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 (5)
세 고수의 간격을 한가로이 비집고 들어와서는 하는 말이 ‘이름을 묻지 않을 기회를 주지’라…….
서문경은 사내의 터무니없는 담대함에 감탄성을 흘렸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이자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무공사전을 넘겨줘야 했을 테니까.’
아무리 신승이 선량한 사람이어도 괴인이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막말로 자기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찢어 볼 생각이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적어도 괴인이 보였던 맹목적인 공격성은 여러 가지 최악을 상상케 했다.
하지만 사내의 등장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인 것도 사실.
서문경은 사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선객(先客)이 있는데 통성명조차 싫으시다?”
“너희가 나가면 되겠지!”
사내의 목소리는 참으로 호방하여 이목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 신경 거슬리게 하기 딱 좋다는 뜻이니.
“이보게.”
신승이 사내의 어깨에 손을 가져갔다.
은연중에 담긴 힘과 공력에서 사내를 억지로 일으키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이에 사내의 눈동자가 한순간 번뜩였지만, 서문경이 보기에 회의적이었다.
주저앉은 상태로는 신승의 힘이나 공력에 대항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사내가 가진 기예는 어깨에 멘 대검만이 아니었다는 듯.
“고승(高僧)치고 손이 제법 거칠군.”
핀잔을 늘어놓은 사내의 오른손이 물에 젖은 나뭇가지처럼 유연하게 휘어졌다.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한 남자의 무공을 떠올렸다.
‘무영신투의 무영수(無影手)인가?’
기기묘묘한 움직임에서 남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신묘함이 엿보였다.
어디 그뿐이랴?
“……!”
아차 하는 순간에 신승의 상반신이 앞으로 쏠렸다.
어깨를 붙잡으려던 손이 사내에게 잡혀서는, 사내에게 메쳐지는 데까지 찰나도 걸리지 않았다.
꽈앙!
신승의 거대한 체구가 땅바닥에 내리찍히자 먼지와 종유석 파편 따위가 우수수 떨어졌다.
“커흠.”
신승이 잔기침을 내뱉으며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주 극히 짧은 순간에 벌어진 메치기.
직접 몸으로 겪은 신승과 가까이서 본 서문경의 눈썹이 들썩여졌다.
저 술수는 무인이 쓰는 권각술과는 결이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은…… 북적에 가깝다.
신승이 입술을 달싹였다.
“외세(外勢)의 고수셨구려.”
“……건방지기는.”
사내의 얼굴에서 적잖은 불쾌함이 비쳤다.
중원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아는 한족의 오만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보였다.
허나 서문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북적이거나 북적과 접경한 민족이 여기까지 온 것에 불쾌함을 느꼈다.
“자기네들이 좋아하는 초원에서 지낼 것이지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나?”
“…….”
“하남성까지 왔다면 호북성이나 황실에 볼 일이 있다는 뜻일 텐데.”
“너 같은 애송이한테 말할 것이 아니다.”
호방한 목소리에 비해 어색한 한어(漢語)에서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팍팍 났다.
하지만 중원에서 제일 거치는 사내들이 모이는 군문의 소가주였던 서문경이었다.
“애송이한테 한 대 맞기 전에 말하지 그래?”
“진심이냐?”
“밖에서 한 판 붙어도 상관없는데.”
서문경은 그렇게 말하며 공력을 운용했다.
쿠르릉……!
천무학관에 이어 삼 년 동안 본가에서 수련하며 쌓은 내공이 일 갑자.
제 나이보다 수배는 단전에 쌓아 놨다.
사내의 표정이 한순간 흐트러지더니 대검을 꽉 쥐었다.
“어린놈 주제에 만만치가 않구나. 중원에 이런 아이가 있다고 듣지 못했는데.”
“소식이 느리구만.”
“이름이 뭐냐?”
“내가 선객이라고 말했을 텐데.”
“…….”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뜩이나 초행인 중원에 예상치 못한 소년 고수와 마주하게 되어 마뜩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문경의 속내 또한 사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흐름을 끊은 건 좋지만, 이놈을 어벌쩡하게 넘어가선 안 돼.’
사내의 비범함이나 정체가 워낙 신비하여 신승과 괴인마저도 잠시 침묵하고 있지 않나.
그들이 암묵적으로 판을 깔아 줬다면 능히 사내를 긁어서라도 캐내야 한다.
서문경은 빙긋 웃으며 사내를 채근했다.
“어서.”
“……쯧.”
당장 싸운다면 불리해지는 건 자기임을 깨달았다는 듯.
혀를 가볍게 찬 사내가 대검에서 손을 떼었다.
“야율척. 초원에서 왔다.”
“이유는?”
“여유가 생겨서다.”
“자세히 말해 봐라.”
“……익숙한 언어가 아니라 길게 말하기 어렵군.”
야율척이 답답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벅벅 긁자, 서문경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흘러나온 것은 초원에서 흔히 쓰는 어투였다.
“말해 봐라.”
“어린 나이에 참으로 다재다능하군. 미래가 두려워지게 말이야.”
야율척이 처음으로 피식 웃고는 섬서성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정확하게는 화산을 향해서.
“적성의 거두(巨頭)가 화산에서 죽었다고 들었다. 덕분에 중원으로 갈 틈이 생겼지. 나는 초원의 형제들을 대표하여 이곳까지 온 전령이자 수장 중 한 명이다.”
“……뭐!”
“한족의 ……황제에게 동맹을 청하고자 이곳에 왔다.”
야율척의 말에 서문경은 깜짝 놀랐다.
백야흔을 조기에 죽임으로써 생긴 변화가 기쁘기도 하고 사뭇 우려스러운 마음이 서로 공존했다.
같은 적을 지니게 된 이방인.
그 존재가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미증유의 혼란이었다.
“마교와 함께 싸우겠다는 거냐?”
“못할 건 없지. 적어도 사람과 말을 산 채로 바치는 족속보다는 대화가 통하는 원수가 낫다.”
야율척은 마교에 속한 사교, 적성이 벌이는 인신공양을 떠올리고는 진저리쳤다.
“그놈들은 대화가 통하질 않아. 형제의 영혼이 초원을 자유로이 떠돌게 두질 않는다. 지맥에 말뚝을 박아 말이 먹을 잡초조차 자라지 않게 만들지.”
“…….”
“지금까지 죽은 형제의 복수를 할 의무가 나에게 있다.”
야율척은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자기네 언어를 안다면 예법을 아리라는 판단이었는데, 이는 정확히 적중했다.
서문경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짓이라면 심장이라도 산 채로 보이겠다는 거냐?”
“그래. 내 명예와 영혼을 걸고서.”
야율척의 눈동자가 흔들림없이 굳건했다.
거짓을 논한다면 이 자리에서 피를 쏟아 내며 죽어도 된다는 듯, 엄지로 자기 가슴을 찔렀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믿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서문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북경으로 가려거든 여기서 북쪽으로 가야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남쪽까지 온 거냐?”
“어린놈이 아까부터 반말은.”
“그쪽도 내가 어디 명문가 소가주라고 대우 안 해 줄 거 아냐?”
“……확인해야 했다. 정말로 적성의 수장이 죽었는지.”
“과연.”
서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도 워낙 마교가 음습한 짓거리를 자주했기 때문에 직접 발품을 팔아서라도 정보의 진위를 확인해야 할 때가 잦았다.
그 점에서 야율척은 자칫 잘못하면 희망에 빠져서 간과할 수 있는 오점을 막은 셈이다.
‘성격이 신중해서 여기까지 온 거겠지. 초원의 형제를 대표한다고 했으니까.’
최소한 서너 부족을 아우르는 족장이리라.
서문경은 야율척이 생각보다 거물임을 깨닫고는 신승에게 시선을 줬다.
사내의 신원을 확인했으니 이제 신분을 밝혀야 할 때였다.
“이쪽은 무림의 고수인 신승이고, 나는 서문세가의 일공자인 서문경. 저쪽은…… 귀식대법으로 지금까지 쭉 이곳에 숨어있던 항마승이라고 하던데.”
“무명승(無名僧)이면 족하다.”
괴인. 아니, 무명승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기 이름은 세월에 밀려 사라졌다는 듯, 낙관한 태도인지라 신승의 표정이 묘하게 동정심을 품었다.
하지만 무명승의 시선은 여전히 무공사전에 맺혀 있었다.
“보여 주지 않겠나?”
“멀리서 펴 보는 정도라면.”
“그 정돈 양보하지.”
그 말에 서문경은 무명승과 거리를 두고서 무공사전을 펼쳤다.
과거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를, 글씨마저 희미한 고서라고 했었다.
‘과연 지금은 어떨까?’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쯤 뒤섞였다.
여차하면 괴인을 미친 사람으로 치부할 생각까지 했다.
그가 실제로 과거 천마에게 귀식대법으로 생존한 항마승인지, 무공을 수련하다 미친 파계승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바로 그때, 무명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글씨가 잘 보이질 않는군. 좀 더 가까이 다가올 수 있겠나?”
“……선배. 서적이 오래되어 그런 거 아니겠소?”
신승의 물음에 무명승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더 자세히 보고 싶다는 거지.”
“얼핏 보기에 한어(漢語) 아니오?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신승이 다시 한번 딴죽을 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에 무명승이 하는 짓이나 언사가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무예십팔반을 모두 배운 천마.
무공을 보고 싸우는 것만으로 배운다는 재능.
하물며 천마에게서 생존해서 백년을 넘게 귀식대법으로 생존했다?
무명승이 불가의 공력을 펼치는 걸 보고 선배라고 인정한 신승조차도 서문경을 두둔하고 나섰다.
“믿질 못하는군.”
분위기를 알아차린 무명승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서문경을 향해 들이닥쳤다.
콰앙!
동혈 안쪽에 분진이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야율척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서문세가의 일공자라고 했었지? 초원의 형제라면 익히 듣는 가문이다.
찰나 동안에 들려오는 야율척의 전음.
초원에 사는 야만인은 무공을 모른다고 들었는데, 서문패의 말이 거짓이었던 걸까?
서문경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야율척이 먼저 대검을 휘둘렀다.
-내가 여기서 돕는다면 황실에 발을 들이기가 쉬워지겠지.
스르릉……!
신승을 메칠 때 보였던 기예가 이번에는 어깨에 멘 대검을 순식간에 발도하는 데 쓰였다.
그 모습을 본 서문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자, 잠깐……!”
서문경을 향해 거침없이 우장을 휘두르는 무명승과 대검을 뽑아 든 채 휘두르는 야율척.
두 직선이 서로를 향해 휘둘러졌다.
너무 곧고 곧아서, 한쪽이 부러지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을 형세였다.
이를 뒤늦게 파악한 신승이 쌍장을 양옆으로 휘둘렀다.
신공의 기운이 어깨를 타고 흘러 두 무인을 멈춰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야율척이 가진 신묘한 재주는 무공과는 궤가 달랐으니.
“……!”
신승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시무시하게 쌓인 공력을 야율척이 대검으로 은근슬쩍 흘려내고는 무명승의 가슴팍을 무식하게 후려갈겼다.
뼈가 안쪽으로 오므라드는 소리가 섬뜩했다.
조금 전까지 귀식대법으로 숨을 연장하던 무명승이 버텨 낼 상처가 아니었다.
“꺼, 헉!”
폐부서 억지로 삐져나온 소리가 동혈을 울렸다.
쿵!
제자리에서 쓰러진 무명승의 코와 입에서 숨 쉬는 소리가 들리질 않았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