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40화 (138/250)

장마 (2)

작지만 다부진 몸.

젖은 우비 아래로 슬쩍 드러난 탄탄한 근육과 장검.

빈객들은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도 눈썰미를 발휘했다. 아무리 장마가 심해도, 소림사에서 귀한 손님으로 있던 그들이었다.

“무림인이라면 별호를 밝히고, 그게 아니라면……!”

“내가 왜 말해야 하지?”

사내는 스산하게 웃었다.

앞이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갓을 푹 눌러쓰고서, 빈객들을 향해 가시가 돋친 말을 해댔다.

“마교와 싸울 생각보다는 소림사에 기생하여 밥이나 빌어먹던 놈들이 당당한 척 구는 것이 역겹구나.”

“이보시오……!”

“싸우지 못할 게 뭐요! 우리의 숫자가 훨씬 많은데!”

대부분은 침착했지만, 자존심이 유난히 강한 몇몇이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탄탄한 근육과 장검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건장한 사내보다 체구가 작다.

얼마나 깊은 공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싸워 볼 가능성은 생각보다 있을지도 모른다.

얄팍한 판단력이었지만 과한 자존심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가뜩이나 장마라서 기분도 X 같았거늘, 잘됐다! 한번 뒈져 봐라!”

끝내 빈객 중 하나가 먼저 칼을 뽑았다.

수염이 많은 거한으로, 한때 녹림도였다가 개과천선하여 무가(武家)로 투신한 고수라고 했다.

철반검(鐵盤劍).

쇠 대야 같은 대검을 나무막대처럼 휘두른다지.

촤아악!

기수식을 취한 철반검은 지체 없이 초식을 펼쳤다.

수많은 빗줄기가 한순간 면(面)으로 찌그러졌다.

철반검의 일초는 상대를 벤다기보다 둔기로 후려치는 것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 속도와 힘은 단순무식하다고 욕할 수준을 넘었다.

“……과연 녹림에서 나온 잡배를 받아 줄 만했군.”

철반검의 이야기를 아는 호사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개과천선했다는 말은 거짓말.

무가로 투신했으나 생활에 적응하질 못했다.

그는 자기가 강하니 녹림에 있었을 때처럼 자유롭게 술과 여자를 끼고 살길 원했다.

그러다가 사고를 쳐서 소림사에서 반성하고 싶다는 명목으로 왔거늘.

‘강함은 확실하다.’

장마마저 한순간 멈춘 것처럼 보이게 할 힘과 속도.

검객으로서는 대성할 수 있는 적성이다. 노력보다는 타고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 이기어검!”

철반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머릿속에 있던 열기가 내려가니 온몸이 춥고 저렸다.

지독한 장마였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 사이에 고고하게 뜬 검이 한 자루 있었다.

사내가 들고 있는 장검과는 달리, 희고 짧은 단검.

겨우 손바닥 만한 검 하나가 엄청난 힘이 담긴 일격을 막았다.

“이깟 힘으로 잘난 체했나?”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장대비.

축축하게 젖은 나무들 사이에서 사내는 껄껄 웃었다.

“왜, 더 해 보지 그래.”

“……윽.”

철반검은 굴욕을 속으로 삼켰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무시당하는 경험은 몇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강자 앞에서 수그릴 줄 알아야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는 법.

스윽.

철반검이 두 손을 모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언제든 베여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나, 저만한 이기어검을 펼칠 줄 안다면 어차피 목이 드러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죄송합니다! 부디 저만은 살려 주십시오!”

“뭐?”

“저런 미친…….”

가장 먼저 나섰던 무인이 제일 빨리 굴복할 줄이야.

빈객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철반검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사내의 생각은 달랐다.

“덜떨어진 놈.”

축축한 비웃음을 짓고는 오른손을 휘둘렀다.

장대비 같은 일수(一手)였다.

쩌억!

먼곳에서도 철반검의 피부가 붉게 부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아악!”

“건방을 떨고서 용서를 빌면 받아 줄 것 같냐? 한심하다. 정말로 한심한 작태야.”

사내가 고개를 가볍게 내젓고는 발로 철반검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파앙!

얼핏 보면 별다른 힘을 들인 것 같지 않았지만, 철반검의 옷가지가 사방으로 찢어졌다.

극에 이른 내공 수발이다.

저런 것에 맞았다가는 오장육부가 터져 나갈지도 모른다.

“커억……!”

숨 넘어가는 소릴 흘린 철반검이 뒤로 넘어갔다. 그 뒤로는 고요했다.

“죽은 건가?”

“호북성에서는 꽤 유명한 고수인데…….”

장대비에 식은땀이 뒤섞였다.

빈객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장마가 이리 심하니 빠르게 도망친다면 행적을 쉽사리 밟지 못할 것이고, 사내의 입장에서 죽일 사람이 너무나도 많으니까.

어쩌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그 안이한 희망이 빈객들 사이에서 떠돌아다닐 때쯤.

“소림사로 가라.”

사내가 뜬금없이 그런 소릴 꺼냈다.

처음에는 저게 무슨 소린가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학사 중 몇몇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우릴 소림사에 몰아넣어서 죽이겠다는 거요?”

“글쎄. 선택지를 주었을 뿐인데.”

“……무슨 꿍꿍이인진 몰라도 소림의 무승은 다르오.”

“알아. 무림에선 태산북두로 불린다지.”

사내가 클클 웃었다.

“그게 오만하단 것이다.”

“……?”

“십만대산보다 광활하지도 않고 높지도 않으면서 소림사가 있다는 것만으로 영산이니, 명산이니…… 가당찮은 소리가 아니냐? 결국 자기 손으로 깎아서 만든 우상(偶像)이 유명할 뿐인데.”

“……!”

학사들의 얼굴에 분노가 얼핏 서렸다.

지금이야 어쩔 수 없이 내려가게 되었지만, 엄연히 불자(佛者)였기에 사내의 말을 함부로 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계산이 빠른 자들은 이미 재빨리 걸음을 놀리고 있었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어서 가자구.”

“쉿, 쉿.”

빈객들은 학사의 어깨를 잡아끌고서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사내는 그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기만 했다.

* * *

“그게 무슨 말이오? 숭산 중턱에 무인이 있다니.”

소림의 방장, 공심은 젖은 생쥐 꼴이 된 빈객들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전대 신승의 장례를 치르느라 바쁜데 숭산에 정체 모를 강자가 있다는 게 너무나도 거슬렸다.

“이미 철반검께서 당했습니다!”

“……허어, 그 시주께서?”

공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타고난 성품이 좋지 않다지만, 소림사 무승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강골이었다.

웬만한 무인은 대적하지도 못할 중검(重劍).

그 강인함은 무승 여럿이 인정하고 있을 정도인데.

“일단은 객방에 들어가 쉬시지요. 상황이 여의치 못해 소반(小盤)이라도 빨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장마가 그칠 때까지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으음.”

공심은 빈객들을 슬쩍 쳐다보았다.

숫자가 이상했다.

철반검이 쓰러졌다고 하니 전에 찾아왔던 빈객보다 한 명이라도 적어야 할 텐데, 기이하게도 많아 보였다.

공심의 고개가 일대제자에게 돌아갔다.

-지객당주에게 기명부를 확인하라고 전해라.

-그럴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빈객의 명부가 적혀 있는 서적이 장마에 완전히 젖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 되는 말인가? 기명부는 지객당 내부에 온전히 보관하지 않나! 하물며 객방에 둔 명패가 있을진대!

그 말에 일대제자의 얼굴이 난감해졌다.

공심의 말이 옳았다.

소림의 손님으로 찾아온 사람이라면 모두 기명부에 적고서, 명패까지 객방에 두고서 관리한다.

하지만 장마가 시작된 이래로 그 법식이 틀어졌다.

-명패는 지객당 뒤에서 재가 되었답니다. 객방을 청소하는 승려 또한 아까부터 보이질 않고요.

-소림사에 누가 숨어들었단 소리더냐?

-예.

공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상황에 잡귀(雜鬼)까지 얽힌 것 같았다.

‘신승께서는 전대 신승의 죽음을 두고 모른다고 하셨으나…… 소림사에 숨어든 놈이 있다면 바로 그놈이 흉수 아니겠는가!’

전대 신승, 법광(法光).

그의 죽음을 두고 많은 승려가 슬퍼하고 분노했다.

노환으로 인한 죽음이 아닌 듯.

원기가 쇠하고 몸이 목석처럼 딱딱하기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신승은 천수를 진즉 누리셨다고 하지만, 오랫동안 존경한 노승의 죽음을 두고 어찌 무덤덤할 수 있겠나.

불법을 배운 승려치고는 미련도, 정도 흘려보내지 못했다.

‘누가 오든 반드시 잡아서 문초하리라.’

공심은 눈을 가늘게 떴다.

빈객 사이에 숨어든 놈들과 철반검을 단박에 제압했다는 사내.

어느 쪽이든 소림이 직접 찾아내야 했다.

“장마가 그칠 때까지 계시지요. 다만, 소림이 좋지 않을 잘 보낼 수 있도록 조용히 지내 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빈객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적어도 소림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생각이었다.

공심은 그런 빈객들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신승을 모셔 오너라.

-예.

일대제자는 공심에게 예를 취하고는 빈객들을 스쳐 지나갔다.

신승이 어딨을지야 뻔했다.

전대 신승의 위패(位牌)를 지키고 터였다.

* * *

“이것이 정녕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승은 법광이라고 적힌 위패에 대고 하소연했다.

당연하지만, 생전처럼 아둔한 것이라고 꾸짖는 말이 돌아오진 않았다.

그저 이름만 있을 뿐이다.

사람의 죽음이 그러하듯이.

“하아…… 스승님이야 어려운 사람이라면 목숨을 걸고 움직이겠지만, 그 소저가 심상치 않은 건 사실입니다. 정녕 이대로 보내도 괜찮았겠습니까?”

신승의 고개가 천장으로 향했다.

닦고 닦아 내도 먼지는 쌓인다.

스승과의 기억이 대체로 그러했다. 죽은 사람이라서 잊어야 할 것이라고 닦아내도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신승은 소리 없이 신음하며 금강경을 암송했다.

바로 그때였다.

“방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시간을 주라고 하지 않았더냐?”

“하산하시던 빈객들이 돌아오셨습니다. 정체 모를 무인이 중간을 가로막았고, 빈객의 수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뭐라고?”

신승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바깥에 있는 일대제자의 말은 더더욱 허황된 것에 가까워져 있었다.

“방장님께서는 빈객이 많아진 것과 무인이 기다리고 있던 것을 보아, 법광대사님께서 횡액을 당한 것이……”

“아니, 잠깐. 그게 정말이냐?”

“예.”

그 말에 신승은 어지럽던 길이 바로잡히는 것을 느꼈다.

‘그래. 스승님께선 성 소저를 치유하다가 당하신 것이다! 소저를 의심할 것이 아니었어!’

마음속에 있던 심마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신승은 위패를 향해 조용히 읍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장은 어디에 있느냐?”

“지객당으로 가셨습니다.”

“나도 곧 가마.”

신승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적의가 드러났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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