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6)
카캉, 캉! 카르륵……!
수십, 수백의 검기가 허공에 난립한다.
벽력(霹靂)과 화무(華茂).
빠르고 화려하기가 눈으로 보아서 좇을 수 없다.
오로지 검객의 감과 의념만으로 받아쳐야 했다.
눈을 뜨기조차 버거운 장마.
수백 번을 부딪치며 뜨겁게 달아오른 칼날에 빗방울이 증발해, 운무가 피부에 불쾌히 달라붙는다.
서문경과 검치 사이에 이제 대화는 없었다.
의지가 부딪칠 뿐이었다.
몇 번을 꺾여도 투쟁하여야 한다는 젊은 군관과 과거의 실패를 뼛속 깊이 후회하는 노년의 무인.
그들이 그리는 검기가 장마의 빗방울과 운무 속에서 심상으로 화했다.
까앙!
서문경이 전심전력으로 휘두른 검기에, 검치는 귀찮다는 듯 후려치며 도망치고.
스윽, 촤악!
운룡대팔식의 걸음이 공간을 희롱하며 다가오면, 깜짝 놀랐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검치가 이기어검을 펼쳤다.
빗방울 하나가 둘로 갈라지다가 수십 조각으로 찢어졌다.
운무에 수백의 격자가 새겨지며 사방으로 퍼졌다.
가공할 만한 공력으로 인해 일어난 파장.
빗물을 머금은 태풍이 두 검객을 흠뻑 적시고 뒤로 밀어젖혔다.
그사이에 서문경은 앞머리를 뒤로 밀었다.
폐부에 고인 숨을 훅 내뱉고는 검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목줄이라도 잡힌 건가?”
“…….”
“젠장, 차라리 돌덩이랑 이야기하고 말지.”
서문경이 검을 꽉 쥐었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검법이 휘몰아치고 서로 조합되거나 부딪치고 있었다.
서문검법을 중심으로 하여 다섯의 검술, 하나의 창법.
각자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으나 어느 하나 뒤떨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신검을 궁구히 익힌 절대고수와 부딪칠 만하단 생각이 불쑥 들었다.
‘화려함은 매화검법을, 광대함은 창궁무애검법을, 태극의 묘리는 태허검결에…….’
검치가 익힌 번천광검결 또한 무공사전에 있다.
잘 싸운다면 이곳에서 검치를 제압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서문경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올라올 때쯤.
검치가 줄곧 쓰고 있던 갓을 벗었다.
“……아까부터.”
“……?”
“아까부터 내 검법에 다른 무류를 섞어서 쓰고 있던데. 언제부터 그랬지?”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검치가 허허롭게 웃었다.
강요된 싸움에 지쳤으나 서문경의 무공을 보고 무언가 느낀 바가 있어, 어린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비록 나에게 직접 사사하진 않았지만, 번천광검결의 일맥을 이었다고 자칭할 만큼 배우지 않았냐. 당연히 나한테 한 소리 들을 만한 위치지.”
“그래서?”
“잔재주는 참 많이 늘었는데. 그게 다야.”
글깨나 배웠다고 하는 것들은 제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이런 장마를 맞다 보면 부서진다고 어깨를 으쓱댄다.
하지만 무인의 길은 다르다.
어찌 장마가 며칠, 몇 주가 오길 바라겠나?
하늘에게 기대지 않는다.
여러 잔재주로 대성하길 기대하지도 않는다.
검치는 검지 손가락을 폈다.
“단 하나. 무인으로 대성하기에는 하나로 충분한 거야.”
“……!”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치의 전신에서 여태껏 보지 못한 위압감이 올라왔다.
기교는 없었다.
번천광검결의 세 초식을 이리저리 엮어서 펼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자기가 직접 말한 대로, 단 하나.
서문경의 눈이 한순간 검치의 신형을 놓쳤다.
“천광검(天光劍).”
등 뒤에서 들려온 자그마한 소리.
서문경은 곧바로 운룡대팔식을 펼쳤다.
쏟아지는 빗물 사이에서 분연히 솟구친 형세였다.
하지만 검치가 휘두른 검의 속도는 운룡대팔식을 아득히 능가했다.
스겅!
“……크윽!”
섬뜩한 칼날이 서문경의 종아리를 스쳤다.
자칫 잘못하면 힘줄까지 끊어졌을지도 모를 일격이었다.
‘분명 천결이었어.’
서문경은 검치의 일격을 머릿속에서 곱씹었다.
두 호흡을 중단으로 끌어 쓰는 광검, 천결의 위력은 자신이 펼쳐도 뛰어나지만 공간마저 희롱하는 운룡대팔식을 따라잡진 못했다.
검치의 번천광검결은 다르다는 걸까?
뜨거워지려는 머리를 빗줄기가 식혔다.
가슴 속에서 움트려는 두려움 또한 수그러들었다.
‘지금은 움츠러들 때가 아니야.’
서문경의 머릿속, 상단전에 새겨진 천주.
그곳에 신비한 무공사전으로 얻은 무학이 수없이 새겨져 있었다.
서문경은 천주를 손으로 더듬으며 지금까지 익히고 수련한 검술을 이리저리 뒤섞어 검으로 체화했다.
스슥, 촤라라락……!
운룡대팔식의 움직임과 천변만화하는 검술.
초감각을 가진 고수일지라도 예지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검치마저도 수십 초 동안은 방어에 온 힘을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길지 않았다.
“백야흔이나 적마 같은 놈이라면 맥을 못 맞췄겠지만…….”
검치의 말이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검을 쥔 손목에 힘줄이 바짝 올라왔다.
벌써 답을 찾았다는 걸까?
서문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심상에 새겨진 천주를 검으로 유형화시켰다.
쩌엉!
쇠기둥이 내리꽂힌 듯한 굉음.
서문검법 특유의 중검(重劍)이었다.
검치의 입가에서 끄응, 하는 소리가 새었다.
그럼에도 눈에 총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검(劍)을 논하고자 한다면, 본질부터 완벽히 익혀야 하는 법이지.”
검치는 어린 제자를 꾸중하듯 중얼거렸다.
서문경의 경지는 분명 자기 나이를 아득하게 넘어섰다. 다룰 줄 아는 검의 종류 또한 나이가 지긋한 검객이어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화검과 중검, 광검에 어검까지…….
검술의 천재가 있더라도 서문경에게 미치지 못한다.
자기 제자인 양명성도 서문경을 이기지 못해서 일 년 동안을 분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마주쳐서 사투를 경험하니 어렴풋이 알겠다.
“너, 이것저것 잡다하게 익히다가는 칼날이 무뎌질 거다.”
검치는 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휘르륵, 콰아앙!
다시 한번 천결.
검치가 가볍게 내쉰 숨이 운무마저 밀어냈다.
저 두 호흡이 한 번에 펼쳐진 강검이었다.
장마의 방향이 한순간에 뒤집힌다.
한 사람.
무인의 힘이 대우주의 흐름을 바꾼다.
그 끝에는 서문경이 있었다.
‘뭐 이딴……!’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비가 방향마저 바꿀 정도로, 검치의 천결은 상리에서 벗어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먼 미래에 자기 힘을 완벽하게 파악한 백야흔이 그나마 저 검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서문경은 피부가 벗겨질 것만 같은 풍압과 마주했다.
머릿속에 여러 초식이 떠오르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익힌 것이 너무 많다.
검치가 말한 대로 무공사전으로 여러 무공을 가리지 않고 배웠다.
서문검법에 뒤섞으려는 노력을 해서, 순수성은 예전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것에도 가치가 있다.
“……후우.”
번천광검결의 천결과 창궁무애검법을 한데 섞는다.
두 호흡에 본래 존재하지 않던 광대함이 있다면 검치와 같은 힘을 지니지 않더라도 모방할 수 있다.
서문경은 그 중심에 가전무공을 끼워 넣었다.
천주심경을 유형화한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일검적심.”
무인이 초식명을 중얼거리는 것은 단순한 멋이 아니라, 심상을 뚜렷하게 불러오기 위한 주문 같은 것.
운룡대팔식을 연거푸 펼쳐 시야가 마구잡이로 뒤집히더라도 ‘일검적심의 검형’만은 흔들리지 않고 펼칠 수 있다.
서문경의 검이 앞으로 그대로 내질러졌다.
꽈아앙! 까드드득!
쇠붙이가 부딪치며 떠오른 불똥이 빗물을 한순간에 증발시켰다.
운무는 더더욱 짙어진다.
시야는 극히 좁아지고 전신이 끈적끈적해진다.
그러나 두 검객은 개의치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상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도, 서로가 펼치는 심상이 등대가 되었다.
‘여긴가.’
‘잡스러운 검법을 또……’
운무가 심상의 도화지가 되었다.
서문경은 무공사전을 통해 배운 검법을 서문검법에 덧붙여서 펼치거나, 천주를 그대로 휘둘러 검치를 찌그러뜨리고자 했다.
그야말로 천변만화.
매화검법이 하나의 무류 안에서 무수한 변화를 그리고자 한다면, 서문경은 본디 한 사람이 모두 익힐 수 없는 ‘무한의 검’을 심상 속에서 길러 왔다.
비록 검술마다 검치가 말하는 달인(達人), 혹은 무극(無極)에 이르지는 못하겠지만…… 상관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검의 완성이 아니야.’
천마를 꺾기 위한 검.
그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만들기 위한 힘.
무공사전을 가지고 다니면서 무인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매료되지는 않았다.
서문경은 군관으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그래서 구파일방 앞에서 고개는 숙였으되 존중하거나 존경하지는 않았다.
정의맹으로 모조리 징발하여 마교와 싸우게 만들 것이다.
그것을 위해 소림사까지 와서, 신승을 설득하지 않았나.
서문경의 입술이 한쪽으로 비틀어졌다.
“사실은 말이야.”
“……?”
“내가 뒤늦게 나타난 이유가, 그쪽처럼 하려고 한 거거든.”
그 말에 검치가 푸하하 웃어젖혔다.
듣는 순간 이해했다.
서문경과의 만남은 길지 않았지만, 그 기질만큼은 충분히 알아차리고 있었다.
자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서문경이 직접 얼굴을 감추고 나타나 빈객들을 겁박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미친놈이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쁘게 생각하진 않았다.
저만한 경지에 오르면 보통 삐뚤어지기 마련이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군관이라면 더더욱 그러하겠지.
검치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내가 괜히 나섰구나.”
“당신 덕분에 추잡한 짓을 하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지.”
서문경은 사납게 웃으며 검치를 연신 압박했다.
매화검법부터 시작하여 태허검결, 대주천복마검에 이르기까지.
신비한 무공사전으로 익힌 깨달음을 모두 서문검법에 실었다.
그야말로 대해(大海)에 가까운 연격.
그만큼 움직이고 있자니 감각이 서서히 멀어졌다.
비가 오고 있다는 촉감과 불쾌함이 뒤로 밀어 나갔다.
남은 것은 오로지 자신과 검치.
두 기척만이 남아서 서로의 검을 부술 듯이 싸웠다.
“어린놈이 영약을 얼마나 처먹었으면……!”
검치가 혀를 차는 와중에도 서문경은 극도의 집중력으로 검법을 펼쳤다.
‘가능해. 이길 수 있어.’
서문경의 검이 조금씩 검치에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뛰어난 재능에 더불어서, 왼손에 쥔 무공사전.
그 기물이 검치의 번천광검결마저 베끼겠다는 듯 미처 알지 못했던 가르침을 서문경에게 전달해 주고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