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2)
* * *
구름이 갠 것도 잠시.
다시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렸다.
장마가 초목을 적시고, 한결 가벼웠던 마음을 축축하게 가라앉혔다.
다가올 어려움을 알아서다.
금강(金剛)의 불법을 배우는 중들은 이문(利文)에 밝은 장사치나 무림인과는 다르다.
쉽지 않겠지.
마음을 단단히 먹은 서문경은 소림사의 대문을 양손으로 밀어젖혔다.
끼이익…….
경첩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자연히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 닭살이 올라왔다.
기름칠하지 않은 문이다.
이곳에 사는 승려의 기질 또한 비슷했다.
젖혀진 대문 뒤에 서 있는 신승이 그러했다.
우산이나 우비 없이, 맨몸으로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서문 공자.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하여 걱정했네.”
“보시다시피 건강합니다.”
“허, 피를 그리 흘리고?”
“젊을 때 흘려놔야 빨리 회복하지요.”
“누가 들으면 나이가 이립은 된 줄 알겠어.”
너털웃음을 흘린 신승이 서문경 어깨 너머를 훑었다.
“그새 인연을 셋이나 마주했나?”
“예.”
“낭왕은 아는 얼굴이지만, 두 명은…… 처음 보는군. 소개해 주겠는가?”
“검치입니다. 본래 사천에 살았던 고수지요. 다른 한 명은 그의 제자입니다.”
“검치가 이번에 빈객들을 가로막은 자겠지. 맞나?”
“예. 아무도 죽진 않았…….”
“충분히 들었네.”
신승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맨몸으로 장마를 맞으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면, 차분히 들었을 것이다.
서문경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 사연이라도 들어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사실은 말일세. 사람들은 불자(佛子)를 보고 자애심이 깊고, 타인을 대범히 용서한다고 믿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네.”
신승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언뜻 보아서는 만민을 보듬어 준다는 보살처럼 보여도, 실상 마주한 것은 나찰(羅刹)이나 다를 바 없다.
그는 등허리에 감추고 있던 석장을 꺼냈다.
큰 원 안의 여섯 고리.
바라밀을 상징하는 장식이 신승의 손에선 철퇴보다 무서운 병기였다.
신승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개차법이라는 말이 있네. 십선(十善)을 지키기 위한 십계(十戒) 중 무엇을 우선해야 하냐는 법일세. 십계 중엔 불진심(不嗔心), 성내지 아니하고. 불살생(不殺生), 죽이지 아니하라. 두 가지가 있지.”
“…….”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성내지 않고, 죽이는 것보다 용서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빠르군. 역시 대명(大明)의 동량일세.”
“신승 선배께서 혼자 나오신 이유가 이겁니까?”
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용서를 구하러 온 사람입니다.”
“용서…… 허, 용서.”
“오해도 있습니다. 신승 선배가 생각하시는 만큼, 검치는…….”
“끌끌. 오해라!”
사부를 잃은 노승(老僧)이 장마 속에서 실소를 터트렸다.
그의 시선이 검치에서 성하민에게 향했다.
“저 소저의 기억은 온전해졌는가?”
“아직입니다.”
“그렇군.”
신승은 석장을 매만졌다.
지난 폐관 동안 잘 닦지 않아 먼지가 많았으나 빗물에 씻기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점차 더 흐려졌다.
오갈 데 없이 방황하는 아이 같았다.
사부의 뜻을 존중하여 성하민을 붙잡지 않았어도, 기억을 떠올리지 못함에 분노하는 불초 제자가 가슴속에 있다.
또, 용서. 오해. 사연.
신승의 하얗게 센 눈썹이 꿈틀거렸다.
“공자는 이해를 강요하는군.”
“선배.”
“나는 말일세. 사연을 듣고, 용서를 풀고, 용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닐세. 하물며 군문에 속한 공자에게 선배를 들을 사람도 아니지.”
‘역시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서문경은 한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신승의 말대로 이해를 구하기엔 너무 감정적으로 좋지 않은 때였다.
스승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겨운 때에 소림사에 마교라는 우환이 찾아왔다.
이제 와서 마교에 속한 남자가 용서를 청한다고 들어준다면 사람이 아니라 생불(生佛)일 터.
서문경이 다른 언변을 고민하는 사이.
“이만하면 됐네.”
검치가 신승 앞으로 걸어갔다.
기꺼이 목을 내줄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 나름대로 결의가 한껏 담긴 눈이었다.
투둑, 투두둑.
장마가 두 남자를 세차게 두들겼다.
석장을 쥔 노승과 강인한 인상의 검객.
둘은 서로 가까이하기에 어울리지 않아, 당장 병장기를 부딪칠 듯 위태로웠다.
이에 신승이 물었다.
“용서를 구하러 나왔는가?”
“그렇소.”
“나는 사연을 알지 못하네. 들을 인내심조차 바닥난 파계승이 바로 날세.”
신승의 석장이 단숨에 검치의 머리통을 향해 휘둘러졌다.
“앗!”
검치를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던 양명성이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갑자기 뛰쳐나가려고 하기에 서문경은 양명성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석장은 검치의 천령개 위에 멈춰 있었다.
“…….”
“…….”
두 남자는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용서를 구하거나 받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애초에 검치는 소림사의 승려를 해하거나 다치게 한 적이 없으니.
죄라면 다른 이에게 지었다.
신승은 입술을 달싹였다.
“철반검 시주 계시오?”
“아, 어. 예! 있습니다!”
철반검이 긴장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왔다.
갑자기 신승이 자길 호명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온몸을 으스스 떨었다.
그러나 신승의 용무는 예상보다 더 무거웠다.
“이 남자가 자넬 죽일 뻔했다지. 그를 용서할 수 있겠나?”
“……예?”
“자네의 답을 들려주게.”
신승의 말에 철반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나도 뜻밖이어서, 말문이 막혔다.
‘내가 이런 중대사에 관여할 자격이 되나?’
철반검의 명성이 높아 봐야 천하를 위진시킬 정도는 아니다.
기껏해야 하남에서 힘깨나 쓴다고 거들먹거릴 수준.
이마저도 강호에서는 뛰어난 고수로 취급되나, 신승이나 검치와는 비견할 수 없었다.
장마에 젖은 수염이 힘없이 쳐졌다.
갈팡질팡하는 내심이 눈동자로 퍼졌다.
“편히 말하게.”
신승의 목소리에 담긴 공력이 무척 맑고 순하여 철반검의 가슴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도저히 저 뜻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왜 저입니까?”
“자네만이 이 남자의 죄를 물을 수 있기 때문일세.”
“저, 저 사람과 싸운 건 서문 공자입니다. 저는 싸우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아서 기절했을 뿐입니다. 어찌 보면 목숨을 살려 준 것이지요.”
“자네가 약하다고 하여, 죽을 뻔한 것이 살려 준 것이 되나?”
“강호에서는…….”
“대답을 피하지는 말게.”
철반검은 좌중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검치를 살려 줄 이유가 있었다.
그가 언젠가 도와주겠다는 약조를 받았기에 여기서 죽게 둘 순 없었다.
서문경도 그걸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검치와 싸우면서, 시간을 벌었다고 하니까.
어쩌면 서문세가에게 적잖은 재물을 얻을지도 모르지.
철반검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저는 사실…… 편하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이 상황 자체가요. 저를 죽일 뻔했다고 해서, 남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꼴 아닙니까?”
그 말에 신승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자네가 더 스님 같군. 그래. 더 말해 보게.”
“저는……”
철반검은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일생을 살아가던 중, 어느 순간.
천하에 이름을 떨칠 고수까진 되지 못하겠다고 깨달은 순간이 있었다.
힘만 센 것이 아니라, 몸놀림까지 뛰어난 놈을 마주쳤을 때 말이다.
그런데 그놈이 다른 천재에게 목이 베였다.
그 꼴까지 보고 나니 소림사에 몸을 의탁했다.
허무하게 죽느니 끈질기게 살아가겠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내가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 오지 않았나.’
천하에 이름을 떨칠 고수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순간.
그때가 왔음에도 철반검은 어린 시절에 생각했던 만큼 즐겁지 않았다.
‘막연히 고수가 되고 싶다 생각했지, 그 무게는 몰랐던 거야.’
평소라면 검치의 재능이 부러워서, 그 경지가 고까워서 죽여 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가 아니었다.
마교가 세외와 손을 잡았다.
관인 또한 손이 너무 바빠서 변방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철반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살려 주십시오.”
“왜인가?”
“용서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저는 누구한테 죽을 뻔하고도 넘어갈 만큼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고수의 목숨이 귀하다는 것은 압니다.”
“…….”
“저자는 조금 전에 말했습니다. 정의맹에 몸을 의탁하여 마교와 싸우겠다고. 목줄을 채워도 된다고 말입니다.”
“자네의 용서보단 대의가 중하단 말인가?”
“예.”
철반검은 고개를 또렷이 들고 말했다.
과거에 두었던 미련과 후회, 그리고 어리석은 기억을 빗물과 함께 털어 내서 후련했다.
그 표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신승이 말했다.
“솔직하군. 자네가 한 톨의 거짓이라도 말했다면 휘둘렀을 걸세.”
“……예?”
“미리 입을 맞춰 두었을지도 모르지 않나. 진심이 아니면 살계를 범할 생각이었네.”
그 말에 철반검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검치와 서문경은 덤덤했다.
낭왕 또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승의 공력에는 상대의 마음을 주무르는 힘이 있어, 하수의 진실과 거짓 정도는 꿰뚫어 볼 수 있었으니까.
다만 자기 자신의 마음까진 통제할 수가 없어서 힘들 뿐.
신승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검치라고 하였나. 정녕 전대 신승의 죽음에 관련이 없나?”
“그렇소.”
“마교와 싸우겠다는 건 어찌 믿을 수 있지?”
“나와 함께 싸운 것이 무영신투와 진무신검이오.”
“……검마? 자네가 검마라는 건가?”
“과거엔 그리 불렸소.”
검치는 담담한 목소리로 신승의 질문에 대답했다.
과거사부터 양명성을 제자로 들이고 줄곧 은둔했던 이야기.
양명성이 협의를 위해 나섰다가 청마에게 붙잡히기까지의 고초.
주구로서 끌려다닌 과오.
그 모든 것을 들은 신승이 입술을 달싹였다.
“소림에는 과거에 악행을 저지른 도적과 탐관오리가 귀의한 바가 많소. 아시오?”
“얼핏 들은 것 같소.”
신승은 석장을 땅에 꽂았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석상의 여섯 고리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런다고 해서 고리가 석장 바깥으로 튕겨 나가는 일은 없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깨달으셨소?”
“……전혀 모르겠소.”
“모든 일이 끝나면 불법에 귀의한다면, 이 뜻을 알려 주겠소.”
“겨우 석장을 꽂은 게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귀의한 이유요?”
“본디 뜻은 크고 작음을 가지고 가르지 않는 법이오.”
“허.”
검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평생 검을 수련하고 도망치기만 했지, 이런 선문답은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한데 기이하게도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내 제자에게 모든 것을 전수하고, 저 사람과의 약조가 끝난다면…… 그때 생각해 보겠소.”
“좋소.”
신승이 등을 돌렸다. 석장은 회수하지 않았다.
약속의 증표인 것처럼, 그저 가만히 두었다.
“모두들 들어오시오. 시장하실 텐데, 식사나 같이 합시다.”
“저는 고기로 주십시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서문경의 말에 신승이 껄껄 웃었다.
“언제는 젊을 때 흘려놔야 빨리 회복한다더니?”
“농담도 못합니까?”
“사찰에서 고기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은 참, 망나니가 따로 없구나!”
신승은 그때가 돼서야 어두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았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