테 지셨다?’
담정의 머리가 영민하게 돌아갔다.
산적이 오해라고 울부짖었던 점, 수로채의 구역까지 내려온 이유, 무인들의 꼬라지.
‘이 새끼들…… 누굴 호구 새끼로 보나?’
숨기는 것이 있다.
그것도 아주 구린 것이.
이럴 줄 알았으면 산적을 쫓아내는 게 아니라 이유를 들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정은 산적이 오해를 풀지 않고 도망친 이유까지도 유추했다.
‘얘들이 뭔 짓을 했고, 내가 구하면 같이 엮어 버리겠다, 뭐 이런 건가?’
무료한 일상에 재미가 한 가지 추가되지 않았나.
담정은 부채주를 불러서 간단히 말했다.
“저 새끼들, 거꾸로 매달 준비해.”
“예.”
“우린 호구처럼 쟤들 구하러 가는 척이나 하자.”
“애들 입단속 잘 시키겠습니다.”
부채주는 히죽 웃었다.
저 멀리서 눈치를 슬슬 보면서도 수적의 도움을 받으려는 무인들이 보였다.
골수까지 빼먹을 놈들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