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7)
꺾이지 않는다.
두 검객 중 누구도 물러나지 않는다.
서문경은 대지에 두 다리를 뿌리박은 채 검을 휘둘렀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를 사방팔방으로 흩어내며 검치와 맞섰다.
선(先)에 맞서는 선(線).
두 선이 부딪치며 생겨나는 공력의 일렁임.
장마에 돌풍이 동반한다.
검을 붙잡은 손목에 점차 시큰거리는 통증이 덧붙고 숨이 조금씩 벅찼다.
‘아직 멀었어.’
충격을 받아 내는 태충혈과 견료혈에서 으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검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장마 속에서 더운 숨을 내뱉으며 축축 젖은 표정으로 서문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호의는 이제 없었다.
“이놈…… 아까부터. 내 무공을.”
어릴 적 우연히 창안한 뒤로 평생 동안 갈고 닦은 신공, 번천광검결.
양명성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은 비결을 서문경이 척척 해내는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아주 예전에 타인의 신분과 외견을 위장하고 있던 흑향과 마주했을 때처럼.
서문경이 번천광검결을 펼치는 움직임이 점차 간소화되고 있었다.
익숙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검치의 번천광검결과 자기가 펼치는 것에 대해서.
“빼앗는 거냐?”
검치의 목소리에 흔들림이 있었다.
의심하지 않던 무공에 실낱 같은 흠집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서문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았어.”
거짓말이었다.
번천광검결은 겨우 세 초식으로 다른 구파일방의 검술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이기어검과 중검을 뛰어넘은 강검, 연환 속검의 조화는 서문경의 인지에서도 받아 내기가 어려웠다.
무공사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배울 기회는 없었겠지.
하지만 서문경에게 필요한 것은 인정이 아니라 필사적인 허세였다.
“당신에게 직접 배우지 않고도 이렇게 펼치고 있잖아.”
허세를 부리는 와중에 살짝 베인 허벅지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빗물을 너무 맞아서인가, 체열이 조금 올랐다.
몸의 상태는 점차 안 좋아지고 있었다.
오래간다면 보다 완성된 무인인 검치에게 필패할 상태였다.
허나, 물러나지 않는다.
서문경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얼핏 알아차렸겠지. 검을 나눌수록 내가 더 배워 간다는 것을.”
“…….”
“그만 관두고 내려가는 건 어때? 아니지. 아예 우리 쪽에 붙잡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부끄럽지 않게 잘 연기해 줄게.”
“헛소리.”
검치가 고개를 털었다.
길게 기른 장발에서 빗물이 우두두 떨어졌다.
가뜩이나 야인(野人) 같던 인상이 더욱 험상궂게 변해서, 검을 든 야차가 따로 없었다.
서문경은 그를 가만히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 혹시 제자 때문인가?”
“……시끄럽다.”
검치는 곧바로 부정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서문경이 어떤 인간인지는 이해했다.
나이답지 않은 경지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상대의 의중을 살피거나 떠보는 실력.
자신이 보기에 서문경은 십수 년 동안 전장에서 뒹군 노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랬군.”
서문경의 얼굴에 얼핏 확신이 보였다.
검에 잔뜩 묻은 빗물을 떨치는 모습에서 일견 자신감이 보이는 듯하다.
검치는 인상을 찌푸렸다.
‘마교가 아니더라도 정의맹이나 서문세가에 약점을 잡혀봐야 결국 똑같을 뿐이야.’
검치에게 천하의 안정과 혼란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사느냐였다.
누군가를 위해서 검을 드는 건 과거에 충분히 해 봤다.
평안한 노후와 자기 무공을 이을 제자를 위해서만 들고 싶었다.
이기적이어도 상관없다.
검치는 서문경에게 검을 겨눴다.
“비켜라. 너까지 베고 싶진 않으니.”
“끌려다니는 꼴이 뉘 집 개X끼나 다를 바 없군.”
“……뭐라고 한들.”
“쓰레기라고 해 둘까?”
서문경이 낮게 웃었다.
검치가 왜 마교를 돕게 되었는지 내막이 보였다.
청마의 말투를 빌리자면, 참으로 시시한 일이 아닌가?
제자가 붙잡혀서 재야에 있던 스승이 손에 피를 묻히게 되고…… 계속해서 끌려다니는, 시시한 이야기.
발목에 쇠사슬을 달린 꼴이야 자기가 잘 알 것이다. 그러고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건 검치의 아둔함과 이기심 때문이었다.
자기 제자가 천하보다 귀한 것이다.
그것이 본래 군관인 서문경에게는 참으로 우스웠다.
“사제(師弟)가 그리 중한가?”
“……가족과 같지.”
“시체로 산을 쌓아도?”
“나와는 별개인 남이니까.”
“쾌남인 척은 다하더니, 별 볼 일 없는 놈이었군. 존경할 만한 건 검술뿐이었어.”
서문경은 진심으로 검치가 한심하게 보였다.
가치관이 다르다는 표현으로 끝날 게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풀려날지도 모르는 제자의 구명을 위해서 수십, 수백의 소림사를 베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도저히 공감해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주 무사나 하민이와 함께 합공하는 게 나았을 텐데.’
이런 놈이라면 정의맹에 들여도 언제든 틈이 생기면 도망치지 않겠나.
서문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이제부턴 진심을 다하지.”
“…….”
경멸이 한껏 담긴 서문경의 시선에 검치는 속이 문드러지는 것을 느꼈다.
모순임을 자기도 알았다.
자기 말을 그대로 따르자면, 마교와 싸우겠다고 자신의 말을 어긴 양명성을 버리고 떠났어야 했으니까.
그러지 못한 것은 정 때문이었다.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한 회한과 보듬어야 한다는 망설임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래, 차라리 여기서 저놈에게 번천광검결의 모든 것을 보여 주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나.’
어차피 서문경을 꺾고 소림사를 멸문시켜도 끝나지 않을 무간(無間)이 펼쳐져있다면.
여기서 새로운 문외제자를 들여도 상관없을 것이다.
검치는 이기어검을 펼쳤던 검을 붙잡았다.
“오냐. 와라.”
그와 동시에 검치와 서문경이 다시 한번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 * *
“너무 빨라요!”
성하민이 등 뒤에서 속도를 늦추자고 했지만, 주백경은 아예 듣지도 않았다.
서로 공수를 짜고 있을 거란 건 낙관적인 상상에 불과하단 걸 조금 전에 깨달았다.
얼핏 보았던 검치의 검격.
그의 강함을 생각하자면 서문경이 언제까지 백중세를 유지할지 몰랐다.
“얼른 찾아야 합니다.”
“무,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아직 모르잖아요.”
“주변의 마인과 동혈을 뒤지다 보면 알겁니다.”
스르르륵.
주백경의 신형이 숭산 이곳저곳을 주파했다.
극성에 가까운 무영보에 성하민으로서는 뒤따라가는 것조차 벅찼다.
하물며 장마가 쏟아지고 있지 않나?
‘이러다가는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데…….’
서문경의 걱정에 자기 안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러다가 아예 주백경의 뒷모습조차 능선 밖으로 사라졌다.
성하민에게 무언가 중얼거리긴 했지만, 전음이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막혔다.
이걸 어쩌면 좋나.
성하민은 잠시 멍하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겨우 며칠 사이에 일이 이렇게 꼬인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전대 신승님에게 도움을 받았더니, 갑자기 급사하시고…… 검치를 다시 만나서 싸우게 되었다니.’
이제는 검치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찾아서 숭산을 헤매고 있다.
성하민의 입가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막막함이 이성을 앞섰다.
‘어쩌면 좋지.’
뺨과 전신을 두드리는 장마.
그 속에서 성하민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음기가 가득하구나.’
남들은 비가 오면 음기에 감각이 둔해지고 상처가 악화되기 마련인데, 예전부터 이런 날씨에 유난히 강했던 성하민이었다.
전대 신승에게 무언가 치유를 받고 나서도 똑같을까 싶어서.
잠깐 가만히 있는데 등 뒤에서 우산이 드리워졌다.
적어도 주백경은 아니었다.
“……이것 참.”
우산을 든 남자의 목소리에서 감정의 고저는 느껴지지 않았다.
흥미 혹은 의구심.
무언가를 관찰하는 시선이 전신을 빽빽하게 핥았다.
찝찝하고 불쾌한 감정이 성하민의 가슴에서 확 솟구쳤다.
“누구시죠?”
“예전에 뵌 적이 있지요.”
“……!”
그 말에 성하민이 등을 돌렸다.
갑자기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청마.
가장 꿍꿍이가 더럽다던 칠로두이자, 속을 알 수 없는 마인.
서문경에게 그렇게 들었지만 실제로 마주하고 보니 인상이 무언가 달랐다.
“뭐, 뭐예요?”
“마땅히 드려야 할 대접입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청마가 빙긋 웃었다.
타인이나 적을 마주한 것이 아니라, 군신(君臣)의 예를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너무나도 기이하고 이해할 수가 없어서, 성하민은 평소라면 하지 않을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었다.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 있겠어요?”
“……음.”
뜻밖에도 청마는 진심으로 고민하는 듯, 다른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우산을 든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성하민에게 빗물 하나 맞게 해선 안 된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뭐지?’
설마 자신을 놀리려고 이러는 건가?
성하민이 고민하는 사이에 청마가 입술을 달싹였다.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지요.”
“……뭐?”
“모든 일이 끝나면, 기꺼이 그럴 수 있다는 뜻이지요.”
참으로 두루뭉술한 말이어서 성하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보세요. 대체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아니, 애초에 왜 존대를…….”
“자격이 있으니까 그랬지만, 뭐, 불편하다면 그만 해야지.”
청마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러다가 어딘가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단 걸 느낀 건지, 성하민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까지 놀고 있던 거 아니었나?”
“뭐를요?”
“서문경 옆에서 얼쩡거리면서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면…… 음, 이상한데.”
청마의 표정이 한순간 차갑게 변했다.
“잘못된 건가?”
척.
청마가 성하민의 손목을 붙잡은 순간.
“그만!”
주백경이 멀리서 검을 내던졌다.
무영신투의 재주로 빗물을 거슬러서,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투검의 기예였다.
청마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화에 끼어들 자격이 되질 않아.”
적마라면 몰라도 감히 자신에게 이런 기예는 통용되지 않는다.
청마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빗방울 하나가 검은색으로 변하고는 칼끝을 막아 냈다.
물론, 그에게 중요한 건 주백경이 멀리서 달려드는 게 아니었다.
“어디서 잘못된 걸까?”
청마는 성하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