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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무공사전-154화 (152/250)

제갈세가 (3)

봉천승운황제조왈(奉天承運皇帝詔曰).

“하늘의 뜻을 받아 황제가 조한다.”

바둑을 두던 장난기는 싹 지웠다.

서문경은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칙서의 첫 줄을 읽었다.

대명의 천자.

황제를 대신하여 온 자로서 두 무릎을 꿇은 제갈천과 제갈엽에게 눈을 부릅떴다.

“맨눈으로 태양을 볼 것인가?”

“……!”

제갈천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머리까지 푹 숙였다.

땅바닥에 닿을 듯했지만, 굴욕보다는 호기심이 들었다.

‘뭔 놈의 기세가…….’

전령(傳令)을 하기엔 너무 어리고, 강호에 돌아다닌 시간이 길다.

서문경의 내력은 충분히 알아두고 있다.

칙서를 들고 나타난 방식이 세련되진 않았지만, 황제의 대리자로서 책무를 다하는 모습이 자못 대단했다.

‘아니, 이러려고 바둑을 두자고 한 건가?’

처음부터 황제의 칙서를 가져왔다고 했다면 만나 주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제갈세가가 호기심을 느낄 바둑으로 도전했다.

어린 것이 기껏해야 얼마나 뛰어나겠나, 콧대를 콱 찍어 눌러 버리겠단 심정으로 승낙하기도 했다.

한데 지금은?

바둑을 이기기는커녕 황제의 칙서를 든 서문경에게 두 무릎을 꿇고 머리까지 숙이고 있지 않나.

제갈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속에서 천불이 끓어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상대는 서문경이었다.

“이놈! 하늘을 받들어 모시지 않을지언정, 두 무릎을 꿇은 것이 그리도 부끄러웠느냐!”

“갑자기 웬 억지를 부리는가?”

“억지는 무슨! 양양부의 지부대인과 결탁하여 눈속임으로 명(命)을 미루려는 것이 훤히 보인다! 설마 모를 줄 알았느냐?”

‘허, 저놈이 어떻게 알았지?’

둘이서 만나기는커녕 제갈세가와 하등 상관없는 양민으로 연락을 주고받았거늘.

가문에서 정보가 새진 않았을 것이다.

필시 지부대인이 전황이 빠르게 변화하는 걸 보고 손바닥을 뒤집었을 테지.

제갈천의 한쪽 입술이 비틀어졌다.

‘그렇다면 우리의 꼬리가 잡히지는 않을…….’

“의성 현의 필부(匹夫)로부터 이중삼중으로 거미줄을 쳐 놓은 것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태양이 만상을 굽어보고 있음을, 학식을 쌓은 네가 몰랐다고 하지 않을 터!”

촤악!

서문경은 칙서를 바르게 폈다. 몸가짐 또한 가지런히 했다.

물결에 흐름이 있다면, 지금은 빠르게 몰아쳐야 할 때.

서문경의 전신에 장강과 같은 공력이 높은 파도를 그렸다.

“제갈세가의 가주, 천은 들으라!”

“……!”

“대명의 하늘이 어지러워진즉, 지금껏 한(漢)과 맞서 싸운 외적이 한데 뭉쳐 국난(國難)을 일으키려고 하니, 통탄스러운 심정이다. 깊이 고민한 결과 서문의 장남인 경(經)에게 선봉으로서 길을 트라 일렀으니 땅에 있는 자들은 따르도록 하라!”

이를 알고, 명에 따르라.

간단한 흠차 아래에 옥새가 찍혀 있었다.

제갈천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드는 듯했다.

제아무리 깊고 어두운 우물을 파도 태양 앞에서는 저 속이 훤히 들춰지니까.

암계의 달인도 결국 천자의 이름 앞에서는 무용했다.

제갈천이 식은땀을 뚝뚝 흘리는 모습에.

“……허.”

제갈엽은 너무나도 우스워서 속으로 끌끌 웃었다.

누구보다 두려워하던 가주의 얼굴이 추했다.

너무 추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대체 뭘 두려워하고 있었던 건지.’

우물의 주인한테 밉보였다고 여태껏 끙끙 앓았던 것이 한심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태어나고 자란 터전에서, 은연중에 묶여 있었던 건 서문엽 자신이니까.

위대한 선조이신 제갈무후(제갈량)와 같은 핏줄이라는 자긍심 또한 가만히 안주하게 했다.

그래서였다.

지금 떠올린 변명은, 제갈엽 자신이 생각해도 추했다.

바로 옆에 있는 제갈천의 식은땀이나 굳은 얼굴보다도…….

‘누굴 탓할 게 아니구나. 애초에 썩어 빠진 게 나였으니.’

“이제 일어나도 좋습니다.”

서문경의 목소리에 이어 두루마리를 끈으로 동여매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제갈천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식은땀을 흘렸냐는 듯, 얼굴색은 잘 수습했지만 당황한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찾아왔나?”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이, 이건…… 황상의 힘을 자기 멋대로 이용하는 걸세! 정식으로 황실에 여쭈어……”

“아하, 시간을 끄시겠다.”

서문경은 히죽 웃었다.

“이 혼란한 시기에 반역을 일으키겠다니 심장 한번 단단하시군.”

“그으…… 무슨……”

제갈엽의 머리가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해도 칙서의 내용이 문제였다.

대명의 선봉.

천무검왕 서문경.

그에게 따르지 않으면 황제의 명에 반하는 것이니, 제갈세가가 본보기가 되어 불탈 가능성이 컸다.

어디 그뿐이랴?

제갈엽은 후인의 평가와 시선이 무서웠다.

“제갈무후의 후손인 우리가 반역이라니! 헛소리하지 말게!”

“혀가 자꾸 기시오.”

서문경의 눈초리가 한순간 사나워졌다.

우물 안에서 나온 개구리를 노려보는 뱀.

그와 다를 게 없었다.

제갈천에게 서문경은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였다.

“삼, 삼 년 동안 우리도 다른 권문세가를 설득하느라 시간이 걸렸을 뿐일세. 그 점만은 양해를 부탁하네. 아, 그랬지. 그 협상을 엽이가 담당했었네.”

“…….”

서문경은 허둥지둥하는 제갈천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척 봐도 거짓말.

제갈엽에게 죄과를 뒤집어씌워 책임을 피하려는 의도가 훤히 보였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본인이 움직이지도 않았기에.

“엽이 이놈! 왜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게냐!”

제갈천의 눈이 커졌다.

칙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이후로, 제갈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가만히 이마를 땅에 박은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면 이렇게 움직일 테니.”

“뭐하는 거냐! 네가 해명을 해보아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제갈천이 제갈엽의 어깨를 붙잡았다.

강제로 일으켜서 거짓말이라도 시킬 작정이었지만, 제갈엽은 이미 뜻을 굳혔다.

“집을 떠나겠습니다.”

“……뭐?”

“눈앞의 서문 공자를 주군으로 모시려 합니다. 지금의 예(禮)는 충성을 맹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탁, 탁.

제갈엽은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제갈세가의 먼지였다. 오래되고 정든 먼지였으나, 지금은 퀴퀴하고 걸리적거릴 뿐이었다.

“어차피 한직으로 팽하셨으니 가주께서 아쉽게 생각하진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서문세가의 권세가 언제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느냐?

제갈천의 전음에서 독살스러운 말투가 느껴졌다.

지금 당장은 칙서의 권위에 숙이지만, 언젠가 굴욕을 되갚겠단 의지가 충만해보였다.

그러니 서문경에게 충성을 맹세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제갈엽은 서문경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여기 있는 제갈세가주의 심계는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압니다. 최하위 군사로만 등용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여 서문 공자님을 모시겠습니다.”

“최하위? 정(丁)급 말인가?”

“예. 신뢰를 차차 쌓아가겠습니다.”

그 말에 서문경이 즉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갑(甲)급으로 시작해.”

“……예?”

제갈엽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자신을 노려보던 제갈천조차도 두 눈을 크게 떴다.

삼 년 동안 행동을 미적거리던 오대세가 출신의 사람을 처음부터 일등 군사로 등용하다니?

사실상 정의맹의 부맹주나 다를 바 없는 자리를 턱하니 내주는 건 되레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제갈엽은 반문을 가지지 않았다.

감지덕지였다.

“믿음을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쓸모를 다해야지.”

“……이번?”

제갈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둔 바둑도 그렇고,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는 주군이었다.

* * *

“반발이 심할 겁니다.”

“뭐가?”

“오대세가, 그것도 천무학관의 무사부였던 제갈엽을 일등 군사로 등용하면 말이 많을 겁니다.”

주백경의 말에 서문경이 피식 웃었다.

평소처럼 여유로운 웃음이었지만, 어딘가 이질적이고 억지로 웃는 것 같았다.

“주 무사.”

“예.”

“제갈엽이 뛰어난 지모를 가진 사람이긴 하지만, 반발을 잠재울 만큼 명망이나 명성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야.”

“……예? 공자님께서 덜컥 데리고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주백경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억지를 부려가며 데려온 장본인이 할 말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서문경의 얼굴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사람들이 말이야. 독종이 모인 결사대를 좋아할까, 어딘가 비빌 구석이 있는 동맹을 좋아할까?”

“저는……”

“주 무사야 당연히 전자겠지. 독종이잖아. 누구 앞에서도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가 않아.”

서문경은 씁쓰레한 얼굴로 말했다.

어딘가의 호사가는 생각할 것이다.

코앞에 마교가 다가오면 반드시 총력을 기울여 싸울 것이라고, 그때가 되면 똘똘 뭉칠 거라고.

하지만 그땐 너무 늦는다. 전생에서 경험한 뼈아픈 실책이었다.

서문경의 시선이 주백경에게 향했다.

왠지 모르게 불만이 많아보였다.

“서문세가가…… 정의맹이…… 부패한 곳처럼 보이게 하시겠단 겁니까?”

“부패는 아니지. 다만, 줄 댈 곳이 있으면 조금 더 괜찮은 직위를 받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까지만 품게 하면 돼.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관인과 군문이 있다지만, 그럭저럭 규모가 있는 문파나 가문이라면 대접 좀 받겠구나.”

“…….”

“왜, 싫어?”

“예.”

“세상사 다 어디 청렴하게만 살겠나. 이건 가주님이나 황상께서도 허락하신 거야.”

“…….”

주백경의 눈시울이 천천히 붉어졌다.

믿어왔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했다는 것처럼 보여서, 어이가 없었다.

“뭐 그리 질질 짜려고 그래?”

“외적과 손을 잡은 마교를 죽이겠다는 대의에…… 이런 파렴치한 계산까지 끼어야 한단 말입니까?”

주백경은 주먹을 꽉 쥐었다.

목소리도 파르르 떨렸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견고히 만든 정신에선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자리를 보전하고, 완장 하나에 거들먹거리는 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

“공자님께서 줄곧 고민해서 나온 최선의 답이라는 걸 압니다. 제갈엽의 지모야 강호에 소문이 파다했었고, 급히 들여올 군사로서 제격이지요. 하지만…….”

“주 무사.”

서문경은 주백경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는 소가주에서 내려온 자신에게 아무런 보상 없이 충성을 바쳤다.

무림인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걸 알면서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아둔하면서도 주백경다웠다.

“처음에는 위험부담이라고 말했지만, 앞으로 정의맹에 합류할 속도나 추세를 생각하면 그 정돈 아무것도 아니야. 뭐, 파렴치한 계산이라고 할 수 있지.”

“……죄송합니다. 파렴치하다고 말하는 게 아닌데.”

“파렴치한 건 맞지. 눈치 살살 보다가 젊은 놈끼리 해먹을 것처럼 보이니까 자기들도 몸 비집고 오는 거니까.”

서문경의 시선이 제갈세가의 가주실로 향했다.

제갈천이 섭선을 신경질적으로 폈다 접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야 자존심이 상해서 씩씩대고 있겠지만, 제갈세가에서 손해 볼 이야기가 아니니까 조용히 침묵하겠지.’

제갈세가의 뛰어난 인재가 정의맹에 등용.

제갈천이 이 사실을 파문으로 둔갑시킬 이유가 없다.

오늘의 무례를 기억하겠지만, 바깥에 유출하는 일은 없겠지.

가주란 그런 것이니까.

서문경은 조용히 발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엊그제 비가 와서 그런가?”

진흙이 조금 질척거렸다.

파렴치한 계산과 속물에 가까운 거래가 한순간 오간 이날.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정의맹의 몸집을 키우는 데 이만한 떡밥은 없었다.

아니, 이래야만 대인(大人)이 될 수 있다.

‘전생에선 주 무사처럼 생각했다가, 쳐 낼 사람을 쳐 내고 나니 정작 인재가 없었지. 마교가 밀고 들어오니 끝내 합류했지만…… 그땐 늦었고.’

너무 맑기만 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서문경은 정의맹에 제갈엽이라는 뛰어난 떡밥을 넣고서 조용히 웃었다.

“뭐, 제갈엽을 제갈세가와 연을 끊어 놨으니 주 무사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예. 적어도 제갈세가에 휘둘리지는 않겠지요.”

주백경은 겉을 보고 속까진 알지 못했다.

서문경이 전생에서 크게 후회했던 한 가지를 되돌렸음을.

제갈엽의 지모가 생각보다 더 뛰어났고, 제갈천의 협잡질에 가려져 있었다는 것 역시.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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