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 (6)
처음에는 무명승이 귀식대법을 펼쳤나 싶어서 신승이 조심스럽게 맥을 짚었다.
하지만 무명승의 숨은 돌아오질 않았다.
핏물이 땅을 적시는 순간이 돼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명승은 죽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신승의 고함이 동혈에서 메아리쳤다.
평소 선량한 얼굴이었던 것이 지금은 완전히 일그러져 야차와 다를 바 없었다.
눈앞에서 살생을 저지른 셈이니,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야율척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얼핏 보았을 때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던데, 당장 당신만 하더라도 저자를 미친놈 보듯 하지 않았나? 갑자기 서문 씨한테 달려든 것도 그렇고.”
“하나 살생은 함부로 저질러선 안 되는 법이오! 어찌 그리 서슴없이 사람을 해한단 말인가!”
“중원의 법도를. 하물며 불법의 계율을 초원에서 온 이방인에게 강요할 셈인가?”
야율척은 스스럼없이 대검을 내려놓곤 가슴을 신승에게 내밀었다.
“초원에서는 살의로 가득한 선공을 받으면 마땅히 되받아칠 뿐이다. 난 상식대로, 내가 살아온 대로 행했을 뿐이지. 그게 잘못이라면 베어라.”
“…….”
“초원의 전사들에게 야율씨가 죽었다고 전해 주겠나? 대명의 황제에게 도달하지도 못하고, 살초에 반응한 잘못으로 죽었다고 말이야.”
담담한 어조에 묘한 열기가 어려 있었다.
신승의 불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잔뜩 비꼬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초원의 이방인도, 계율의 모순도 일생 동안 수차례 겪어 본 신승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도발이었다.
괜히 강호에서 오걸이라고 불리겠는가?
신승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누가 들으면 소승이 강요한 줄 알겠소. 멀쩡히 제압할 기예를 갖추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죽이지 않았소?”
“나를 과대평가하는군.”
“소승을 기만하지 마시오.”
신승의 눈가가 가늘게 좁혔다.
당장 야율척을 꿇어앉히지 않는 건 엄연히 초원에서 온 이방인이자 황제를 만나러 가는 손님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무명승이 워낙에 기이한 소리를 했어야지.
신승은 무명승의 시신을 슥 쳐다보았다.
자애가 가득한 시선이었다.
“정말로 긴 시간 동안 살았는지, 자기 망상에 빠져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소림의 선배이자 쇠약해져 있던 사람이었소. 그대는 그런 약자를 죽이고서 아무런 가책조차 느끼지 못한단 말이오? 그게 초원의 법도요?”
“…….”
“하물며 이자는 당신을 노린 게 아니요. 서문 공자를 노린 것이지.”
신승은 야율척과 서문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이서 모종의 거래가 있던 것은 아니오?”
“그럴 리가요. 저는 저 사람을 여기서 처음 만났습니다.”
서문경은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중에 나섰다.
야율척이 무명승을 해한 것은 확실히 큰 도움이 되었지만, 오걸 씩이나 되는 고수라면 맥락을 짚어 내고도 남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공사전을 밝힐 순 없어.’
정말로 무명승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장년인의 망상이든 간에 천마와 싸울 때 가장 큰 도움이 될 기물이었으니까.
마음속에서 가책을 지웠다.
대명을 수호하는 군관으로서 심지를 굳히고서 신승을 대했다.
“선배야말로 갑자기 저에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명승을 먼저 의심하고, 저와 함께 그를 몰아내자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대화가 가능하다면 유하게 끝낼 수도 있었네. 하지만 이제는 불가하지…….”
신승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왈가왈부해 봐야 이제는 늦었다.
몸에서 날아간 혼백을 다시 붙잡아 오는 방법은 없다.
무명승의 이야기가 진실인지 망상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이 묘하게 신승의 가슴을 죄었다.
오랫동안 귀식대법을 펼쳐 생존했다는 절박한 목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였다.
“서책의 연원이 어찌 되는지 물어도 되겠나?”
“아버지의 금고에 있던 책입니다. 틈틈이 읽거나 해독하고 있지요.”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꼭 쥐고 있을 만큼?”
신승이 무공사전을 가지고 물고 늘어졌다.
은근슬쩍 서문경의 얼굴을 살피는 것이 이리저리 떠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기야 천무학관 때부터 기이하게 여겨지던 행동이 아닌가?
무명승을 떼놓고 보더라도 여러 사람이 무공사전에 관해 물었다.
신승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터였다.
“예.”
“불편하지는 않나?”
“무영신투께 잡기를 배워서 숨 쉬듯 편합니다.”
“……그렇군.”
덤덤하게 사실만 툭툭 던지니 신승도 비집을 틈이 없었다.
여느 호사가가 그렇듯, 서문경에게는 특이한 기벽이 있다는 소문만 공고해질 뿐.
잠시 신승이 고민에 빠진 그때였다.
“무의식적인 의식이 아니겠나?”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야율척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이에 호기심이 커진 신승이 되물었다.
“의식이라니?”
“부족마다 제사를 치르는 주술사가 있어, 그들은 늘 영물의 뼈나 고서를 꼭 쥐고 다니지. 그게 아니더라도 어릴 적에 큰 사건을 겪은 전사에게도 특이한 버릇이 있기 마련이고.”
야율척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서문경을 두둔하는 듯하면서도 자기 부족의 실상을 말하는지라, 함부로 의심하기가 어려웠다.
신승은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 보면 삼 년 전 사천에서 벌어진 일이 있지 않았나?
“……과연.”
신승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자애가 가득한 시선으로 서문경을 흘깃 쳐다보았다.
지금보다 어릴 적에 마교에게 납치당하는 소동을 겪었으니 마음에 상처가 컸을 터.
그제야 무명승이 무언가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생육은 남고 백은 날아갔으니…… 과오를 되잡을 길이 없구나.”
깊이 한탄한 신승이 야율척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꽈아악……!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신승의 손등이 허옇게 변할 정도였다.
야율척은 입술을 꽉 다문 채 끙끙 앓았다.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도 신음 하나 내지 않은 인내심이야말로 초원의 자존심이었다.
그 모습을 본 신승이 입술을 달싹였다.
“일이 끝나면 소림사로 찾아오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살업을 푸셔야 하지 않겠소.”
말은 정중했으나 오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겠다는 엄포가 가득했다.
야율척은 신승의 얼굴에서 진심임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서문 공자에게 확언한 만큼, 말에 무게가 있길 바라오.”
뒤이어 신승은 서문경을 바라보았다.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으나, 마교와의 싸움에 손을 더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소승이 정의맹에 합류하겠소.”
태산북두.
소림사의 최고수인 신승이 천수를 마다하고 다시 세상사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 * *
“……이상해.”
“무엇이 말입니까?”
주백경은 상념에 잠긴 서문경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승을 만나고 와서는 여태껏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듯했다.
평소 여유를 가장하던 것조차 버리고서.
이에 성하민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도 궁금해.”
“그게 말이야. ……아니야. 나중에 말할게.”
서문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에서 회귀했다는 것을 밝히지 않고서야 도저히 털어놓을 수 없는 가정이었다.
‘무명승의 태도를 보아하니 전생에서 신승과 싸우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럼 갑자기 신승이 사라진 이유가 뭐였을까?’
항아리 조각 수십 개 중 한둘로 전체를 모사하는 것과 같았다.
추리가 불가능한 수준이었으나, 적어도 고민해서 여러 답을 찾아놔야 했다.
문제에 빠지고 나서야 답을 찾아 헤매서야 늦으니까.
그나마 몇 시진 동안 고민하고 나서야 가정을 서넛으로 추릴 수 있었다.
그중에서 최악에 가까운 하나가 있었다.
‘무공사전의 본래 주인인 누군가가 비사(祕史)를 알게 된 소림사를 통째로 멸문시켰다? 젠장. 이건 좀.’
최악과 맞서 싸우는 것이 군인이라지만 너무하지 않나.
서문경은 뒷목을 잡고서 끙끙 앓았다.
‘전생에선 마교가 소림사를 멸문시켰다고 했지만, 직접 확인할 여유가 나질 않았어. 확신할 근거는…….’
정확히 없다.
마교야 자기들이 소림사를 멸문시켰다는 소문이 돌아도 손해가 없으니 부정하지 않았고, 정의맹은 그러려니 했다.
처음부터 곤륜파와 공동파를 밀고 들어온 놈들이니까 충분히 가능하다는 계산이 문사끼리 돌기도 했다.
그러니, 이번 생에 알게 된 무명승의 존재는 전생의 기억에다가 찬물을 끼얹는 격이었다.
서문경은 한숨을 푹 내쉬다가 허공을 쳐다보길 반복했다.
“에휴우…… 후우…….”
“대체 왜 그러십니까?”
“주 무사, 마교 말고도 다른 놈이 있다면 어떨 거 같아?”
“그야 이 혼란 속에서 역심을 품는 자가 없을 리가 없지요.”
“아니, 그 수준이 아니라. 마교와 동등한 힘을 가진 역도라면 말이야.”
“……왜 그리 재수 없는 소릴 하십니까?”
주백경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털었다.
가뜩이나 마교와 칠로두 때문에 관의 행정력이 떨어지고 있다. 특히 구석진 현령은 사교에 빠져 헤롱거린다는 평이었다.
대명의 위엄이 날이 갈수록 낮아져 간다.
이 와중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다니?
“혹시 모르니 제라도 지내지요!”
“소림에서 제사를 지내자? 미쳤어?”
“……그야 공자님께서 먼저 그러셨잖습니까.”
주백경이 가볍게 툴툴거리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좁디좁은 절간.
소림사의 방장이 기거한다고 믿지 못할 건물에 신승을 비롯한 고승들이 우르르 모여 의논하고 있었다.
그 주위에 체구가 건장한 무승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까부터 저흴 째려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들을까봐 그러겠지.”
“이럴 때, 그, 공자님이 잘하시는 거 있잖습니까.”
“뭘?”
“갑자기 시비를 걸어서 싸운다던가 하는…… 설마 그러실까 걱정돼서 말입니다.”
“날 뭘로 보고.”
서문경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곤륜파와 공동파, 하물며 화산까지도.
어디 하나 안 싸우고 지나간 적이 없다.
소림사라고 그냥 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무림의 중심이라 불리는 숭산에서 그런 짓을 하진 않지.”
“공자님도 내심 찔렸지요?”
“그만.”
말을 중도에 끊은 서문경이 성하민을 흘낏 쳐다보았다.
“우와…….”
아무래도 견문이 넓지 않은지라, 성하민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금과 납을 섞어서 반짝하게 만든 금강역사상.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장서각.
사천에서 보기 힘든 건물 양식이 가득한 소림사다.
그녀에겐 새로운 경험이 될 광경일 터였다.
“잠깐 둘러보고 오지 그래?”
서문경의 말에 성하민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어. 어차피 우리도 여기서 기다리는 거밖에 할 게 없어.”
“……그래도 되지?”
“길만 잃지 말고.”
“물론이지.”
성하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문경에게서 벗어나 소림사를 둘러보았다.
토굴 같은 곳이나 전각, 신묘하게 빚어진 부처상이 곳곳에 있어 볼거리가 많았다.
“오…….”
대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터를 잡았기에 이렇게 장엄한 걸 만들었을까?
감탄을 거듭하고 있을 때에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승과 어깨를 부딪쳤다.
“앗, 죄송합니다!”
“괜찮아. 어린 처자가 그럴 수도 있지.”
노승이 가볍게 손을 내젓다가 문득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네? 어디 다치셨나요?”
“아니. 그게 아니야.”
“……?”
눈을 끔뻑거리는 성하민에게 노승은 이렇게 물었다.
“매일 악몽을 꾸고 있지 않니?”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