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47화 (145/250)

낭왕 (1)

꽈르릉!

검은색 뭉게구름 사이로 번개가 튀었다.

뇌성벽력이 자아낸 빛에 성하민의 신형이 녹아들었다.

무영보만큼은 아니었지만, 청마가 한순간 기척을 놓칠 정도로 성하민의 접근은 쾌속했다.

하물며 그 숫자가 다섯.

청마는 흑린신편에 회전을 가하면서 앞으로 내질렀다.

쫘자작!

지면으로 떨어진 번개가 사방팔방으로 찢어지는 듯한 굉음.

다섯 성하민의 기예와 청마의 흑린신편이 충돌했다.

청마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잠시 신음했다.

‘이건 대체.’

백야흔처럼 산을 분쇄하는 신체를 타고나지도, 적마처럼 특별한 마공을 익히지도 않았다.

오로지 재능.

불가능을 답파(踏破)하고 누구나 돌아가는 장벽을 손쉽게 허무는 저 재능이 자신을 가로막을 줄이야.

“하하, 하하하……!”

청마는 너무나도 즐거워서 웃어 버렸다.

처음에는 일이 꼬였다고 생각했지만, 이마저도 여흥이었다.

그깟 변수 하나.

사사건건 마교의 행사에 어깃장을 놓는 서문경에 비하면 쉽게 제어할 수 있는 성하민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이러려고 도망쳤다는 거지.”

“……?”

성하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청마라면 머릿속에서 사라진 옛 기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당장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어째서 마교와 연루된 것인지, 매일 꾸었던 악몽이 무엇인지…….

또, 왜 처웃는 것인지.

비 냄새와 마기가 뒤섞여서 본능적으로 몸을 내빼고 싶은 불쾌함이 일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애초에 답하지 않을 사람이란 걸 알아.’

왜인지는 몰랐다. 고수의 직감이 아니라, 마치 예전부터 청마를 알아 왔다는 듯 자연스럽게 묻는다는 선택지를 택하기 싫었다.

이질적이고 희뿌연 기억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굳이 밀어내진 않았다.

적어도 청마와 싸우는 동안에는 도움이 될 테니까.

꽈꽈꽝!

두 번째 번개가 숭산에 내리꽂혔다.

사방이 새하얗게 물드는 순간에 두 무인과 하나의 마인이 움직였다.

아주, 조금씩.

번개가 점멸하면서 시야를 밝혔다.

두 검과 하나의 채찍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부딪치는 소리는 없었다. 서로가 허초였다.

검은 처음부터 채찍 너머를 노렸고, 채찍 또한 상대의 목덜미를 낚아챌 궁리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부딪힐 일 없던 직선과 곡선이 서로 얽힌다.

쩌어엉!

이번에는 확실하게 부딪쳤다.

뒤를 보지 않고 몸 전체를 휘두르며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양손에서 찌릿한 전류가 치밀어 오른다.

숭산에 내리친 번개가 수양명대장경까지 치달은 통증.

성하민과 주백경은 표정을 찡그렸지만, 인간의 태를 벗은 청마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도리어 가소롭다는 듯 빙긋 웃었다.

“애석하지.”

그리 약한 몸을 타고났으니.

청마가 얄팍한 조롱을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입술을 읽을 줄 아는 주백경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힘에 밀려서 물러서야 할 것을, 억지로 버티어 서서 검을 꽉 쥐었다.

흑린신편은 그 목석을 향해 쏘아졌다.

파앙!

가공할 만한 마기가 습운(濕雲)을 밀어낸다.

청명한 하늘을 주파하는 매의 비행처럼.

흑린신편의 질주는 주백경을 관통하듯 날아갔다.

-주 무사님!

성하민의 전음이 비명처럼 들려온다.

당장 물러나라는 듯, 급박한 감정이 절절히 느껴졌다.

하나 주백경은 물러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미련하단 소리를 들었을지언정, 목숨을 위협받아도 마찬가지다.

그 외골수 같은 성정이 자신을 강건하게 만들었음을 알기에 미친 짓을 감행했다.

뒤로 물러나는 대신에 앞으로.

무영보의 걸음으로.

촤악!

흑린신편이 잔상을 후렸다.

잔상은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졌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공격의 예감에 청마가 몸을 뒤틀었다.

어느새 등을 점한 것인지.

무영신투의 진전을 완전히 이은 제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나.

청마는 빙글 몸을 회전시키며 흑린신편을 휘둘렀다.

수십 개의 강기가 사방을 점할 때, 주백경은 어깨를 뒤로 젖혔다.

“……후우.”

한순간 쪼그라든 폐부에 숨을 불어넣고, 불을 지핀다.

수십 개의 강기에 맞서 수십 개의 검기를 쏜다.

연이어 터지는 소리 속에서 성하민이 끼어들어 주위가 엉망진창으로 망가졌다.

발을 디딜 틈새도, 몸을 곧추세울 틈도 없이 몰아치겠다.

주백경과 성하민은 청마에게 온갖 절초를 퍼부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장마보다 더, 허공에서 내리치는 물방울보다 더 많은 검기로 압박했다.

그러나 흑린신편이 자아내는 강기가 검기를 가닥가닥 끊어 낸다.

암뢰격천.

청마는 수세에 몰리고도 똑같은 초식으로 두 무인을 희롱했다.

무인의 자긍심을 박살 내고 희열을 느끼는 저열함이었다.

‘뚫어낼 방법은?’

성하민은 아랫입술을 씹었다.

피가 빗물에 섞이며 탁해졌으나 분함은 생피를 삼키는 것보다 썼다.

그때였다.

주백경이 성하민 앞을 가로막고 서서, 입술을 달싹였다.

“여긴 내게 맡기고 소저는 주변을 탐색하십시오.”

“……예?”

“말했지요. 검치가 마교에게 순응하는 까닭이 있을 거라고. 청마가 이곳에 있다면. 검치의 약점이 주변에 있을 겁니다.”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마다 주백경의 몸에 상처가 늘었다.

둘이서 겨우겨우 막아 내던 암뢰격천이다.

혼자서는 당연히 무리다.

억지를 부려도 정도가 있지, 이래서는 안 된다.

성하민이 머뭇거리는 동안에 주백경은 어깨를 폈다.

“가십시오.”

“하지만…….”

“언제까지 저 도당에게 놀아날 겁니까?”

그 말에 성하민은 주백경의 뜻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청마는 검치의 약점보다 성하민을 중요하게 여겼고, 붙잡힌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미안해요.”

잠시 머뭇거렸던 성하민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마다 주백경을 흘낏 쳐다보았지만, 길지는 않았다.

“얼른 가라니까!”

주백경의 포효가 성하민의 망설임을 끊었다.

성하민이 장마 너머로 사라진다.

빗줄기가 성하민의 냄새와 기척을 지워줄 것이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주백경은 쓰게 웃었다.

불가능한 과업을 어깨에 짊어지니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

“유언치곤 뻔하지 않나?”

청마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부터 용도가 정해진 성하민에 비해 주백경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목각 인형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살려 둔 것도 변덕일 뿐.

당장 흑린신편을 전력으로 휘두른다면 한 줌의 핏물로 만들 수 있다.

무게추조차 되지 못하는 인간이 시간을 끄는 것이 몹시 불쾌했다.

그 앞에서 주백경은 검을 들었다.

피가 방울져 떨어지다 못해 발아래의 작은 못처럼 변했지만 나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충(忠)은 쇠하지 않는다.”

“그것참 눈물 나는 말이군.”

여기서 방해꾼은 치워 보도록 할까.

청마가 흑린신편을 꽉 쥐었다.

천변만화(千變萬化). 마공에서 태어난 병장기임에도 천하의 무공을 섭렵한 듯 움직이는 채찍이었다.

좌에서 우, 위에서 아래.

무자비하게 휘둘러지는 채찍 끝에 살점과 핏물이 엉겼다.

계속되는 공세 속에서 주백경은 모든 것을 막지 않았다.

검견불퇴의 요체를 끊임없이 떠올리면서 치명적인 타격만을 흘렸다.

‘언젠가 공자님께 이런 말을 했었지.’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적수를 만나면 어떻게 하면 되냐는, 겁에 잔뜩 질린 물음을.

처음에는 아차 해서 입을 막았다.

호위무사에서 잘리면 어떡하나 속으로 벌벌 떨었다.

하지만 서문경의 답은 명쾌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여느 군관과는 다른 태도였다.

명예롭게 죽으라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대답이 참으로 묘해서 기억에 남았는데.

정작 저 말을 따라야 할 때가 오니, 그러기가 싫었다.

‘우스운 일이지.’

눈앞이 점차 흐려졌다.

장마가 너무 퍼부어서, 눈가를 툭툭 두드리는 힘조차 이겨 내기 어려웠다.

이대로 쓰러져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나약한 생각이 든 순간 굽혀지려는 무릎을 바로 세웠다.

두 눈으로 끈질기게 청마를 노려보았다.

“나는 물러서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놈.”

청마가 가볍게 혀를 찼다.

여러 고사 속에선 목숨까지 바치는 충직한 놈을 보고 감탄하지만, 적으로 만나니 이렇게까지 귀찮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 성하민을 놓치면 언제 또 방해 없이 마주칠지 기약이 없다.

“여기서 끝이다.”

흑린신편의 끝이 전갈의 꼬리처럼 날카롭게 일변했다.

저대로 내리꽂히면 주백경의 방어까지 꿰뚫릴 것이다.

……그러지 못한 것은 예기치 못한 외부인의 등장 때문이었다.

“아니, 내가 허하지 않아.”

백야흔을 떠올릴 만큼 장대한 기골.

가히 기형적으로 보일 정도로 단단해 보이는 주먹은 무림에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낭왕……!”

청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에 흑린신편의 방향을 달리했다.

촤르륵!

흑린신편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지며 낭왕을 덮쳤다.

아까 전부터 계속해서 펼쳐대던 암뢰격천.

공방의 균형이 절묘하여 주백경이 여태껏 뚫지 못한 초식을, 낭왕은 무심한 태도로 맞이했다.

“진천일뢰타(震天一雷打).”

파지직.

뇌기가 중단전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점차 커진다.

작은 동심원을 그리던 파동은 삽시간에 주변 삼 장을 삼켰다.

흑린신편의 움직임이 뇌기의 파동을 이기지 못하고 말려들자, 낭왕은 발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발끝에서 뇌진격(雷震激)이 펼쳐졌다.

보신경의 성질이 신법에서 공세로 변한다.

흑린신편을 멈추기만 했던 뇌기가 사방으로 뻗어, 장마의 빗방울마저 지배했다.

격뢰지망(擊雷蜘網). 빗줄기로 퍼뜨렸던 뇌전이 거미줄처럼 퍼져서는 청마를 향해서 폭사하니.

“조루 새끼가!”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받은 것이 억울하고 분했던 탓일까?

청마답지 않게 냉정을 잃었다.

흑린신편을 쥔 손에 무시무시한 마기가 침습하여, 뇌기를 완전히 밖으로 밀어냈다.

낭왕은 역으로 흘러들어온 뇌기에 저릿한 손목을 털었다.

“후배가 듣지 않나. 하물며, 언제 이야기를 하는 건지.”

과거에는 워낙 뇌기의 운용이 어려운데다 뇌정공을 원숙하게 익히지 못해서 시간이 짧았지만, 수년 동안의 수련은 헛되지 않았다.

파지지직!

낭왕의 손끝에서 뇌전이 일렁였다.

그걸 본 청마가 별안간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아무리 장마가 심하다고 한들 번개가 어디 쉽게 치던가?

유난히 이 주변에 내리치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설마 낭왕의 심상이 완전히 뇌정공에 안착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네놈……!”

“아직 놀라기엔 이르지.”

낭왕은 투박하게 웃으며 손끝의 뇌전을 자기 가슴으로 찔러 넣었다.

“예로부터 도가에서는 뇌기를 두고 치유와 기적의 기운이라고 여겼지.”

“그래서?”

“이 기운을 완전히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 준 친구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왔거든.”

파직, 파지지직……!

뇌기를 머금은 신체와 정신.

머리카락이 위로 바짝 선 낭왕이 청마를 쳐다보았다.

“내 체면을 위해서 꺼져 주지 않겠나?”

“…….”

청마는 말없이 낭왕의 신체를 쳐다보았다.

뇌기를 한껏 머금은 삼단전이 쉴 새 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무림을 관조하고 때를 기다렸던 청마조차도 처음 보는 성질의 무학이었다.

‘신중하지 않으면 되레 당할지도 모른다.’

세월을 오래 살아서 생긴 나쁜 버릇이라고 해도 좋았다.

처음 보는 문물, 혹은 무학에 대해서는 몇 번을 조심해도 늦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은 마교의 편이었으니까.

청마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는 널 붙잡아서 무공의 연원까지 파헤칠 것이다.”

“가능하다면.”

낭왕은 청마와 시선을 마주한 채 손아귀에서 뇌기를 굴려 댔다.

“……쯧!”

혀를 가볍게 찬 청마가 등을 돌렸다.

가공할 만한 양의 마기가 장막이 되어 청마의 신형을 감추었다.

그렇게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후우.”

뇌기를 갈무리한 낭왕이 주백경에게 물었다.

“서문 공자는 어디에 있나?”

“검치와 싸우고 있을 겁니다!”

“뭐?”

그 말에 낭왕은 주백경이 가리킨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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