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5)
짧은 시간 동안, 두 검사는 서로를 직시했다.
빗줄기가 눈가를 두들기고 검을 충분히 적셨다.
고양되는 정신이 느슨한 육체를 점차 예리하게 빚었다.
열 걸음.
그깟 거리쯤,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 수 있다.
서문경과 검치는 칼의 길이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를 이룬 종사(宗師)였다.
그래서였다.
카앙!
“……!”
속공을 넘어선 극쾌(極快), 혹은 극섬(極閃).
검치의 손이 움직였다.
그 순간에 서문경의 오른 어깨가 뒤로 밀렸다.
번천광검결의 천결. 두 호흡을 길어 쓴 광검이라.
서문경은 숨을 훅 내뱉었다.
‘서풍광아.’
서문검법의 검기가 순식간에 주변 삼 장을 점했다.
번천광검결의 광결. 하단전을 쉼 없이 두들겨 펼치는 연환 속검이 검치를 노렸다.
“……역시.”
검치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적권청.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이 평소라면 듣지 못할 잡소리마저 잡아내고 쥐꼬리만 한 살기를 예지에 가깝게 느낀다.
또옥.
빗방울 하나가 서문경의 손등을 때렸다.
그 순간에 두 검이 얽히며 서로의 목을 노렸다.
촤아악……!
강대한 힘이 실린 직선이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갑작스레 휘어진다.
검에 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시도조차 불가능한 기예.
“재수 없는 놈이야.”
검치가 입술을 씰룩였다. 바로 눈앞에 번천광검결을 제멋대로 익히고서 자기 것으로 만든 놈이 있었다.
양명성이 저런 천재였다면 청마에게 허무하게 잡히지 않았을 텐데. 더 잘 가르쳤어야 했는데.
후회가 가슴속에서 방울졌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가 점차 거세졌다.
검치의 검이 그 빗방울을 갈랐다.
저 칼끝을 서문경이 추격했다.
카앙!
두 검이 부딪치자 허공에서 큰 파문이 일었다.
빗발치던 빗줄기가 작은 동심원을 그리며 터져나갔다.
같은 검술에 덧붙인 절반의 호흡.
숨을 짧게 내쉰 서문경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진각을 강하게 밟았다.
촤아악!
작은 웅덩이에 차있던 빗물이 위로 치솟았다.
시야가 한순간 운무와 뒤섞여 좁아진다.
검을 받아치기 위해서는 예지에 가까운 직감이 필요하다.
찰나를 깎아서 만들어진 간극.
하나의 판단이 목숨을 판가름하는 순간에 검치는 문득 입술을 비틀었다.
‘묘해.’
번천광검결을 제대로 가르쳐 준 적은 없을 터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익혀서는 보라는 듯, 똑같이 펼치고 있는 저 꼴이.
가당치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서문경의 초식을 보면서 품평하거나 억지로 트집을 잡고 욕했을 것이다.
지금 또한 즐겼겠지.
서로가 펼칠 초식을 의심하는 일 없이, 원 없이 싸워 보자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서문경의 의도였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감히 놀리려고 들어?’
과거에 칠로두와 싸워서 쌓은 경험과 본능.
검치의 검이 손아귀에서 반회전했다.
똑바르게 쥐었던 검이 한순간 역검으로 바뀌어 암살자의 단도처럼 변했다.
“……!”
검이라면 뭐든 형태조차 가리지 않고 펼칠 줄 안다는 걸까?
서문경은 곧바로 보폭을 좁혔다.
떠오른 검술은 신비한 무공사전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온전히 몸에 완전히 익은 것이었다.
검견불퇴.
감각을 한순간 끌어올리곤 안법으로 검치의 검로를 읽었다. 그러나 확신하지는 않았다.
스르릉……!
검치의 번천광검결에는 두 호흡을 길어 쓰는 신검이 있었으니.
“공자님! 가세하겠습니다!”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주백경이 보법을 펼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서문경은 검치의 검을 어렵사리 비껴 내며 고개를 저었다.
“끼어들지 마!”
“……예? 하지만!”
“이건 내게 맡기고. 다른 곳으로 흩어져!”
서문경의 말은 언뜻 들으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앞에 신승보다 고수라는 검치가 있는데 합세하여 싸우는 게 아니라 흩어지라니?
도망치라는 소리인가 싶어서 주백경이 잠시 망설였다.
그 모습을 본 철반검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라지 않습니까! 갑시다!”
“하지만…….”
“주 무사님.”
성하민은 주백경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마침 떠오른 것이 있었다.
왜 검치가 여기까지 와서 소림사와 싸우는가?
이에 대해 서문경도 모른다고 했었다.
하물며 성하민은 잠시나마 검치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저렇게 싸우게 된 이유를 우리가 찾는다면…… 멈출지도 몰라요.”
“……음.”
주백경도 그제야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하기야, 검치가 저렇게까지 악독하게 서문경을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게 납득이 되질 않았다.
필시. 이 일 뒤에 흑막이 있을 것이다.
‘아마 검치의 행동거지를 지켜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여러 명이 포진해 있겠지.’
주백경은 대사부로 있으면서 배운 병법과 암계를 떠올렸다.
그제야 서문경의 싸움이 새롭게 보였다.
언뜻 보면 검치의 검에 살기가 한가득 담겨,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검치의 검술을 잘 알기에 저런 합을 이룰 수 있는 거겠지.
‘역시나 대단하시다.’
빗겨내는 것이 잘못되면 어깨가 잘리고 목이 도려내질 싸움에서도 이런 계책을 떠올리다니.
주백경은 서문경에게 자그맣게 예를 취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 뒤를 성하민이 뒤따랐으나, 철반검은 다소 망설였다.
“저까지 따라갈 이유가 있겠습니까?”
“소림사로 살아서 갈 자신이 있다면은.”
“…….”
철반검은 울상이 된 얼굴로 따라갔다.
* * *
일보, 일격.
뒤따라오는 뱀의 송곳니와 가끔씩 펼쳐지는 이기어검.
서문경은 검치의 호흡에 따라가기가 벅찼다. 번천광검결을 삼 년 동안 깊이 익혔다고 자신하던 것이 점차 힘겨워졌다.
‘정말로 강하다.’
만전의 진무신검이 유유무극검과 태허검결을 펼친다면 이런 느낌일까?
장마 속에서 검은 갓을 눌러쓴 검치는 선계에서 내려온 검선(劍仙)과 다를 바 없었다.
휘두르는 곳마다 파공성이 터지고 동심원에서 퍼진 물방울이 눈가와 혈도를 노렸다.
그 모든 움직임이 철저하게 절제되어있다.
서문경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거나 죽이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오싹하구만.’
서문경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검치의 검은 무겁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라, 예상하기가 불가능했다.
당장 번천광검결이 어떤 검술이던가?
상단전의 심상과 의념을 끌어다 쓰는 어검, 두 호흡을 끌어 쓰는 광검, 일검에 수십의 검기를 담아서 휘두르는 연격까지…….
어느 하나 뒤떨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검을 보고 판단을 확정지으면 뒤이은 검에 손목과 목을 당한다.
“……후우.”
숨을 가볍게 내쉬는 순간에 검치의 검이 눈앞까지 휘둘러졌다.
시야가 그림자와 운무에 어둡게 물드는가 싶더니,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툭, 투둑.
빗방울이 검을 두드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가까워진다.
서문경의 등허리에 닭살이 돋았다.
“큭!”
서문경은 등을 뒤로 젖혔다.
숙련된 철판교의 수법이었으나, 검치가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처음 보았을 때도 이랬었지.”
하지만 두 번은 통하지 않는다는 듯.
검치의 검이 허공으로 부유했다.
상단전의 의념으로 움직이는 이기어검, 천결의 기예가 삽시간에 가슴을 관통할 듯 쏘아졌다.
“막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어라.”
일찍이 마교와 싸워서 굴복하고 숨어 다닌 은자(隱者)의 마음이었을까?
검치의 목소리는 지금 내리는 장마처럼 축축하고 음울했다.
서문경은 번검유회를 펼쳐 천결을 튕겨 내고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패배자처럼 말하기는……!”
“뭐?”
“처맞으면 짖기라도 해야지, 막지 못한다면 죽어? 그게 뭔 미친 소리야?”
이런 소리를 듣자고 소년의 몸으로 무림에 나갔던가?
그렇지 않다.
서문경은 마교와 맞서 싸우기 위해 온갖 억지를 부렸고, 때로는 목숨을 걸었다.
그 필사적인 마음을 검치가 알 리는 없었다.
당연했다.
겨우 약관도 되지 않은 소년이 이리도 진지하게 싸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백야흔을 무찌르지 않았나.
옆에 있던 진무신검과 무영신투도 싸울 각오를 마치고 신승마저 도운다고 했는데……!
“경지가 아까워, 하늘도 무심하지. 이딴 겁쟁이 새끼한테 재능을 줘서. 답답하게.”
서문경은 검치에게 욕을 쏟아 냈다.
정확하게는 하늘을 향한 것이었다.
얼마나 무심하면 마교와 맞서 싸울 인재가 이리도 적은데 패배자만을 내려 보냈냐는 답답함이었다.
“힘을 합해서 싸워도 모자랄 판에 당신 같은 고수가 소림사를 죽이겠다고 온 이유가 뭐야?”
“…….”
“제기랄, 주변에 보는 눈이라도 있을까봐?”
촤아악!
서문경은 칼을 강하게 휘둘렀다.
전력을 다한 검기가 주변의 빗줄기를 가르고 나무까지 베어 넘겼다.
세밀하기까지 한 공력 운용.
그 안에서 퍼진 파문이 산기슭까지 거슬러 내려갔다.
아무리 은밀하게 숨어 있어도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끔, 전력을 다한 검격이었다.
쩌적, 쿠구궁……!
나무가 우수수 떨어지며 먼지가 피어오르다가, 빗줄기에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후에도 마인은 보이지 않았다.
“보십시오! 여기에 누가 있다고……!”
“상관없다.”
검치가 한손으로 빗물로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쓸어 냈다.
서문경에게 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상황을 기껍게 여기지 못한다는 것을.
이곳에 없는 누군가에게 압박당하고 있는 것 역시.
“나는 오늘 소림사를 무림에서 지우기 위해 왔다. 그건 변하지 않아. 누가 있든, 날 막으려거든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보다 차라리 죽여라.”
“미친놈!”
서문경은 야수와 같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못 죽여! 이 장마가 끝날 때까지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사지를 부러뜨려서 제압시키고 노예로 부려먹을 거다!”
“……도망칠 기회를 줘도?”
“여기서 도망칠 거라면 백야흔과 싸우지도 않았겠지.”
서문경의 검이 검치에게 겨누어졌다.
그러나 살기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마교와 싸울 패, 혹은 동맹으로서 제압하겠다는 의미가 가득했다.
“……제기랄.”
검치의 입가에서 깊은 회한과 짜증이 뒤섞여 나왔다.
이 지긋지긋한 굴레가 너무나도 싫어서 도망쳤거늘, 되돌아왔다는 것이 너무나도 힘겨웠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