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 (4)
서문경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기괴한 술수를 쓰기에 당연히 마인인 줄 알았건만, 괴인이 일으킨 건 소림사의 정종 공력이었다.
심지어 순청하고 맑은 것이 파문당한 파계승이 아니라 불가의 최고수에 가까웠다.
그래, 마치 옆에 있는 신승처럼.
“……아까부터 듣자하니 나한테 파계승이니, 흡성대법이니 말하는 것이 영 듣기가 께름칙하더군.”
괴인은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제 몸을 돌보지 않아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채로 길었고, 헤진 옷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위태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만은 형형하여 조금 전까지 시신이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시선이 신승을 향했다.
“후배.”
“그게 무슨.”
신승은 기함을 토하기보다 신중히 말을 골랐다.
어쩌면 자기 선입견 때문에 파계승이라고 오판하지 않았을까?
잠시 고민하던 끝에 한 가지를 물었다.
“불가의 공력을 닦았음은 보았으니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소이까?”
“허하겠다.”
괴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신승은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을 가리켰다.
“이들은 모두 어찌된 것이오?”
“기연을 찾겠다고 숭산을 이 잡듯 뒤지다가 이곳에 갇힌 게지. 나랑은 상관없는 것들이다.”
“그대의 능력이라면…….”
“선배라고 해라.”
“……이들의 곤궁함을 알고 도울 여유가 있었을 텐데, 왜 그리하지 않은 것이오?”
신승은 강직한 목소리로 괴인의 우(愚)를 따졌다.
“불법을 공부한 중이라면 계율을 알 것이고, 이곳에 있는 이유가 무엇이든 개차법의 순서를 알진대…… 어찌 죽어 가는 것을 그대로 둔단 말이오!”
“……젊군.”
“허?”
“젊어서 계율이니 개차법을 따질 수 있단 말이다! 허, 이렇게 보니 내가 파계승이 맞구만.”
괴인이 껄껄 웃는 동안 서문경과 신승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기껏해야 장년인인 그가 어찌 신승을 보고 ‘젊다’느니 ‘후배’라고 칭한단 말인가?
오랫동안 귀식대법을 취했기에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 걸 알았지만 지나치게 당당한 태도였다.
서문경은 신승을 대신하여 괴인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누군데 노인한테 예의 없게 그러시오?”
“남의 거처에 갑자기 쳐들어와 놓고 예의를 따지느냐? 어느 가문의 칼잡이인지는 몰라도 교육을 어지간히 못 받았군.”
“…….”
서문경의 얼굴이 구겨지자, 괴인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랫동안 가만히 있다가 굳어 버린 얼굴 근육을 푸는 것 같아서 께름칙했다.
그렇게 묘한 대치가 이어지다가 괴인이 한 가지를 물었다.
“현 시대의 국호(國號)가 무엇인가?”
“명(明)이오.”
“명이라. 명이란 말이지…….”
낱말을 곱씹던 괴인이 신승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후배의 기골이나 공력이 제법 비범한데, 항마동에서 수련했나?”
“그걸 어찌 아시오?”
“왜긴.”
괴인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또한 항마동에서 수련했던 사람이니까. 알아보는 게지.”
“……선배의 존함이 어찌 되십니까?”
“켁, 이제야 선배라고 부르는 게냐?”
장년에 가까워 보이는 나이임에도 혀를 차는 것이 어째 노인과 다를 바 없는 괴인.
그는 아까처럼 깊고 정순한 공력을 드러내며 말했다.
“나는 명 이전의 시대에 생존한 항마승이다.”
“……!”
항마승이라는 말에 신승의 마음이 격동한 듯,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서문경은 달랐다.
괴인이 그리 오래 살았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고 항마승이라는 신분도 그저 그랬다.
다만 큰 문제가 있었다.
‘생존?’
신승의 나한장을 얻어맞고도 멀쩡한 고수가 생존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서문경은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누구에게서 생존한 겁니까?”
그 말에 괴인이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절대 봐선 안 될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는 듯, 눈동자가 커져서는 서문경을 손가락질했다.
“……저놈!”
“갑자기 무슨.”
“그걸 네깟 어린놈이 어찌 가지고 있느냐!”
괴인은 말로 끝내지 않았다.
곧장 서문경을 향해 달려들어서는 허리를 뒤틀었다.
쩌적! 쿵!
기예의 경지에 이른 철산고가 허공을 강타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구르지 않았다면 가공할 만한 공력에 격중당해 적잖은 내상을 입었을 터였다.
서문경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보시오!”
“닥쳐라!”
여유가 넘치던 괴인은 어디 가고, 갑자기 눈이 뒤집힌 듯 서문경을 향해 살초를 내던졌다.
그러다 옆에 있는 신승을 향해 외쳤다.
“저놈을 당장 제압해서 단전을 폐해야 한다!”
“선배야말로 이게 무슨 짓이요!”
“따르래도! 설마 이놈과 한 편인 게냐!”
“말이 통하질 않는군.”
신승은 가볍게 혀를 차며 공력을 운용했다.
서문경에게 온갖 살초를 펼치는 괴인과는 다르게, 일단은 제압해 보고 사연을 들어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괴인의 갈급함은 이미 도를 넘어서있었다.
“이놈!”
목을 노리는 조법에 이어서 낭심과 기해혈, 단전을 노리는 주먹질.
제압의 수순이 아니라 곧장 죽여 버리겠다는 악독함이 엿보였다.
도저히 불가의 공력을 닦은 승려 같지 않았다.
“항마승이라면서 이게 무슨……!”
“시끄럽다! 시간이 지난 사이에 여기까지 침입할 줄은 몰랐구나!”
괴인은 핏발이 선 눈으로 서문경을 노려보았다.
“마교의 수괴가 아니더냐!”
“아니 아까부터 그게 무슨 말이냐니까?”
“그래, 너희끼리 부르는 말이 있었지.”
괴인이 서문경에게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바로 네놈이 천마가 아니더냐?”
“대체 무슨 이유로 날 오해하는 거요?”
서문경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괴인이 자신을 천마라고 오인한 이유가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괴인의 직관은 아주 오래 전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지금의 마교도, 칠로두도 알지 못했다.
그저 망막에 새긴 한 물건을 보고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책! 네놈이 꽉 쥐고 있는 책 말이다! 그게 네가 천마인 이유다!”
“……!”
서문경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무공사전이 비범한 기물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연결 고리가 잡힐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보다는 억울함이 컸다.
‘아니, 전생에서 천마는 이런 책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는데……!’
괴인이야말로 다른 책과 오인하고 있는 게 아닌가?
서문경이 괴인의 공세에 대응하고 있는 사이에 신승이 끼어들었다.
“이제 그만!”
불가의 공력이 한껏 담긴 사자후가 좁은 공간을 메아리쳤다.
쿠구구궁……!
전신의 뼈와 살이 흔들리고 동혈이 무너질 정도의 충격량.
이제 막 귀식대법에서 벗어난 괴인으로선 버틸 수가 없었다.
제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은 괴인이 서문경을 향해 진득한 살기를 흩뿌렸다.
“당장 저놈을 죽여서 책을 빼앗아 태워야 한다. 무얼 망설이느냐?”
태워야 한다는 걸 보면 무공사전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완전히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서문경이 입술을 달싹이려는 찰나에 신승이 먼저 말했다.
“이보시오, 선배. 서문 공자는 오히려 마교와 맞서고 있는 소영웅이자 칠로두와 맞서 싸워서 이긴 공적을 지닌 군관이요. 갑자기 천마라고 하는 이유가 뭐요?”
“칠로두? 군관?”
“칠로두는 마교에 속한 마도 고수이며, 서문 공자는 말 그대로 군문의 공자로서 조국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사람이요. 저 책을 항상 들고 다니는 것이 좀 별나다지만, 그게 무슨 천마의 증명이 된단 말이오?”
신승은 괴인을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나 괴인의 뜻은 아직 꺾이지 않았다.
“……믿질 못하겠군. 잠깐 보여 줄 수 있겠나?”
“건네주면 찢어 버릴 것 같은데.”
서문경은 괴인을 극히 경계했다.
여태껏 무공사전을 찢거나 태웠던 건 자신이었지, 남의 손에 맡겨 본 적이 없었다.
만에 하나 괴인의 손에 줬다가 정말로 찢어진다면?
아주 중요한 기물을 잃는 셈인데 어찌 그럴 수 있겠나.
“절대 못 줍니다.”
“나도 그럼 절대 못 믿겠는걸.”
서문경과 괴인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괴인의 눈에는 여전히 살의가 짙었지만, 서문경도 밀리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궁금했다.
“근데 대체 뭘 보고 천마란 겁니까?”
“아주 오래된 책을 그리 꽉 쥐고 다니는 건…… 천마밖에 없으니까.”
“……그게 전부?”
“…….”
서문경의 물음에 괴인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봐도 억지에 가까운 대답이었으니까.
합당한 설명까지 덧붙일 여유까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서문경의 심중에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뭐 나이가 얼마나 되십니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 홀로 싸움에서 벗어나 살아남기 위해 이곳에 은둔한 게…… 백하고도 칠십 년은 됐을 거다.”
그렇게 말한 괴인이 자기 옷을 벅벅 찢었다.
그 아래에 깊은 상처와 보라색으로 물든 자국이 얼룩덜룩했다. 오랜 시간 동안 귀식대법으로 숨어 지내며 불가의 공력으로 치유했음에도 저런 상처가 남아 있는 듯했다.
그는 이를 두고 짤막하게 말했다.
“천마의 존재를 알려야겠단 생각 때문에 천수를 넘어서야했다. 후배가 보기에 추하겠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어.”
“…….”
그 말에 신승이 말없이 괴인을 내려다보았다.
여태껏 믿어 온 불법과 공부가 괴인의 행동을 용납하질 못해서, 소림의 계율을 통해 벌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이를 모를 괴인이 아니었기에 제자리에서 넙죽 엎드렸다.
“이번만 넘어가주면 안 되겠나? 그때 천마와 싸워서 살아남은 건 나뿐이라, 반드시 알려야 할 게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무예십팔반.”
괴인은 서문경을 흘깃 쳐다보며 하려던 말을 이었다.
“천마는 무예십팔반을 모두 다룰 줄 알며, 보고 싸우는 것만으로 무공을 훔칠 줄 아니 초전에 죽여야 하네.”
‘신비한 무공사전이 맞잖아?’
서문경의 심중에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불태워야 한다는 말만 들어서는 오해인가 싶었지만, 저 설명을 들으면 신비한 무공사전을 지칭하는 것이 맞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확실히 줄어든다.
‘기록에 남지 않은 천마가 과거에 있었거나, 무공사전의 원래 주인이 천마거나.’
차라리 후자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이런 기물을 가지고 있었으면 천마가 무예십팔반을 다루는 거야 어렵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천마가 무예십팔반을 그냥 다룰 줄 아는 거라면? 이런 기물이 없어도 완전무결한 마공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여러 가지 최악의 상상이 서로 꼬리를 물었다.
그 사이에 괴인의 설명을 들은 신승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보게, 서문 공자.”
“……예.”
“잠시 그 책 좀 보여 줄 수 있겠나? 저리 의심암귀에 빠져있으니, 직접 보여 주면 끝날 일이네.”
드디어 올 것이 왔나.
서문경이 잠시 고민하는 찰나였다.
스르릉…….
신승이 옆으로 치워 놨던 입구의 암석.
그곳을 통해 천천히 진입하는 한 사내가 있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는 입가에 수더분하게 길러진 수염.
어깨에 잘 정련된 대검(大劍)이 매여 있어 사뭇 야성적이었다.
“잠시 쉬어 가도 되겠나?”
대답은 듣지 않았다.
사내는 제멋대로 서문경을 스쳐 지나가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불을 피우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은연중에 풍기는 기세에서 무시무시한 고수라는 것이 느껴졌다.
‘솜털이 곤두서는걸.’
하물며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까지도.
서문경과 신승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서 사내에게 물었다.
“이름이 어찌 되시오?”
“기회를 주지.”
“무슨 말이오?”
“묻지 않을 기회.”
사내가 대검을 툭툭 두드렸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