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3)
슬픔이 사라진 자리에 분노와 증오가 싹 텄다.
승려가 멀리해야 할 감정인 것은 안다.
하지만 용서보다는 가까웠다.
또각!
신승은 손아귀에 쥐고 있던 염주를 깨뜨렸다.
상념이 지나니 어느새 지객당 앞이었다.
“소승을 불렀다고 들었네.”
“아, 오셨구려.”
공심은 낯빛이 어두운 얼굴로 지객당 안쪽을 턱짓했다.
완전히 타 버려서 원본을 알아보기 어려운 명패와 장마에 젖어 버린 기명부.
전대 신승이셨던 법광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소림의 최고수이자 웃어른이 되어 버린 신승이었다.
방장으로서 그에게 알릴 것이 있었다.
“빈객들이 되돌아오는 동안 인원이 늘어났고, 특이한 점으로는 서문경 일행이 중간에 사라졌다고 했소.”
“……그런가.”
신승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공심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정확한 사실은 빈객 사이에 이방인이 뒤섞였다는 것.
서문경의 행방과 중간에 마주쳤다던 검객이 석연치 않다는 것 역시.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얕잡아볼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본 무인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사람이었으니.’
본디 군문의 소가주여서 그런 것일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성향이 엿보였다.
당장 정의맹만 해도 그랬다.
마교라는 대적이 있으니 합류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피를 볼 것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신승은 그 확신에 따르지 않은 걸 후회했다.
‘어찌 됐든 스승님께서 횡액을 당하셨고, 마교가 공동파와 섬서의 두 도문을 공격한 것이 사실이다. 숭산과 멀지 않은 곳이지.’
설마 청마가 이곳까지 온 걸까?
신승의 눈이 가늘어지려는 찰나에 공심이 침묵을 깼다.
“신승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법광대사께서 돌아가신 것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겠습니까?”
법광대사.
언젠가 대사(大士)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셨는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붙어지게 될 줄이야.
신승은 무상함을 떠올렸다.
금강경과 같은 법문에도 나와 있는 가르침이 뼛속 깊이 사무쳐, 쓴웃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감상에 계속 빠져 있을 순 없는 일.
“잠시 제자들을 물릴 수 있겠는가?”
“…….”
이에 공심은 지객당 내부에 있던 제자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신승이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지난 새벽에 있었던 일을 꺼냈다.
“사실은…….”
평소 법광이 지내는 암자에서 자고 있던 성하민.
기력이 고갈되어 죽어 가던 전대 신승, 법광.
싸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성하민을 핍박할 수가 없어 보내 주었다고.
“……지금은 따질 수 없게 되었지.”
“…….”
신승은 공심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이야 큰 오해를 할까 싶어 보냈지만, 방장의 입장에선 다를지도 모른다.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신승. 아니, 혜보 사형.”
“미안하구나.”
“경과가 어땠든 일단은 서문 공자를 비롯한 소저와 호위무사까지 두었어야 했습니다. 사형의 독단이 과하셨습니다.”
“…….”
신승의 침묵에 공심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하기까지 한 수양과 자애심.
역대 신승은 대부분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당장 마교가 발호해도 천수를 어기면 안 된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나.
‘소림에 불심이 깊은 사람이 사라지면 무가와 다를 바 없어진다는 것을 알지만…….’
이럴 때 독해지지 못한다는 것은 큰 단점이다.
공심은 신승에게 조심스럽게 간언했다.
“서문 공자를 일단 찾는 것이 우선이고, 빈객을 막아섰다는 검객을 잡아야 합니다.”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았느냐?”
신승의 말에 공심이 인상을 찌푸렸다.
얼토당토 않는 소리라는 생각이 표정을 뚫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신승은 그리 반응할 줄 알았다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지금까지 파격적이기까지 했던 서문 공자의 행적과 심성을. 우리가 정의맹에 미온적이자 직접 찾아오지 않았더냐?”
“하면 사형께서는 전대 신승님을 서문 공자가……”
“아니,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분명 다른 흉수가 있었겠지. 그리고 성 소저나 서문 공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
신승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스승님의 시신에 남은 흔적은 마공. 그것도 구전에서나 나오는 천마신공이었다.”
“……!”
공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타닥, 타닥.
잿가루가 타들어 가는 소리에 철반검은 상반신을 일으켰다.
목에 부목이 대어져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갓을 쓴 사내에게 살아남았으며 누군가가 이곳까지 데려왔음을.
철반검의 시선이 등 돌린 채 땔감을 뒤적거리는 남자에게 향했다.
“누, 누구시오?”
“정신이 드십니까?”
땔감을 뒤적거리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소림사에 있으면서 모를 수가 없는 명사(名士)이기도 했다.
“서, 서문 공자 아니시오!”
철반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윽, 하는 소리를 냈다.
사내에게 얻어맞은 목에서 까무러칠 정도로 큰 고통이 엄습했기 때문이라.
서문경이 그걸 딱하게 보았다.
“환자면 가만히 있으시오. 잡아먹지 않으니.”
“분,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없지 않았습니까?”
“사내가 보이기에 먼저 숨었고, 급습하여 구해온 거지.”
서문경은 보라는 듯 자신의 검을 드러냈다.
칼날에 생채기가 가득하여 균열이 지고 칼끝은 무뎌져있다.
고수와의 싸움이 수백 초는 이루어졌을 법한 흔적.
철반검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빈객들은…….”
“소림사로 도망쳤지. 젠장, 좀 도와달라니까 장마 때문에 목소리가 묻힌 건지…… 듣지도 않은 건지.”
서문경이 가볍게 투덜거리자, 그 옆에 있던 주백경이 점잖은 목소리로 첨언했다.
“도와달라고 하신 적은 없잖습니까. 어차피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불만도 말 못해?”
“공자님께서 항상 그러시니 평판이 나쁜 겁니다.”
“쩝.”
서문경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장대비가 계속해서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비는 언제 그칠지.”
“……서문 공자! 그칠 때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당장 내려가는 것이.”
“나라고 그럴 생각이 없었을까?”
서문경이 철반검을 가볍게 비웃었다.
그와 동시에 소림사 쪽에서 날아온 전서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이 통통하게 차올라서 장마와 폭우 사이에서도 힘을 잃지 않았으나.
피슛!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전서구의 목이 꿰였다.
“……허.”
철반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서문경의 뜻을 알아차렸다.
“고수도 눈 먼 화살비를 이기기 어려운데, 이렇게 비까지 내리니 어렵겠군요.”
“거 편하게 말하셔도 되오. 나이도 많은 양반이.”
‘……그러고 보니 서문 공자는 처음부터 평대하고 있었잖아?’
철반검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워낙 고수고 명사여서 자연스럽게 하대에 가깝게 말하는 게 불쾌하지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 아닌가?
“아닙니다. 목숨을 구해 준 빚이 있는데…….”
“그럼 그렇게 하시든지.”
“…….”
왜 소가주 자리에서 내려갔나 했더니만, 이런 거였나.
철반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현 상황을 되짚고는 서문경에게 입술을 달싹였다.
“우린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숭산 어딘가의 동굴.”
“……마교입니까?”
“아마도. 하지만 그 갓 쓴 놈의 검은 마공이 아니었지.”
그 말에 철반검은 눈을 끔뻑였다.
목에 부목을 대어 끄덕일 수가 없으니, 이런 식으로 대답해야 했다.
“예. 직접 마주하니 무시무시한 검기더군요.”
“살기가 가득하고 변칙적인 검세가 많아서 정석적으로 부딪칠 수가 없어. 그런 검술을 가진 무인은 강호를 두고 봐도 적을 테니까…… 누가 알아차릴까 싶어서 얼굴을 가린 걸 거야.”
거기까지 말한 서문경이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렸다.
“하민이나 주 무사는 어떻게 생각해? 어디서 본 적 있어?”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수십 초는 더 봐야 할 것 같아.”
“주 무사면 몰라도 하민이가 수십 초를 더 봐야 한다고 말할 정도면…… 정체를 정말 잘 숨기거나 우리가 모르는 고수겠네.”
서문경의 말에 철반검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저 소저는 무학자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한 번 본 무공은 모두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다고 봐야지.”
“허어…….”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괜한 허세가 있다.
철반검은 서문경도 청년임을 깨닫고는 다시 제자리에 누웠다.
“그나저나 참으로 다행입니다.”
“뭐가?”
“공자께서 주변에 있어서 제가 살지 않았습니까?”
“……음. 그건 좀 오해인데.”
“예?”
“원래 살려줄 생각이어서 부러뜨린 것으로 끝났지. 아마 거기서 가만히 있었으면 기어서라도 내려갈 수 있었을 거야.”
도대체 저게 무슨 말인가.
철반검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문경을 바라보았다.
“그게, 당췌…….”
“우리가 데려가서 더 위험해졌다는 거?”
“…….”
철반검은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서문경을 째릿 쳐다보았다.
하지만 서문경의 시선은 한 곳에 꽂혀있었다.
“쉿. 온다.”
그 말에 서문경을 비롯한 네 무인이 입술을 꾹 다물고서 단전의 공력을 천천히 전신에 굴리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흑의를 걸친 사내였다.
척 봐도 불길하기 그지없는 마공을 어깨와 눈에 빈틈없이 둘러서는, 발견한 즉시 살초를 휘두를 낌새가 훤히 보였다.
이에 서문경이 조용히 무영보를 펼쳤다.
서걱!
일초반식.
서문경의 검이 사내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철반검은 안심할 수 없었다.
사내에게 패배했을 때보다 더더욱 두려워졌다.
‘바, 방금 그 검은…….’
갓을 쓴 사내가 펼쳤던 검과 유사하지 않았나?
철반검은 흔들리는 눈으로 되돌아오는 서문경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눈썰미가 좋군.”
“무, 무엇이 말입니까?”
“익힌 검술과 내력만 봐서는 무학에 대해 무식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서문경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자,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주백경이 철반검의 입을 막았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강하게.
“으읍, 읍…….”
“조용히 있어.”
서문경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곧 알게 될 테니까.”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