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1)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빈사에 빠진 스승과 잠에서 깨어나서 눈물을 흘리는 소저.
기이한 광경에 목도한 신승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랜 수양으로 쌓은 무량청정한 정신이 뒤흔들렸다.
“울지만 말고 말을 해 주게.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스승에게 공력을 전수하는 도중에 말을 꺼낸 것도 이 탓이었다.
평소에는 묵묵히 스승의 안위만을 살폈을 것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성하민에게 ‘이미 일어난 일’을 물었다.
부질없는 것을 묻고 만 것이다.
물은 즉시 후회했지만, 굵은 눈물을 흘리던 성하민이 자기 눈가를 슥슥 닦았다.
“저,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할아버지께서 저를 위해서 싸우시는 동안, 가만히 누워 있어야 했어요.”
“자세히 이야기해 주게.”
“아니에요. 저는. 저는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성하민은 조금 전까지 꾸었던 꿈을 떠올리려고 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잠에서 깨기만 하면 자신의 목을 졸라서라도 끝내고 싶었던 그 악몽을.
입 밖으로 내놓고 싶었다.
신승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덜어 놓으려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뭐야, 대체 뭔데.’
머릿속이 희뿌옇다.
달빛 한 점 없는 야산에서 안개 길을 거니는 것 같았다.
영문 모를 스산함은 머리를 넘어서 어깨까지 식은땀으로 축축 젖게 했다.
성하민은 양손으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문댔다.
“기억이 나질 않아요.”
“…….”
신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장 일갈하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오랫동안 수양을 쌓은 고승이기 때문이었다.
그 인내가 분노로 매몰될 뻔했던 시선을 바로잡았다.
‘기이하다.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질 않으니.’
성하민의 눈가에서 또다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깊은 후회가 얼룩진 얼굴에 담긴 주체할 수 없는 슬픔.
신승은 그녀에게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깨달았지만, 이해는 다른 문제였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소림사의 한복판에서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많은 민초가 아직도 원시에 가까운 것을 숭앙하듯.
소림사의 세(勢) 또한 스러지지 않았다.
마교가 발호한 이후로 방비는 더욱 철저해졌다.
무당파처럼 나라의 비호를 받지 못해도 제 한 몸은 지킬 힘은 지니고 있다고.
그리 믿고 있었다.
스승의 용태를 보아 외상은 없고 내상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밀어붙여졌다.
평생 동안 소림의 공력을 수련한 스승이 어찌 이런 상처를 입은 걸까?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아서 신승은 평소라면 상상조차 하지 않을 가정을 떠올렸다.
‘마귀가 땅에서 솟아난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건만, 다른 승려들이 이를 믿어 주겠는가?’
하룻밤 사이 사라졌던 성하민.
낡은 암자에서 발견된 그녀와 빈사에 가까운 전대 신승.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누가 봐도 성하민이 전대 신승에게 해코지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일 것이다.
신승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여러 혼란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으나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
‘저 어린 처자가 없는 죄과를 뒤집어쓰게 만들 것이냐, 혜보(慧輔)야!’
신승은 자신의 법명을 떠올렸다.
보(輔:덧방나무)란 수레의 무게를 지지하는 나무.
어려움이 클수록 서로 돕고 의지하라는 뜻이 담겼다.
신승이 항마승을 자청하고 무공을 닦은 이유가 법명에 있었다.
-이럴 시간이 없네.
신승의 전음이 중후하게 울렸다.
후회와 슬픔 때문에 자기 몸을 가누기 어려운 성하민조차 제정신을 벌떡 차릴 정도로, 전음에 담긴 공력은 맑고 무거웠다.
“……예?”
-누가 보기 전에 자네 일행에게 돌아가게.
“하, 하지만. 저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걸요.”
-이곳에 데려온 사람이 이분이지 않나. 각오하셨을걸세. 그러신 분이거든.
짧게 토막 낸 낱말에 많은 기억이 있었다.
전대 신승으로서 강호를 주유하고, 황제에게 밉보이면서까지 악한 관리를 골탕 먹이던 사람이셨다.
초면의 성하민을 도와주겠다는 마음에 어찌 후회가 있으셨겠나.
신승은 스승을 알기에 사사로운 감정을 버렸다.
-어서.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성하민은 두 승려를 향해 인사했다.
오랜 주박에서 벗어난 것처럼 몸이 가벼웠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정말로 괜찮으실까?”
객방(客房)으로 돌아가는 동안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들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문득 차가운 것이 뺨과 손등을 두드렸다.
“……앗, 차거.”
성하민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언제 밝았냐는 듯, 어두운 구름떼가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그렇게 지독한 장마가 갑자기 찾아왔다.
* * *
“공자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이만 하산해 주셔야겠습니다.”
쏴아아아…….
우비(雨備)마저 걸치지 않은 승려의 전신에 세찬 빗물이 쏟아져 내렸다.
가뜩이나 어두운 하늘에 해를 등져서 그런지, 승려의 얼굴이 어떤지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서문경은 무림의 고수였다.
보이고 싶지 않은 것마저도 꿰뚫어 볼 능력이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서문 공자님.”
승려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덕지덕지 발려있다.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강인하기로 유명한 소림의 승려가 저리 빈틈을 보일 일이 있나 싶었다.
하물며 하산하라는 통보라니.
서문경은 물러나지 않았다.
“말씀해주십시오.”
“소림의 큰 별이 지셨습니다.”
“설마 신승이나 방장께서……?”
“아닙니다.”
짧게 대답한 승려가 객방 안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아직 곤히 자고 있는 주백경과 안색이 좋지 않은 성하민.
승려의 시선이 지난 밤 보이지 않았던 성하민에게 향했다.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답지 않게 사뭇 집요했다.
“어디 갔는지 안 보인다고 들었는데,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집요한 시선에 이어진 차가운 목소리.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목에 머금은 것 같았다.
서문경은 저 한 마디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승려에게는 요령 좋게 묻는 재주가 없었다.
“하하, 새벽까지 숭산을 둘러보다가 잠시 길을 잃었었다고 해서요. 문을 잠그지 않은 게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예. 저거 안색 나쁜 거 보세요. 찬바람을 쐬느라 원래 몸이 안 좋던 애가 저리 됐습니다.”
여기서 아니라고 부정해 봐야 하수다.
뒤늦게 돌아온 걸 인정해야 그럴 듯해진다.
서문경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승려에게는 가면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었다.
“……으음.”
길게 늘어진 숨소리에 의심이 가득했다.
승려의 시선이 성하민에게 뿌리박혔다.
이에 서문경은 은근슬쩍 낚싯대를 던졌다.
“별세하신 분을 위해 불공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승려가 서문경의 물음을 차갑게 내치고는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애심 가득해 보이던 분위기와는 영 딴판이다.
서문경은 문을 닫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의심 받는 모양인데.”
“…….”
“하민아. 이제 뭐라도 말해 주지 않을래?”
이른 새벽에 돌아온 성하민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소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평소에도 말이 없긴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누가 봐도 큰일을 겪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니 승려도 의심스럽게 봤겠지.
서문경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하민아.”
“……미안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
성하민은 그제야 지난밤부터 있었던 일을 풀어놓았다.
생각보다 들은 건 없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이 빠져 있었으니까.
“잠에서 깨고 나니 전대 신승께서 쓰러져 계셨다?”
“응.”
“……신승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구나.”
서문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신승이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었다면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을 터였다.
어디 그뿐이랴?
지금까지 정의맹을 바로세우기 위해 얻었던 신망과 명성.
그 모든 것이 한 번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마교와 싸우려고 만든 집단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거나 서문세가가 쫓겨났을 터였다.
‘최악의 경우는 피했지만, 안심하기는 일러.’
만일 마교가 소림사를 감시하고 있다면?
지금의 혼란을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공동파에서 갑자기 나타났듯, 전대 신승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침투할지도 몰랐다.
서문경은 조용히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일단은 소림사에서 시키는대로 내려가자. 하민이는 얼른 주 무사 깨우고 짐 챙겨.”
“그거면 되는 거야?”
성하민의 얼굴에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의를 먼저 베풀었던 전대 신승의 갑작스런 죽음이다.
심성이 아직 독하지 못한 성하민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서문경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나한테 따로 생각이 있으니까 따라와.”
“응!”
저렇게 말하는 서문경이라면 항상 무언가를 해냈으니까.
성하민이 그나마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장마는 계속해서 거세졌다.
소림사의 뜻에 따라 부랴부랴 하산하던 빈객들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허, 비라도 피할 수 있게 사정을 봐주지…….”
“우릴 의심하는 눈으로 보지 않았나? 불쾌하더구만.”
학자와 무인, 상인으로 이루어진 패거리가 여러 억측과 불만을 쏟아 냈다.
그러다 이름 있는 호사가가 좌우를 둘러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 사람이 보이질 않지?”
“누구 말인가?”
“서문세가의 일공자 말일세. 내 듣기로는 심산유곡에 은거하던 신승을 강호로 끌어냈다던데.”
“허어…… 무영신투와 진무신검에 이어 신승까지? 어린 공자가 참으로 능력도 좋군.”
“이제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나. 마교와의 전공과 서문세가라는 뒷배가 있는 한 탄탄대로일 텐데.”
거기까지 말한 호사가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처음에는 분명 주변에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진 것이 의아하군.”
“소림사와 따로 이야기하려고 내려가라 한 건…….”
“설마 소림이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나? 승려가 말한 건 사실일 걸세. 관에게 잘 보여야 할 입장도 아니고.”
“하긴.”
호사가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빈객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무검왕 서문경.
어린 나이에 엄청난 별호를 얻은 그와 인연을 맺는다면 천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테니까.
이 기회에 안면이라도 익힐 생각이었지만 서문경은커녕 그의 일행이라는 무사와 소저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려가는 시간이 지체되어,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다.
“그나저나 이놈의 장마는…….”
“피부가 아플 지경이네. 쯧.”
쏴아아…….
굵은 빗줄기가 나뭇잎을 세차게도 때렸다.
시야가 극히 좁아지는 데다 숭산의 길은 척박하다.
한발 한발, 조심스레 내디디며 걸어야 했다.
그 이후 일다경.
사박, 사박.
젖은 땅을 짓밟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려왔다.
무인이나 살수가 아니라 자기가 여기까지 왔음을 당당하게 알리는 개진의 발걸음이었다.
빈객 중 가장 뛰어난 무인이 목소리를 돋웠다.
“누구시오! 당장 얼굴을 드러내시오!”
사박, 사박.
들려오는 발소리가 커졌으나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꿰뚫어 볼 순 없었다.
그러자 빈객들 사이에서 불안함이 커졌다.
“소림의 큰 별이 졌다는데…… 설마?”
“재수 없는 소릴!”
“자, 잠깐! 나타났다!”
그 말에 빈객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비 젖은 나무들 사이.
일부러 큰 발소리를 내면서 다가온 사내의 정체는 한눈에 알아볼 수가 없었다.
“도망칠 기회를 주었거늘.”
챙이 긴 검은색 삿갓과 붉은색 우비.
기세가 강렬하거나 몸집이 우락부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남정네보다 조금 작았다.
그러나 사내는 수십의 장정과 마주하고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정했다. 여기서 단 한 명만 살려서 보내 주마.”
쏴아아아…….
사내의 삿갓 끄트머리에서 빗줄기가 흘러내렸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