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8)
“노, 놓으세요!”
성하민은 청마의 손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냈다.
순식간에 낭심과 거궐혈, 인영혈을 후려쳤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청마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업(大業)에 쓰일 저울추.
성하민이 서문경 옆에 줄곧 붙어 있는 이유가 존재하리라 여겼다. 칠로두 중 교룡이나 흑향이라면 미리 조처를 해 놨겠지, 낙관적으로 짐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보니 어떠한 족쇄나 굴레도 존재치 않았다.
“누가 이래 놨을까?”
“네이놈!”
저 멀리서 달려든 주백경이 검을 낮은 곳에서 사선으로 휘둘렀다.
서문세가의 동공으로 단련한 탄력과 힘.
소림사 못지 않게 단련한 근육에서 터져 나오는 전신 발경이다.
청마는 감탄성을 흘리고는 왼발을 옆으로 옮겼다.
쐐애액!
일검에 장마가 양옆으로 갈라지다 못해 돌풍으로 화했다. 나뭇잎 아래서 비를 피하던 날벌레가 칼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찢어졌다.
그 속에서 청마는 평온했다. 주백경의 무위를 보고서 감탄은 했으되, 얕잡아보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기예는 제법이지만, 나한테 도전하기엔 이르지.”
왼쪽 눈 아래의 점이 둥글게 휘었다.
저 웃음 뒤로 무시무시한 마기가 견료혈을 따라 오른손으로 향했다.
뒤이어 마기가 청마의 의념에 호응하여 하나의 채찍으로 유형화하니.
흑린신편.
검은 비늘로 얼기설기 얽힌 듯한 채찍이 돌풍을 찢어발겼다.
“……큭.”
주백경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패배가 저도 모르게 떠올랐다.
청마가 중간에 마음을 바꿔먹지 않았다면 단박에 죽었을지도 모를 기억이었다.
‘제아무리 외공을 단련하고 호신강기를 펼쳐도…… 저놈 앞에선 무의미하다.’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최소한 성하민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주백경의 머릿속에 여러 상상이 떠오르고 지워지길 반복했다.
대사부로서 있으면서 배운 병법과 경험.
그것을 토대로 가능성을 끊임없이 구상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카앙!
선공은 가장 무거운 일격부터.
일검적심의 초식이 청마의 미간을 향해 쏘아졌다.
“……호오.”
청마가 조금 전처럼 감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흥미는 없었다.
어차피 이깟 무공으론 흑린신편의 방어를 뚫을 순 없을 테니까.
주백경의 무공도 결국은 서문경에게서 내려온 것이다. 그보다 특출나지 않으면 별다른 감흥이 떠오르질 않았다.
‘여기서 이놈을 제거하면, 서문 공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 생각에 청마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오고 기대감이 샘솟았다.
고난이란 다음에 올 보상과 쾌감에 물을 주는 것.
서문경에게 가장 절친한 수하인 주백경의 죽음은 엄청 크게 다가오겠지.
침착함을 잃고 자신을 찾아 헤매는 꼴도 한 번쯤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꽈아악……!
“아악!”
성하민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주백경에게 들으라는 듯, 내심을 촉박하게 만드려는 협잡질.
청마는 히죽 웃으며 주백경을 도발했다.
“내 한 손도 이기지 못해서야 서문경의 수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닥쳐라!”
주백경의 억눌린 목소리에 단단한 이성이 남아 있었다.
청마가 사뭇 놀랐다.
만일 이곳에 있는 게 서문경이라면 감정의 격류에 몸을 맡겼을 텐데, 수족이라는 놈이 저리 냉정할 줄이야.
일말의 흥미가 샘솟았다.
“제안 하나 하지.”
“……?”
“내가 선공하여 열 초식. 버틸 수 있다면 물러나 주마.”
“하, 하하…….”
“왜 웃지?”
“그러게. 그게 말이지.”
주백경은 고개를 털었다. 오랜 장마로 인해 축축해진 머리칼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비 냄새가 콧잔등을 스쳤다. 불쾌함이 스멀스멀 턱 위로 올라왔다.
가뜩이나 검치의 약점을 찾아서 싸움을 봉합할 상황에, 청마까지 마주쳤으니 정말로…… 진퇴양난이다.
청마에게 시간이 끌려서야 서문경의 안위가 더 위험해질 따름이었다.
하지만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주변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버릇은 군관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버릇이었다.
“네가 검치를 이곳까지 끌고 왔구나.”
“…….”
청마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장마 속에서 청마의 눈동자는 더더욱 침잠해지고 날카로워졌다.
그것이면 됐다.
주백경은 후련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어때, 한 방 먹은 것 같지 않나?”
“……불쾌하군.”
“선공하여 열 초식…… 애초에 내가 받아들일 리 없는 제안이었어.”
주백경은 검을 바로잡았다.
아주 오래 전, 처음 서문세가에서 검을 배우기 시작한 그때를 떠올리면서 입술을 열었다.
“명군(明軍)은 도당(徒黨)의 말에 기울이지 아니한다.”
“당장 이 애를 죽여도 말이냐?”
“괜한 허세는 떨지 마라. 하물며……”
“……?”
“성 소저는 그리 약하지 않아.”
주백경의 말에 끝나기가 무섭게 성하민이 섬전처럼 오른 팔뚝을 휘둘렀다.
쩌억!
번천광검결을 권법으로 변화하여 일 초식.
청마의 옆구리를 강하게 찔렀다. 아무런 방비 없이 얻어맞았으니 선홍색 피를 토하고 내장이 터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분명히 그러할 텐데.
“제법 매섭군.”
청마는 목석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성하민의 손목을 쥔 힘도 그대로였다.
저 광경을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
팟.
주백경의 모습이 사라졌다.
운룡대팔식이 공간을 접어서 이동한다면 무영보는 세상에서 자길 지운다.
기감이나 기척이 통용되지 않는 신법이나, 청마는 상체를 비틀어서 반응했다.
카앙!
주백경이 휘두른 칼과 청마의 흑린신편이 충돌했다.
‘역시.’
주백경의 눈이 흑린신편을 담았다.
서문경과 진무신검의 대화를 통해, 주백경은 청마가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대강 알고 있었다.
청마의 무기는 흑린신편뿐이다. 자유자재로 늘어나고 형상이 변화하는 저 채찍은 호신강기를 찢고 시야를 희롱한다.
그러나 청마만이 저런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성 소저!”
주백경의 외침에 성하민이 곧바로 검을 뽑았다.
서문경이 항상 인정하는 재능.
성하민은 언제나 누군가의 무공을 보고서 기지(奇智)를 터득했다. 자유자재로 무공을 파(破)하고 합(合)하여 새로운 무학이나 초식을 펼치곤 했다.
손목을 잡혀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다르지 않다.
“……!”
청마의 몸이 한순간 옆으로 기울었다. 눈동자가 한껏 커져서는, 갑자기 왜 이렇게 되었냐는 의문이 가득했다.
하지만 주백경의 눈에는 보였다.
‘태허검결……!’
진무신검이 마지막에 창안하여 펼쳤다는 신공.
그것을 자기 멋대로 깨뜨리고 합하여 신법으로 화한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청마가 가녀린 체구의 성하민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그 틈을, 주백경은 놓치지 않았다.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꽈아앙!
주백경의 발이 땅을 짓밟자 장마로 짓무른 대지에서 파도가 쳤다.
서문세가의 동공으로 쌓은 파괴적인 공력.
어떤 기교도 없이, 무식할 정도로 거대한 힘의 폭발이었다.
“……큭!”
청마의 입가에서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배어 나왔다.
가뜩이나 짓무른 땅에 친 파도와 태허검결을 응용한 신법.
성하민의 손목에 힘을 유지할 새가 없었다. 균형을 되찾지 않으면 다가올 칼날이 있었다.
“네깟 것이……!”
“네깟 것이 아니라, 서문세가의 주백경이다.”
다시 한 번 무영보.
주백경은 흔들리는 대지 위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았다.
무영신투라는 희대의 도둑에게서 배운 신법이 있는 한, 폭포수 위에서도 자유로이 거닐 능력이 있었다.
또, 단순히 얻는 것이 아니다.
무영보의 공능은 무무(武舞)에도 있었으니.
‘천주심경의 기둥을, 검극에 담아…….’
과거에 서문경이 적마를 상대로 그러했듯.
주백경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는 보조를 맞추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땅히 해내야 할 때.
핏.
흑린신편의 조각이 뺨을 스쳤다. 마기에 담긴 날카로운 기운이 출혈을 더욱 심하게 일으켰다.
하지만 주백경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금!”
성하민에게 목소리로 신호를 줬다.
당장 여기서 청마를 제거한다면 칠로두 중 둘을 적기에 제거할 수 있는 셈.
주백경은 서문검법에 무공을 섞었다. 서문경이나 성하민에게 자유자재로 할 순 없었지만, 수많은 노력과 시행착오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천주심경의 공명결과 서문검법, 그리고 번천광검결.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신공 셋을 몸뚱이에 담았다.
“……!”
청마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이 자리에 주백경이 아니라 서문경이 있는 것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쉽게 보아서는 안 된다. 최선을 다해서 뿌리치고 역공을 가해야 한다.
그 사실이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하, 이런.”
청마의 손이 움직였다.
파앙!
흑린신편이 주백경과 성하민의 사방을 점했다.
암뢰격천. 한때 주백경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던 초식이었다. 살아 있는 뱀처럼 흑린신편이 가속했다.
주백경은 피하지 않았다.
까가가강!
흑린신편이 수많은 잔상을 흩뿌리며 주백경의 요혈을 집요하게 노렸다.
현혹되지는 않았다. 여태껏 싸운 경험이 실체와 허깨비를 구분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무식한……!’
가히 무한에 가까운 마기.
흑린신편은 휘두르는 것만으로 수없이 분화하고 공간을 넓혔다. 이제는 거대한 나무를 줄기째로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천재는 달랐다.
“……어깨 좀 빌릴게요.”
한 줄기 속삭임이 주백경의 귓가를 스치고.
탓.
성하민은 주백경의 어깨를 밟았다. 경기공을 펼쳐 아주 높게 날았다.
흑린신편이 방향을 바꾸더라도 당하지 않게끔.
청마의 이목을 한순간 현혹할 수 있게끔.
성하민의 몸이 가속했다.
“……저건!”
주백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참으로 형편없는 움직임이었다. 두 무공을 급조하여 억지로 합친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두 무공이 천하에 흉내 낼 수 없는 사람이 없는 보신경이라면 어떠할까?
“허.”
청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운룡대팔식에 덧붙인 무영보.
한순간 다섯 명으로 분화한 성하민이 청마를 향해 쇄도했다.
흑린신편의 방향을 바꾸기엔 사뭇 늦었다. 주백경이 가만히 두고볼 것 같지도 않았다.
“별 같잖은 짓을.”
청마가 낮게 조소했다.
천재라고 하는 것들이 시도하는 것을, 그는 수없이 긴 시간 동안 지켜보았다.
때때로는 감탄했다. 그것도 수백 년 전이었다. 감흥이라는 감정이 사라져 버릴, 이야기에 집착하기 전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과연 그분을 이었다고 할 수 있나.’
공간마다 성하민의 존재감이 선명했다. 급조하여 합친 것이라기엔 요체가 살아 있었다.
청마의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성하민을 공격하기 위해 주백경을 상대하던 흑린신편을 놓았다.
“성 소저!”
주백경의 외침에 다섯 성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
서문검법, 매화검법, 대주천복마검…….
강호를 방랑하며 눈으로 보고 배운 검법을 각기 펼치는 분신.
다섯 성하민의 검극이 장마 속에서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