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52화 (150/250)

제갈세가 (1)

여러 명사가 조문을 왔다.

가까운 무당파부터 시작하여 제갈세가, 남궁세가까지.

화산은 아직 백야흔에게 입은 피해를 수복하지 못해 조의를 표하는 서신과 장로를 한 명씩 보냈다.

“한데 종남은…….”

“쉿, 쉿!”

“아. 그랬지.”

대화를 떠들던 남자가 조심스레 옆을 흘깃거렸다.

전대 신승, 법광을 기리는 행사(行祀) 속에 또 다른 슬픔이 있었다.

백야흔에게 본산을 잃은 종남파 도사가 안섶까지 푹 젖은 몸으로 공심에게 다가갔다.

그는 적을 찾고 싶어 했다.

“마교가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놈이 누굽니까?”

“아직 누가 그랬는지 모르네.”

“방장님, 방장님! 저희 종남도 똑같은 짓을 당했습니다. 먼저 나서 준 무영신투와 진무신검이 아니었다면 누구한테 당했을지도 몰랐겠지요! 비록 그놈은 죽었지만, 다른 놈이라도 막아야 합니다!”

“…….”

공심은 도사를 눈에 담았다.

도사의 증오가 눈가까지 차올랐다.

실핏줄이 터진 눈동자에 선연한 분노가 방향을 모르고 타올랐다.

주체할 수 없이 타 버려서 바싹 마른 고목이 되리라.

스르륵.

황색 장삼을 벗은 공심이 도사의 어깨에 얹었다.

“정신을 차분히 다스리게. 후일의 종남을 도가가 아니라 녹림으로 만들 작정인가?”

“……저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종남이 짓밟히고 나서야 돌아왔습니다.”

도사는 자기 가슴을 쿵쿵 때렸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다.

누굴 탓해야 할지도 몰라서 눈앞이 팽팽 돌았다.

마교에게 횡액을 당했다는 소림사에 가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길은 가라앉지 않았다.

장마가 몸을 때려도 몸이 뜨거웠다.

“무림을 결집하는 데 시간이 걸림을 압니다. 본래 반목하거나 은근슬쩍 서로 견제하던 이들끼리 합하는 데 어려움이 있겠지요! 방장님께서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할 것도 압니다!”

“…….”

“알아도, 못 기다립니다! 죽어도 갈 겁니다. 그래야 선사(先師), 선현(先賢), 선산(先山)이 짓밟힌 응분이 풀릴 테니까요!”

도사가 황색 장삼을 땅으로 팽개쳤다.

장삼은 금세 비로 젖어서 진하게 물들었다.

황색이 진흙에 묻어서 붉은색처럼 보였다.

공심은 도사가 맞이할 결말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알아도 말리지 못했다.

일깨우지 못하는 한(恨)이 있기에.

‘저런 자가 많겠지.’

구파일방의 종남파조차도 마교에게 짓밟히는 사태가 일어났다.

벽지에 있는 도문이나 불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양을 쌓은 도사조차 한과 독심을 품고 죽으러 가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을 터였다.

공심의 착잡함이 목소리에 스며들었다.

“서문 공자.”

“예.”

“힘이 닿는 데까지 총력을 다해 돕겠네. 부디 정의맹이 빠르게 국난(國難)을 수습할 수 있도록 해 주게.”

서문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공심은 땅에 떨어진 장삼을 주웠다.

진흙에 축축하게 젖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방장님, 금방 새 가사를 가져오겠습니다.”

“괜찮아. 잔병치레도 안 할 만큼 정정하니까.”

처억.

공심은 장삼을 차려입고서 본당으로 향했다.

아직 치러야 할 일이 많았다.

* * *

“내려가게?”

성하민의 말에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사에서 볼 일은 마쳤다.

비록 안타까운 일은 있었지만, 소림의 지지는 정의맹에 좋은 영향을 끼칠 터였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곳에 오래 있을 자격이 없다는 것.

‘신승과 공심 방장의 마음이 넓어서 그렇지, 다른 문파였다면 하민이는 아마…… 몇 달은 붙잡혔겠지.’

전대 신승 법광의 죽음.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검치와 청마가 아니라면 성하민이 흉수라고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신승은 의심하지 않았다.

되레 성하민에게 여러 덕담을 하며 마음에 품지 말라고 했다.

“원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셨던 분일세. 소저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니, 미련은 없으셨을 게야.”

신승의 표정은 온화했으나 기색은 편치 못했다.

그렇기에 서문경은 장례가 끝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절차에 참여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아직 가지 못한 곳이 무당파를 제하고도 서너 곳이 더 남았으니까.

스윽.

봇짐을 어깨에 메고 가려는 찰나에 저 멀리서 공심이 보신경을 펼쳐서 다가왔다.

“멀리 배웅하지 못하게 되어 미안하군그래.”

“아닙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살의 공덕이 함께하길 바라네. 정의맹이 마교에게 대항하는 대들보로서 꼿꼿이 서길 응원하겠네.”

“아, 검치와 양명성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함께 찾아가지.”

공심의 배웅은 여기까지였다.

서문경은 늘어난 일행을 흘깃 쳐다보았다.

낭왕.

전대 무림맹주로서 거대한 인망을 가진 남자였다.

“어디부터 갈 건가?”

“일단은 가장 가까운 제갈세가부터 갔다가, 무당파를 들르고…… 개방과 무림맹으로 향해야겠지요.”

“바쁜 일정이구만.”

낭왕의 말에 서문경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은 남궁세가에도 들를 생각이었지만…… 조문을 위해 찾아온 명사들의 대화를 듣고 단념했다.

“요즘 남궁세가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지?”

“남궁명 소가주가 오르고 나서 내부에서 칼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야. 얼핏 듣기론 많은 반대를 뒤집으려고 한다는데……”

‘대충 뭔지 알겠네.’

오대세가는 구파일방과 다르게 대의를 좇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정파로서 있기 위한 구실일 뿐.

손해가 이득을 압도하는 순간 언제든 대의를 버릴 수 있으니까.

서문경은 천무학관 시절의 남궁명을 떠올렸다.

어딘가 어리숙하고 고집이 세지만, 협의를 따르는 후기지수였다.

‘명이가 잘해야 오대세가가 정의맹으로 합류하는 게 빨라질 텐데. 도울 방법이 있으려나.’

그나마 정의맹에 호의적인 제갈세가에 가면 방법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문경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제갈세가면 천무학관 때 뵀던 무사부가 계셨지.’

천무학관 입관 시험을 담당했다가 마교의 침입에 연루되어 큰 홍역을 치렀다고 들었다.

그나마 천무학관주였던 제갈우가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 글쎄.

오대세가의 정치는 집요하고 무서운 데가 있어 사소한 실수가 큰 문제를 일으킨다고 하였으니.

‘제갈엽 무사부였던가.’

접점은 거의 없었다.

좋게 말해도 친하게 다가갈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때로는 밀쳐질 걸 알면서도 엉겨 붙어야 하는 법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서문경은 히죽 웃었다.

“적어도 낭왕 선배가 있으니 문전박대는 안 당하겠지요?”

“……허, 날 이용하겠다는 건가?”

“선배께서 저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동행하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 번쯤은 져 주십시오.”

서문경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낭왕이 허허 웃었다.

과연, 저 말대로 바라는 바가 있었다.

첫째는 무림맹이 정의맹의 하부에 속하되 반쯤은 동등하길 바랐고.

둘째는 낭인의 처지였다.

‘마교가 사라지고 나면 황실은 전후로 인해 망가진 민심을 돌릴 필요가 있다. 아마, 흑도나 낭인이 제격일 거고.’

낭만 있게 말하자면 주인 없는 칼.

쉽게는 가끔 머리가 홱 돌아서는 마을에서 칼부림하는 것들.

소속이 없고 각기 다른 품성의 칼잡이는 돌멩이를 맞기 딱 좋았다.

‘군문의 문턱이 워낙 높아, 웬만한 낭인은 뽑히기도 힘드나…… 서문세가가 힘을 쓴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서문세가를 비롯하여 홍가, 연가까지.

대명의 서쪽을 지키는 군문이 무수히 많았다.

그들이 문턱을 낮춘다면 낭인에게 군관으로 투신하는 길이 열릴 터였다.

그러니, 지금은 서문경의 요구를 최대한 이뤄 줄 생각이었다.

“그래. 그러지. 내 이름을 마음껏 써도 좋네.”

“선배께서 그리 흔쾌히 말씀해 주시니 속이 편합니다. 이왕 이리된 것, 미리 부탁을 말씀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서문경의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얼핏 보면 고수가 자기 뜻대로 움직여서 기쁜 애송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낭왕은 지금 당장 용무를 말하지 않았다.

서문경의 나이가 어리다고 얕잡아 봐서 안 될 테니까.

그저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뭐 그리 급할 필요가 있나. 아직 마교의 세가 잡히지도 않았거늘.”

“……그렇습니까?”

서문경이 입맛을 다셨다.

낭왕의 의도를 일찍 알아차리지 못해서 조금은 아쉬웠지만, 성하민처럼 말해 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주 무사.

-예. 공자님.

-삼 년 전부터 지금까지, 여기 있는 낭왕 선배께서 누굴 만나고 뭘 했는지 조사시켜. 혹시 모르니까.

전생의 오대세가처럼 은연중에 조용히 딴생각을 품을지도 모르니까.

서문경은 조용히 웃으며 낭왕과 시선을 마주했다.

제갈세가에 도착하는 날까지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 * *

제갈세가의 새벽은 무가답지 않게 특이하다.

“오기(吳起)가 이렇게 말하기를…….”

오자병법을 소리 내어 읽는 꼬맹이가 있는가 하면.

“손무가 논한 시계(始計)에 대해 논하여라.”

“예. 그것은 다섯 가지 원칙과 일곱의 계산으로 피아의 상황을 정확히 탐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호랑이처럼 생긴 중년인 앞에서 손자병법의 총론을 풀어야 하는 젊은이가 있다.

다른 무가처럼 떠들썩하게 고함을 지르거나 날붙이를 관리하는 의식은 치르지 않는다.

폐관 수련이랍시고 어딘가에 틀어박히는 이도 없었다.

과거에 제갈무후가 말한 뜻이 있음이라.

“만물을 고요히 관찰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생각해 냉정하게 처세하는 자세가 우선이다.”

힘을 가져도 사용하는 법을 모르면 헛되지 않은가.

시야를 넓게 가져, 드넓은 심상을 가지는 것이 폐관한다는 작자들보다 백배는 값진 것이다.

제갈세가는 위대한 조상의 뜻을 이었다.

이 뜻에 중년인은 한 가지 말을 덧붙였다.

“말씀에 매몰되어 현실에 등을 돌려서도 안 된다. 천하가 바뀌는 시기에 힘을 기르지 못하면 돌풍에 휩쓸려 다닐 뿐이다.”

“예.”

“이해하였느냐?”

“예.”

중년인의 말에 젊은이가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중년인이 불미스러운 일로 가문에 돌아왔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썩은 동아줄을 잡아 봐야 떨어지는 건 나인데. 쯧. 지난 시험을 잘 봤어야 했다.’

젊은이가 미소를 지으며 중년인을 올려다보았다.

한때 천재라고 불렸으나 큰 실수로 인해 제갈세가에 피해를 준 남자.

제갈엽은 무심한 표정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날이 밝았구나. 돌아가서 부족한 공부를 마치고, 섭선술을 연마하여라.”

“사부님의 말씀 잘 따르겠습니다.”

젊은이가 두 손을 모아 올리며 문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제갈엽이 보기에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이 떠난 순간부터 조금씩 실망한 티가 났다.

참으로 궁색한 나날이었다.

‘천하의 기재를 가르치던 게 겨우 몇 년 전인데.’

대놓고 한숨을 푹푹 내쉴 수가 없어서 꾹 참았다.

제갈엽은 젊은이가 나간 뒤에야 인상을 찌푸렸다.

피가 귀하여 대우했더니, 자기가 잘난 줄 알아서 문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백부께서 말릴 때 가만히 있을 것을.’

실수한 몸으로 천무학관에 재직할 수 없다고 뛰쳐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천무학관주 제갈우의 비호가 사라지자, 본가에서 제갈엽의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자기 사람을 보내고 은근히 헐뜯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이 년을 넘으니 진법의 천재란 소리가 날아갔다.

‘본가에서 저런 머저리나 가르치게 되느니…… 차라리 유망한 가문의 빈객으로 가는 것이 나았거늘.’

유망한 가문.

사람들은 무림의 강성함만을 두려워해 남궁세가와 당가를 이야기하지만, 제갈엽이 보기에 실상은 서문세가였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천하의 형세를 다스리는 것이 진정한 힘이니까.

그러나 이제는 기회가 없었다.

‘가주께서 내 계획을 눈치채고 저런 머저리를 제자로 들이라 했으니, 도저히 거절할 방도가 없구나. 쯧.’

어차피 건방 떠는 거, 아예 하극상이라도 벌여 줬으면 좋겠거늘.

제갈엽은 젊은이가 떠난 자리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치졸한 계획을 하나둘씩 세우기 시작했다.

며칠 뒤에 귀한 손님이 도착할지도 모른 채.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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