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 (2)
* * *
호수에 비친 칼날처럼.
서로 닮은 듯 다른 두 검이 같은 빗방울을 갈랐다.
칼날에 쪼개진 물방울이 지면을 두드리기 전에 두 검객이 허공을 발로 짚었다.
서문경의 운룡대팔식과 검치의 허공답보.
보신경(步身輕)을 넘어서 비행에 가까운 운신이다.
그러나 놀라지는 않았다.
서로 진지하게 검을 부딪쳐 본 적은 없었으나, 무인의 직감이란 가끔 예지처럼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놈이라면…….’
‘이럴 줄 알았지.’
장마가 자아낸 안개도, 질척거리는 땅도, 젖은 손바닥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발끝으로 빗방울을 지르밟아 허공을 점할 줄 알며 검을 쥔 파지(把持)가 흔들릴 수준이 아니니까.
다만 동류(同流)를 적으로 마주한 불쾌함은 피부에 척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내 속을 박박 긁어 놓는군.’
검치가 속으로 이를 뿌득 갈았다.
강호의 소문이 말하듯, 서문경이라면 여러 무공을 섭렵하고 있다.
백야흔의 목숨을 끊은 초식도 가전무공의 검법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왜.
서문경은 번천광검결을 고집하는 걸까.
검치의 눈썹이 팔(八)자를 그렸다.
“뭐 하잔 거냐?”
“배우고 있지.”
서문경의 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곡선은 곧 켜켜이 쌓여 층을 이루고 구름으로 화했다.
검기가 수십 겹 쌓인 파도가 완전히 합일한 것이다.
검치는 저 조화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천하의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감히 내 무공을……!”
번천광검결의 광결.
처음에는 직선만을 그렸던 속검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는, 검기로 층운(層雲)을 그렸다.
눈부신 발전이 초식마다 눈에 들어왔다.
그때마다 양명성의 표상이 가슴 속에서 어른거렸다.
멍청한 것. 모자란 것.
서문경보다 나이도 많은 것이 재능이 그렇게 뒤떨어져서 협의를 울부짖다 청마에게 붙잡히지 않았나.
검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구차하고 답답한 감정을 토할 길이 검밖에 없었다.
스르릉……!
검치의 검이 허공으로 날았다.
겹겹이 쌓인 층운을 단숨에 양단하는 직선(直線).
상단전 심상.
저 안에 담긴 최강의 일검을 의념으로 체현한 것이다.
“……!”
서문경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검치가 자신의 검을 보고 본원(本原)을 꿰뚫어 보았듯, 서문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천결.
처음 번천광검결을 익혔을 때, 서문경이라는 무인에게 가장 먼 무학이라고 여겼던 의념의 일검.
그때로부터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옥화산에서 주백경을 구하는 순간의 감각과 적마와의 싸움을 회고했다.
‘이제는 해 볼 만하지 않나.’
서문경은 즉시 운룡대팔식을 펼쳤다.
이형환위로 빚어진 잔상이 검치에게 수십 갈래로 쪼개졌다.
그런데도 검에 담긴 의념은 쇠하지 않는다.
도리어 서문경이 지나간 공간을 추적하는 것과 동시에 검치가 움직였다.
“일단은 그 콧대부터다……!”
세 걸음.
땅을 때리고, 허공을 때리고, 빗방울 위에 선다.
삼보(三步)에 담긴 공력이 사방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려다가,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옆구리에 단단히 붙인 주먹.
검치는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같잖은 보신경과 함께 무너뜨려 주마!”
천결로 빚어 낸 검과 삼보의 공력으로 휘감은 주먹.
정면으로 받아칠 수 없다.
단숨에 지형마저 바꿨던 백야흔의 정권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
거기까지 가늠한 서문경이 왼눈을 찡그렸다.
빗물이 눈동자를 때린 탓이었다.
“운이 다했구나……!”
검치의 목소리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언젠가 직전제자로 들였을지도 모를 청년의 목숨을 빼앗는 죄책감과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회한.
또, 천하에 다시없을 천재를 벤다는 안타까움이라.
주먹이 서문경의 가슴팍에 닿았다.
축축하게 젖은 옷깃의 냉기가 피부를 스쳤다.
그 순간에 검치가 공력을 터뜨렸다.
꽈광!
작약이 터지는 소리가 숭산의 중턱에 울렸다.
하늘에서 퍼붓는 장마마저도 한순간 고리를 그리며 흩어졌다.
칠로두일지라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과거에 강천이라는 마인이 그러했듯,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꿰뚫려야 했는데.
“……번검유회.”
서문경은 피하지 않았다.
검과 주먹을 동시에 막고 흘리는 순간에도 여유가 있었다.
멍청하게 서서 자신을 쳐다보는 검치에게 한 방 먹일 여유가.
‘이럴 수가.’
검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빠르게 다가오는 칼날은 맨손으로 막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검치는 허공에서 상반신을 비틀었다. 그러면서도 유연한 신체로 발길질하고 천결로 날렸던 검을 회수했다.
급박한 회피와 반격 사이에도 균형은 잃지 않는다.
한때 마교와 정면으로 맞서 싸워 죽지 않은 절대고수다운 움직임이었다.
“이런 사람이 청마한테 휘둘리는 게.”
서문경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회귀하고 난 이래로 가장 귀찮고 강인한 무인이 그깟 일 때문에 마교의 졸병이 된 것이 너무나도 짜증 났다.
그렇지만 아예 편을 달리한 것은 아니지 않나.
서문경은 검기를 흩뿌리며 빈말을 던졌다.
“주 무사가 선배의 제자를 구출해 오기로 약조했으니, 여기서 그만…….”
“실제로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모르지.”
“……칫.”
적당한 말로 구슬리는 건 불가능한가.
서문경은 혀를 차며 검을 휘둘렀다.
이제는 번천광검결에 집착하지 않았다.
검치에게 배울 것은 충분히 배웠으니, 승부를 결정지어야 할 때.
서문경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카강! 카드드득……!
두 절대고수의 심상.
천주심경의 기둥과 번천광검결의 삼결(三結)이 서로를 부정하기 위해 부딪쳤다.
그 와중에 서문경의 몸이 가속했다.
본래 익히고 있던 동공과 운룡대팔식이 절묘한 흐름을 그렸다.
한 번의 출정에 일만 리를 걷는 동공과 공간을 접는 신법.
본래라면 호흡이 부족하여 폐부가 쥐어짜였을 것을, 서문경은 거뜬히 해냈다.
검치의 시야에서 서문경은 둥글게 휘어졌다가 갑자기 펴지길 반복했다.
눈과 기감이 도저히 따라가질 못하는 순간.
촤악!
수십 겹으로 이루어진 검기가 팔뚝의 피부를 저미고 지나갔다.
검치는 끔찍한 통증을 느꼈다.
“……큭!”
이백하고도 삼십이 초. 시간으로는 일식경.
그동안 서문경의 신법을 대강 파악했다.
요체는 불분명하지만, 그저 공간을 왜곡할 만큼 빠르게 움직여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안다고 해서 달라지질 않으니 신공이겠지.’
검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제는 도박수밖에 남지 않았다.
시각이나 기감에 의지하지 않는다.
숨을 훅 내뱉었다. 연이어 내린 빗방울을 차례로 밟으며 서문경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
아주 짧은 촌각.
서문경은 검치의 의도를 읽고서 뒤로 움직였다.
도저히 속도로 따라잡을 수 없으니 중천(中天)의 방위를 취하고서 제비처럼 내리치겠다는 뜻.
검치의 칼날이 차갑게 빛났다.
“어딜!”
서문경의 등 뒤를 붙잡는 일검과 전방으로 휘두르는 이검.
번천광검결로 앞뒤를 동시에 점했다.
허공을 접듯 움직이는 신법일지라도 공간을 이동할 수 없는 법이다.
적어도 피부를 찢어 놓은 피 값은 여기서 받아야 한다.
검치는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서문경이 움직일 곳이야 뻔했다.
기껏해야 왼쪽이냐 오른쪽이냐의 차이일 뿐.
‘드디어, 잡았다!’
서문경의 옷깃을 베는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이대로 베면 끝이다. 그리 여긴 순간에.
“……윽!”
장마가 그치고 어두컴컴한 구름이 제자리에서 비켜나서 생긴 햇빛.
광명(光明)이 검치의 눈을 밝혔다.
시야가 뒤집히고 크고 작은 얼룩 같은 것이 깜빡거렸다.
이윽고 목에 차가운 감촉이 맞닿았다.
“졌구만.”
검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손에서 놓았다.
광명을 등진 서문경이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과 가슴속의 모순이 분연히 떠올랐다.
“베지 그래?”
지극히 충동적인 말이었다.
어차피 서문경에게 번천광검결의 요체가 털린 마당에 더 가르칠 것도 없고, 청마의 손아귀에 있느니 죽는 것이 낫다는 충동.
검치가 어깨를 으쓱이자 서문경도 입술을 달싹였다.
“……웃기지 마.”
“뭐?”
“웃기지 말라고.”
누구나 사연은 있는 거라고, 허무하게 목숨을 내던지지 말라고.
처음에는 검치를 꾸짖듯 가르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짜증과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잔소리가 될 것 같았다.
서문경은 칼끝을 지면으로 향했다.
“허무하게 뒈질 목숨이라면 차라리 나한테 바쳐. 내가 싫으면 마인이랑 싸우다 죽기라도 할 것이지.”
“그것참 솔직한 말이군.”
“어디서 비명횡사하든 어차피 남남이잖아.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교가 좋을 짓은 하지 말아야지.”
“……하, 하하. 무림과 깊은 연을 맺어도 군관이야.”
“당연하지. 내가 어디 왈패들이랑 같은 줄 아나.”
천무학관에 다니며 무림과 깊은 연을 맺었다.
무인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왜 그리 강해지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여전히 인정하기 싫었다.
“관의 영향력이 광활한 대지를 뒤덮을 수 있었다면 애초에 무림은 생겨나지 않았을 거다. 지금이야 마교가 악독하고 쓰레기 같은 사교의 법도를 따르기에 적으로 삼았지만, 언젠가는…….”
“동감이네.”
“……!”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서문경이 고개를 돌렸다.
장대한 체구를 가진 남자가 주백경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말이 과하긴 해도, 사천당가를 보면 무림세가에 병폐가 있긴 하지.”
“누구십니까?”
“아, 전대 무림맹주인 낭왕일세. 부끄럽지만 천하십대고수 중 일인이라는…….”
“여기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말을 중간에 끊은 서문경은 낭왕에게 칼끝을 겨눴다.
경계심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혹여라도 낭왕이 검치처럼 마교에게 약점을 잡혔다면 어떨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간지럽혔지만, 주백경이 간곡한 목소리를 냈다.
“공자님! 이분께서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마교의 간자는 아닙니다!”
“그렇군.”
서문경이 곧바로 의심을 버리자, 낭왕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내 말은 죽어도 안 들을 것처럼 하더니만. 허허.”
“주 무사는 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합니다.”
척안룡이나 적마 앞에서도 바른말을 하던 주백경이다.
착각이 있으면 몰라도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터.
서문경의 신뢰에 주백경이 두 눈을 반개했다.
“공자님……! 역시 저를……!”
“하민이는?”
“아, 그게.”
길이 엇갈려서 어디 있는지 모르니 주변을 탐색해야 한다고.
주백경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려는 찰나였다.
“여기 있었구나!”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성하민.
그녀가 낯빛이 창백한 사내를 업은 채로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병자처럼 보였다.
사내가 누군지 명명백백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검치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니까.
“양명성, 이놈!!”
검치가 쏜살같이 달려가서는 양명성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자기 제자, 하물며 아픈 병자에게 저렇게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격한 반응이었다.
“이 개X끼, 사부를 개고생시키고!”
장마가 갠 하늘.
어두컴컴한 구름이 사라지고 햇빛이 대지를 내리치는 가운데, 검치 혼자 장마 속에 있었다.
뚝뚝.
검치가 흘린 눈물이 싸움으로 헤쳐진 땅을 적셨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