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53화 (151/250)

제갈세가 (2)

유난히 특별한 날이었다.

탁, 탁, 탁…….

가로세로 열아홉 줄.

검은 선이 종횡으로 그어져 있는 바둑판을, 예로부터 문사들은 천하로 비유하곤 했다.

여덟 개의 화점과 돌로 집을 지으면 생기는 점수.

그 자체로 전쟁에 대입할 수 있었다.

자연히 제갈세가에서도 몇 안 되는 놀잇거리로 자리 잡았다.

그들 중 최강의 고수(高手)인 제갈세가주, 제갈천이 흰돌을 매만지고 있었다.

“……으음.”

오랫동안 깊이 생각했다.

제갈천의 미간이 찌푸려진 채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바둑판이 다섯이고 화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첫 바둑판은 좌상을, 두 번째는 정중앙을, 세 번째는 흑돌이 화점을 넷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불리한 전장과 유리한 전장이 각각 다르고 흑돌의 형세 또한 종잡을 수가 없다.

이 점이 제갈천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엽아.”

그 말에 다섯 바둑판의 대국을 지켜보고 있던 제갈엽이 대답했다.

“예, 가주님.”

“너라면 둘 수 있겠느냐?”

“……어렵지만 한번 해 보겠습니다.”

제갈엽은 공손히 대답했다. 속으로는 죽을 맛이었다.

제갈세가에서 가장 심계가 어둡고 깊은 사람의 심기를 파악하고 둬야 했으니까.

신중을 거듭해서 제갈천이 예상할 수 있고 흡족해할 수를 찾았다.

조약돌이 수없이 깔린 해안에서 외견이 비슷한 몇 가지만을 주워야 하는 과정이었다.

탁, 탁…….

제갈엽의 흰돌이 다섯 바둑판을 두드렸다.

어떤 수는 가볍고 경쾌했지만, 뒤로 갈수록 무거웠다.

이 모두가 흑돌의 심계를 흩뜨리기 위한 변칙이었다.

“흠, 이런 수. 흐음.”

흑돌의 주인은 척 보기에 비밀이 많아보였다.

제갈세가의 가솔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조악한 인피면구에, 노인인 척하기 위한 음공(音功).

‘가주께선 왜 이런 자를 가주실까지 출입시켜 주신 거지?’

제갈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흑돌의 인피면구 아래로 증명된 손님임을 증명하는 패가 줄에 매달려 덜렁거렸다.

“자, 이제 내 차롄가!”

노인인 척 인피면구까지 써 놓고서 갑자기 호기로운 목소리를 내는 흑돌.

잠시 얼척이 없었으나, 그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허. 절묘하군.”

수많은 바둑판을 보아 온 제갈천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주의없이 자기 속내를 털어놓을 만큼 거칠게 놓인 다섯 흑돌이 제갈엽의 수를 파괴했다.

행마로 파훼하려면 두 수, 포석으로 되살리려면 세 수.

그만한 차이가 한순간에 벌어졌다.

흑돌의 기력(棋力)이 제갈엽보다 앞선다는 방증이었다.

“허허, 어떠신가? 대응할 수 있겠나?”

언제 호기로운 목소리를 냈냐는 듯, 흑돌은 다시 늙수그레한 웃음을 머금었다.

문제는 저 인피면구가 워낙 조잡하여 피부 이곳저곳이 접혔다.

‘자기도 문제가 있다는 걸 알 텐데!’

대범한 건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제갈엽은 웃음을 머금은 채 흑돌에게 물었다.

“이보시오. 당신 얼굴이 이상하오.”

“허허…… 내 얼굴이 뭐가 어때서 그러나?”

“아니, 피부가 접혔단 말이오.”

“사람 얼굴 가지고 그렇게 타박을 줘서야, 쯧. 그리 살면 안 되네. 젊은 양반이…… 쯧.”

“…….”

제갈엽의 이마에 핏대가 올라왔다.

가주 앞에서 놀림을 받는 거야 참을 수 있지만, 저렇게 우스운 사람에게 지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은 변명이었다.

‘흥미로워.’

각기 다른 판세로 이루어진 다섯 대국.

첫 상황부터 다르게 주어져서, 한 사람이 대응하기엔 너무나도 불공평한 대국이다.

누가 봐도 이런 바둑을 제시한 흑돌이 유리해 보였다.

며칠 전부터 대국을 구상하고 상대의 수를 예상해 왔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제갈엽은 선입견에 얽매지 않았다.

“언제 이런 대국을 경험한 겁니까?”

“뭐라 했는감?”

“이건 저와 겨루기 위한 바둑이 아니라, 복기(復棋)가 아닙니까?”

“…….”

흑돌이 침묵했다.

표정은 인피면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제갈엽에겐 확신으로 다가왔다.

“자랑은 아니지만, 제 수가 가볍진 않습니다. 한 번 보고 반응할 정돈 아니란 거지요.”

“오만이 너무 심……”

“하지만 귀하께서는 미리 알고 두었습니다. 필시 이런 대국을 경험한 뒤 몇십 번이고 곱씹어야 나올 반격입니다.”

제갈엽의 시야는 넓었다.

어렸을 때부터 진법의 천재라고 불릴 만큼 직선 하나도 일(一)이 아니라 점(.)으로 보았다.

가까이가 아니라 더 멀리, 창공을 나는 독수리처럼.

이번 대국도 마찬가지였다.

얼핏 보면 서로 다른 다섯 바둑판처럼 보여도 조금씩 연관되는 점이 있었다.

제갈엽은 흑돌을 직시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귀하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전쟁을 다섯으로 나누어서 펼치지 않았습니까?”

아직 벌어지지 않은 전쟁.

그 말에 제갈천의 눈이 커졌다.

제갈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마교, 마교와 정의맹을 위시로 한 대명의 전쟁 말인가!”

“…….”

흑돌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에 제갈엽이 배시시 미소 지었다.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천연덕스럽게 미리 둬 본 사람처럼 대응하고, 반격하고, 역으로 제 수를 잡아먹고 있으니…… 어쩌면 그 상대가 저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돕니다.”

“비약이 심하군.”

“오만이 심한 거겠지요. 이런 수를 저만이 둘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탁, 탁.

제갈엽은 흰돌을 잡고서 다섯 번을 두었다.

이번에는 제갈천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오로지 모든 기량을 앞세워서 펼쳤다.

흑돌을 완전히 꺾고서 정체를 알아야겠다는 마음, 오직 하나.

그 열망으로 두었으나 흑돌의 손은 여전히 빨랐다.

“……또, 이런 수.”

흑돌이 실망스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모욕을 줬음에도 제갈엽은 반박할 수 없었다.

도리어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똑같다!’

애초에 이런 수를 둘 줄 알았다는 듯 막힘없는 행마.

흑돌에게 머릿속을 읽힌 것 같았다.

자연스레 주먹을 꽉 쥐고서 바둑판을 노려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눈치를 봐서 적당히 한 수, 뒤늦게 제대로 하겠다고 한 수. 돌에 무게가 실릴 리가 없지.

‘뭐?’

제갈엽은 귀를 의심했다.

흑돌이 보낸 전음에서 벌거숭이가 된 창피를 느꼈다.

속내가 까발려진 부끄러움이 골수까지 치밀었다.

그렇게 다시.

-기회를 주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대로 둘 기회. 지금이라면 무를 수가 있잖아.

실제로 사람이 죽어 나간 전쟁이 아니라, 돌을 버리고 취할 뿐인 바둑이라면 되돌릴 기회가 있다.

흑돌의 전음을 이해하면서도 차마 행하지 못했다.

바로 옆에 심계가 어둡고 치밀한 가주가 있었다.

수를 물러달라는 말을 꺼냈다간 어떻게 여길지 두려웠다.

제갈엽은 잠시 고민했다. 길지는 않았다.

촤르륵! 촤르르륵!

다섯 바둑판을 엎었다.

흰돌과 흑돌이 서로 뒤섞여서 우르르 떨어졌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제갈천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붉어졌다.

당장 제갈엽에게 나가라고 호통을 칠 기세였다.

“잠깐.”

흑돌이 제갈천의 불호령을 제지하고서 바둑판이 다시 똑바로 놓이는 걸 기다렸다.

반들반들하게 닦인 바둑판에 제갈엽의 눈이 비쳤다.

꽤 맑았다.

“다시 놓겠습니다.”

타닥 탁, 탁…….

제갈엽은 지금까지 본 대국에 따라 흰돌과 흑돌을 차례대로 놓았다.

어느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했다.

심지어는 돌의 치우침마저 똑같았다.

“…….”

그 과정을 지켜보는 제갈천의 얼굴에 어둠이 가라앉았다.

역시 걸출한 놈이다.

언젠가 자기 자리를 탐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제갈천의 어두운 마음이 눈동자 아래에 가라앉았다.

제갈엽은 가주의 심기가 나빠졌음을 깨달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삼십팔 수가 흐르고.

딱.

제갈엽이 대신 놓았던 수가 달라졌다.

“잠깐! 네가 둔 건 그게 아니지 않느냐!”

제갈천이 곧바로 섭선으로 흰돌을 가리켰지만, 흑돌의 말은 달랐다.

“계속해.”

“……그러지요.”

가주의 눈치를 보고서 적당히 놓았던 일수(一手).

그 수부터 완전히 다르게 두었다.

거북이처럼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호시탐탐 적의 심장을 노리는 호랑이 같았다.

흑돌의 인피면구 아래로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 하하하! 이렇게 둘 줄 알면서 왜 그랬던 건지 모르겠군!”

“……귀하 차롑니다. 두십시오.”

“내가 졌어. 이렇게 나오면 어찌 이기는지 모르거든.”

제갈엽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전에 두었던 수가 좀 안일하긴 했지만, 당신은 고민하지 않고 파훼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좀 더 진지하게 뒀다고 해서 졌다는 건, 날 모욕하는 겁니까?”

“모욕이라고?”

흑돌이 갑자기 정색하며 되물었다.

“옆에 있는 사람 눈치나 보면서 적당히 두려고 한 자네가 먼저 모욕을 범한 게 아닌가?”

“……거, 듣자듣자 하니 너무하는군.”

제갈천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흑돌을 쳐다보았다.

“서문 공자. 왜 제갈세가의 가솔을 눈치나 보는 소인배로 만드나?”

“실제로 그러했으니까요.”

흑돌은 인피면구를 벗었다.

아직 약관이 되지 않아 뽀얀 피부와 어울리지 않는 상처들.

새로운 십대고수, 천무검왕 서문경이 제갈엽의 얼굴을 보았다.

‘전생의 당신은 꼭두각시나 다를 바 없었거든.’

정의맹의 총군사로 등용했지만, 제갈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안일한 실수를 범했다.

처음 둔 수가 특히 치명적이었다.

제갈세가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세를 무시하고 더 큰 희생을 강요했으니까.

‘차마 그때는 살릴 명분이 없어서 목을 베었지만, 지금은 다르지.’

명석하게 태어난 재능과 환상진을 자유롭게 다루는 실력.

이 두 가지가 정의맹에 필요했다.

그렇기에 서문경은 제갈세가에 아부와 겸양을 떨기보다 맞부딪쳤다.

군문의 방식이 그렇듯.

평소에 그리 무식하다고 욕한 서문패처럼 행동이 나왔다.

“뭣도 모르는 어린놈 가르치는 것보다 정의맹의 군사로 데려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건…….”

“이보게. 진지하게 억지를 부리면 어떡하나!”

제갈천의 눈빛이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구워 버릴 것 같았다.

이대로 나간다면 제갈세가의 도움은커녕 정의맹에 이런저런 방해가 되겠지.

하지만 서문경에게는 본가한테 받은 필살기가 있었다.

‘정파를 자칭하고, 가문의 역사에 관인(官人)이 있는 한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절초를 보여 줘야겠군.’

서문경은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바둑판에 내리쳤다.

흰돌과 흑돌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대국을 완전히 끝내는 일수.

제갈천과 제갈엽의 코에 향긋한 냄새가 올라왔다.

“……이건.”

제갈천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저 아래에 가라앉았던 어두운 마음마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직인(職印).

두루마리를 묶은 붉은 끈과 찍힌 도장은 권문세가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었다.

서문경은 씩 웃으며 말했다.

“하늘 같은 황상의 뜻을 받들어라.”

쿵!

서문경이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기도 전에 제갈천과 제갈엽은 두 무릎을 땅에 꿇었다.

이것이 황제의 권위였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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