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4)
철반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곧 알게 된다니?’
그 뜻이 무엇이건, 자신은 숭산의 동혈에 있는 처지였다.
생사여탈권이 남에게 쥐여 있다.
그 말인즉, 언제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철반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조용히 하겠다는 듯 입을 틀어막은 주백경에게 눈짓했다.
이에 주백경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리는 지르지 마시오.”
“…….”
“좋소. 잘 알아들었다니 다행이군.”
주백경이 철반검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평소 친절하다는 성품으로 정평이 나 있는 무사인데, 갑자기 차가워진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철반검은 서문경과 주백경의 눈치를 살살 보았다.
“저…… 이제 우리는 어쩌면 좋습니까?”
“좋은 질문이야.”
흑의인의 시체를 처리하고 온 서문경이 빙긋 웃었다.
다른 때였다면 그저 웃는구나 하고 넘겼을 텐데 왠지 모르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철반검의 시선이 잠시 서문경이 든 칼로 향했다.
‘분명…… 갓을 쓴 사내와 비슷한 검술이었는데.’
“아까 물으려고 했지?”
“예?”
“검술이 비슷하게 보인다. 이게 무슨 일이냐…… 이렇게 물으려고 했던 거 아니야?”
“마, 맞습니다.”
어차피 속내를 들킨 것, 솔직하게 말하자.
철반검은 사내의 손목에서 보인 기교와 서문경이 비슷해 보였노라고 직언했다.
서문경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겹쳤다.
“과연…… 강호에서 처음 배운 신공이라 손에 익었나 보네.”
“신공이라니요? 그놈은 마인이 아니었습니까?”
“마공이면 살아 있었을까?”
“…….”
철반검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서문경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갓을 쓴 사내가 죽이려고 했다면 진즉 수십 번은 죽었을 몸이었다.
적어도 살인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을 터.
그제야 오해임을 깨달은 철반검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공자님을 흉수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
왠지 모르게 반응이 찜찜하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의심을 품었다가는 관계 자체가 어그러질지도 모른다.
철반검은 턱 끝까지 올라온 호기심을 내리눌렀다.
그 모습을 본 서문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검치라는 고수를 아나?”
* * *
‘……최악이군.’
갓을 쓴 사내, 검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놈의 정이 뭔지.
화산파로 향했다가 붙잡힌 양명성 때문에 다시 마교의 주구로 일하게 되었다.
그것도 소림사를 단신으로 압박하여 멸문시키라는, 청마의 과한 명령이었다.
-아예 혼자 보내는 건 아니잖아? 적마 휘하의 마인들을 보낼 테니까 잘 구슬려서 해 보라고.
청마의 간악한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그놈이라면 양명성을 곱게 돌려주진 않을 것이다.
돌려주더라도 언제든 다시 붙잡을 수 있도록 수를 써 놓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양명성을 버리질 못했다.
지긋지긋한 어린 것 때문에.
-네 제자도 너처럼 고수가 되지 않을까……?
청마의 눈웃음에는 때려죽이고 싶어지는 마력이 있다.
자신의 과거사를 살살 긁으면서 양명성도 같은 길에 걷게 해 주겠다는 묘한 협박.
검치는 세 치 혀에 굴복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마교에 다시 몸을 들였다.
‘한데 여기서 그놈을 만날 줄이야.’
서문경.
양명성이 직전제자라면, 서문경은 내심 문외제자로 여기고 있었다.
적마와 단신으로 맞서 싸워 내쫓았을 땐 직접 나타나서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이 꼬였다.
호기 넘치게 나섰던 양명성이 붙잡히는 바람에, 최악의 재회를 하게 생겼다.
그 마음이 검치의 내심을 억죄었으니.
“검치. 뭐 하는 짓이지?”
자신을 은밀히 감시하던 마인이 요사한 눈을 드러냈다.
“당신의 경지라면 무인을 구하던 사내를 벨 수 있었을 텐데……?”
“비가 너무 내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눈에 빗물이 들어가서 순간 놓쳤단 말이다.”
검치의 전신에서 한순간 시뻘건 살의가 솟구쳤다.
기세만으로 유형화할 수 있는 절대의 경지.
적마에게 직접 마공을 전수받은 마인일지라도 맨몸으로 버틸 수 없었다.
“끄윽…… 이러면 네 기분이야 나아지겠지만, 후환이 두렵지 않나?”
“후환?”
검치가 한쪽 입술을 뒤틀었다.
명백한 비웃음에 마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장 출수하겠다는 듯, 붉은색 마기가 손끝에서 일렁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웃어?”
“웃지.”
검치는 마인의 무지함이 부러우면서 한심했다.
저들이 따르는 적마는 청마에게 붙잡혀 있으며, 매번 심부름에 끌려다니는 처지였다.
마인이 이곳에 온 이유 또한 ‘심부름’에 불과하다.
서걱!
검치가 마인을 순식간에 양단했다.
핏물이 장마에 뒤섞여서 산길을 따라 질척거렸다.
기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것도 한심한 화풀이에 불과했다.
‘청마라면 저놈들이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겠지. 죽이면 다른 놈이 와서 날 감시하면 끝이야.’
적마의 속이야 상하겠지만, 청마에게 약점을 잡힌 순간 앞으로 수십 년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인이 말한 후환은 당할 수가 없다.
수십 년 안에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
검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친 원숭이 새끼야…… 내가 떠나자고 했을 때 말을 들었으면 됐잖냐.”
아예 중원을 떠나서 북쪽으로 향했다면 다른 인생을 모색할 수 있었다.
마교와 얽히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삶.
검치는 한때 그것을 원했다.
적어도 양명성은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끔, 일찍 중원을 떠나고 싶었다.
때를 봐서 마교의 감시가 약해지면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그놈의 협심(俠心).’
검치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과거에 협심에 빠져봤기에 알았다.
중독되기 쉬운 감정이었다.
언제나 자긴 옳은 일을 한다고 신뢰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 여기는 것이었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평생 변명을 덧붙이며 거추장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것 역시.
‘일찍 버렸으면 좋았잖냐, 사부가 말하는 대로.’
눈을 감고 있던 검치가 문득 실소를 터트렸다.
참으로 모순이었다.
지금 이러고 있는 자신 또한, 양명성을 버리고 떠나면 그만인 것을.
그러지 못해서 이러고 있었다.
마교의 적인 소림사를 죽이겠다고 장마 속에서 비를 맞아대고 있었다.
그 사실이 몹시 우습고 혐오스러웠다.
마인을 벤 칼에서 진득한 혈향이 피었다.
“다시 검마로 불리겠구나.”
검치는 고개를 들었다.
무시무시하게 퍼붓는 장마.
그 속에서 숭산은 습기 가득한 운무와 신비로운 불상들 속에서 장대한 광경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융성한 불가의 지보(至寶)가 바로 숭산의 소림이었다.
“부수러 가볼까.”
검을 어깨에 얹었다.
너무나도 무거워서, 어깨가 주저앉을 것 같았다.
* * *
과거에 검마라고 불린 고수, 검치.
그 이야기를 들은 철반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공자님께 검술을 가르쳐 준 절대고수가 소림을 노린단 말입니까?”
“그래.”
“다행이군요.”
철반검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화색이 돋아났다.
“지금 소림사에는 신승을 비롯해서 무승이 한 가득이잖습니까? 검치라는 사람이 그리 강해도 머릿수를 당해 내진 못할 겁니다.”
“……글쎄.”
서문경은 사천에서 마주했던 검치를 떠올렸다.
그의 검술은 얼핏 보면 신묘함에 치우친 듯 보인다.
위력으로만 따지자면 오히려 눈앞의 철반검이 강해 보일 정도.
하지만 지금까지 숱한 고수와 마주해봐서 알았다.
특히 검치와 함께 맞서싸운 진무신검과 무영신투를 알기에 더더욱 확신할 수 있다.
‘칠로두가 그토록 경계한다는 건 그만한 무게가 있다는 거야.’
한때 마교와 싸울 수 있었던 건 검치가 있어서임을.
번천광검결을 익힐수록 수많은 변화와 조화가 존재함을 깨달았다.
당장 백야흔과 싸우더라도 진무신검의 태허검결처럼 힘을 흘릴 수 있는 기예가 있었다.
‘단신으로 칠로두와 싸웠다는 말이 괜한 허세는 아니겠지.’
서문경은 무영신투가 말해 준 과거사를 곱씹었다.
백야흔과 싸운 직후라 오랫동안 듣지 못했지만, 검치가 얼마나 강했는지는 잘 알았다.
“신승을 가볍게 꺾을지도 몰라.”
“……예?! 그만한 고수가 왜 은둔을.”
“말했잖아. 마교가 계속 감시해서 조용히 살았던 거라고.”
“왜, 왜 하필 지금 마교에 붙은 겁니까, 그럼?”
“그걸 내가 어찌 알아.”
서문경의 목소리에 짜증이 엉겨 붙었다.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검치가 갑자기 마교에 변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와서 마교가 마음에 들었다는 개소리는 아닐 테고. 대체 뭐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서문경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디선가 들려온 인기척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기.”
“……!”
그 말에 주백경과 성하민이 검을 뽑았다.
기척을 죽이고 초전의 기습을 준비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수 년 동안 그것만을 연습한 것 같다.
철반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백야흔을 토벌한 공로가 괜한 허명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
“…….”
저벅, 저벅.
발걸음이 점차 가까워졌다.
젖은 나뭇잎을 밟으면서 오는데, 갓을 쓴 사내와 보폭이 비슷했다.
자길 숨길 생각조차 안 한다는 것 또한.
-집중해.
서문경의 전음이 주변에 은밀히 퍼졌다.
꽈아악……!
검을 꽉 쥔 소리와 가슴의 고동이 점차 커지려는 그때.
“하하, 여기까진 웬일이냐!”
갓을 쓴 사내.
열 걸음을 두고서 검치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것을 본 서문경은 무심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개짓거리하지 말고 거기서 멈추십쇼.”
“…….”
검치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결국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무림의 고수가 짓는 허망함이 눈동자에 깃들었다.
“이렇게 되는 거냐?”
“예.”
“대화는?”
“예전에 말하시지 않았습니까?”
검.
서문경은 짧은 낱말로 대답했다.
“입으로 길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역시.”
검치가 쓰게 웃었다.
하필 이런 때에 만나서, 참으로 아쉽다는 웃음이었다.
“군관이면서 제일 무인의 낭만을 아는 놈이야.”
스윽, 탁.
검치가 축축하게 젖은 땅을 짓누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서문경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