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 (3)
“계속 따라오게.”
걸음이 이어졌다.
숭산의 산기슭과 골짜기를 거니는 걸음에 안개가 휘감겼다.
온몸이 축축해져 옷자락이 축 늘어졌다.
한 여름의 습운이었다.
신승의 뒤를 따르는 동안 서문경은 불쾌하게 척 달라붙는 옷자락을 일일이 떼어 내며 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보이는 암각불상의 눈동자가 두 무인을 훔쳐보는 듯했다.
안개 사이의 암자는 몹시 을씨년스러워서, 신승이 가끔 농담을 던지곤 했다.
“어릴 적에 귀신이 산다는 농담을 듣곤 했지.”
“믿으셨습니까?”
“불도를 배우는 동자승이 어찌 귀신을 믿겠나. 물론, 밤에 잠을 자주 못 이루곤 했네. 사형의 옆자리를 은근슬쩍 비집고 들어갔지.”
소림의 최고승으로 불리는 신승답지 않은 소탈한 이야기였다.
서문경은 신승이 엄숙할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재담꾼인 것을 깨달았다.
‘하기야, 진무신검도 이야기를 푸는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지.’
불경과 도경 모두 멀리서 바라보면 이야기집이기 마련인가.
한평생 가르침을 곱씹은 사람이기에 말로 푸는데 재주가 있는 듯했다.
서문경은 때때로 웃거나 신승에게 역으로 되묻기도 했다.
“과거에 항마승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방장에게 들었나?”
“예. 마인과 맞서 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거야 지금의 마교처럼 대대적인 집단이 아니라, 사연 있는 잡부가 우연히 마공을 접한 것뿐일세.”
그렇게 말하는 신승의 표정이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사뭇 음울함이 겹쳤다.
오걸 쯤 되는 고수라면 하나둘씩 과거사가 있는 걸까?
척안룡이나 무영신투 또한 마인에게 덴 기억이 있었다.
그건 아무리 친해져도 함부로 말해 주질 않았다.
무인답게. 자기 복수는 남에게 털어놓지 않고 스스로 이루겠다는 의지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신승은 재가 되어 버린 기억처럼 보였다.
“어쩌면 현 마교가 일부러 마공서를 뿌렸을지도 모르겠군.”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자네도 알겠지만 마공서는 관에서도 없애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지 않나? 일개 잡부가 우연히 접할 수 있는 게 아닐세.”
“그거야 그렇지요.”
당장 서장과 접하고 있는 서문세가만 해도 불온서적(不穩書籍)의 유입을 막는 데 많은 인원을 배분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마공서 같은 경우에는 마을의 안전에 밀접했다.
갑자기 촌민이 마공서를 익히고서 머릿속이 회까닥 돌아 버리면 한 마을이 불쏘시개가 되기까지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과정을 전생에서 봤던 서문경으로선 신승의 말이 낯설지 않았다.
십수 년이 아니라, 수년 뒤에 일어날지 모를 참사였다.
“본가를 비롯해서 곤륜파와 공동파가 함께 도울 겁니다.”
“몸집이 큰 군문임에도 날렵하군. 자네가 제의한 건가?”
“어릴 때 마인에게 납치당했던 이후로 아버지께서 예민해지셨지요.”
“그렇군.”
신승은 있는 그대로 믿어 주지 않았다.
어린 무인이라면 과거에 당한 납치를 부끄러워할 텐데 서문경은 이상하게 무덤덤했던 것이다.
아마 천무학관에 입관했던 시기에도 자기 스스로 움직였으리라.
그리 생각하니 서문경이 여간 청년이 아니었다.
소가주에서 쫓겨난 망나니란 소문도 음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노인의 취미란 다소 음습한 부분도 있는 법이라.
“자네, 술을 그리 좋아한다고 들었네. 언제 대작이나 하겠나?”
“……농담이 과하십니다. 소림의 어르신께서 웬 술입니까?”
“아예 대놓고 파계승이라고 하지 그런가?”
“어르신.”
서문경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신승을 흘낏 바라보았다.
속으로는 이미 수십 번이나 파계승이라고 헐뜯었지만, 아직 아쉬운 쪽은 자신이어서 꾹 참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승은 빙긋 웃으며 안개 속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봉우리를 넘어선 지 어언 일곱 번.
소림사와는 한참이나 멀어졌다.
숭산과 접한 어느 봉우리의 정상에 올라서야 신승의 발걸음이 멈췄다.
“여기 일세.”
신승이 오른손으로 한 지점을 가리키니, 서문경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검은색과 흰색이 얼룩덜룩하게 섞인 거대한 돌.
주변의 매끈한 돌과는 달리 작은 구멍이 이리저리 뚫려 있어, 폭포나 화산(火山) 주변에서나 볼 법한 암석이었다.
“이렇게까지 클 수 있는 돌입니까?”
“잡학에 능하군. 설명할 일이 덜겠어.”
신승은 가볍게 웃고는 암석을 옆으로 슬며시 밀었다.
그냥 왼발로 스윽 미는데 무게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땅바닥이 긁히는 소리조차 나지 않고서 암석이 조용히 밀려나는데, 주변에 있던 안개가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신묘한 광경에 서문경의 눈이 커졌다.
“……!”
“나도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다네. 이게 바로 불가의 신묘한……”
“대기의 압력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일어난 일 아니겠습니까?”
“…….”
“최근 서방에서 온 서책에 쓰여 있습니다. 신승께서도 한 번 접해 보시지요.”
“……자네, 재미없는 사람이군그래.”
자연의 신묘한 법식에 감탄하기보다 공부를 통해 분석한다는 것이 참으로 군관답다.
신승이 잠시 툴툴거리는 찰나에 서문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암석이 옆으로 치워져서 생긴 틈새 사이로 불쾌한 냄새가 흘러나온 것이다.
고이고 고여서…… 코가 문드러질 듯한 악취.
고인물 정도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며칠 전에 싸웠던 백야흔이었다.
‘그놈이 치르는 제사에서 이런 냄새가 났는데…….’
서문경이 과거의 기억을 헤집는 사이, 신승이 미리 경고했다.
“비위가 약해도 최대한 참게. 나도 곧바로 폐쇄하고 싶었을 정도니까.”
“…….”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죽은 시신을 비롯해서 여러 참담한 광경이 나열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곳에 우연히 갇힌 것인지, 돌을 죽을 때까지 긁다가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숭산 주변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나도 처음 보고 마교가 한 흉계인 줄 알았네.”
신승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속에서 끓는 분노와 동정심을 애써 속으로 삭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만은 숨길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살의였다.
“하나 이곳을 둘러보니 마교가 아니라…… 소림에서 파문당한 파계승이 만든 곳인 걸 깨달았네.”
“파계승이요?”
“언젯적 승려인진 모르겠으나, 고강한 무공을 지녔던 것 같네.”
서문경은 신승의 시선을 따라갔다.
동혈 안쪽,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진 벽면에 위치한 시신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한데 그 시신은 다른 것과는 다르게 썩지 않았다.
가장 먼저 삭아서 없어진다는 눈마저 곱게 삼긴 틈 사이로 흰자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문경은 팔뚝에서 닭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저자는 뭡니까?”
“나도 모르네.”
신승은 담담한 목소리로 주먹을 꽉 쥐었다.
“소림의 장서각을 뒤져서라도 저 악한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지만,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네.”
“……으음.”
“파문당한 파계승임에도 일신에 익힌 금강경은 그대로 남아있는 걸 보아, 소림의 나한진을 뿌리칠 정도의 고수였을 걸세. 그리고…….”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는 거지요.”
서문경은 미세한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
가히 수십, 수백 년은 지난 복식의 시신에서 미약한 생기가 남아 있었다.
심지어는 입이 아니라 피부를 통해서 대기와 호흡하고 있었다.
입구의 구멍 뚫린 암석을 통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는 뜻.
신승의 입술이 달싹였다.
“귀식대법에 능한 자겠지. 아마 지금도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걸세.”
“능한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긴 세월 동안 귀식대법을 유지하면서 생기를 유지할 수 있는 자.
그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있는 시신의 상태를 보면 그저 숨만 쉬고 있는 게 아니었다.
“굶어서 죽은 시신이나 벽을 긁다 죽은 걸 보면…… 반격할 정도의 힘이 남아 있거나 방비할 대책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바로 그걸세.”
신승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고 나면 직접 처리할 요량이었네. 그때 자네가 온 것이지.”
“……!”
“마교가 천하를 혼란케 함에도 소승이 직접 나서지 못한 건, 숭산에 있는 저 괴인이 급했기 때문일세.”
그 말에 서문경의 뇌리에 번개가 치는 듯했다.
전생에서 신승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이유.
그때는 마교의 급습과 겹쳐서 조용히 죽은 줄 알았지만, 만약 저 괴인 때문이었다면?
괴인과 동귀어진 했거나, 괴인 자체가 마교에 속한 마도 고수일지도 모른다.
서문경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귀식대법만으로 생기를 유지한 게 아닐 겁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네. 아마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흡성대법을 익혔을 가능성도 있네.”
흡성대법.
가장 역사가 깊으며, 현 마교조차도 익히지 못한 전설상의 마공.
심지어 흡성대법의 대가 끊겨서 대신한 것이 적마가 익히고 있는 적혈마공이 아닌가?
서문경은 조용히 칼을 뽑았다.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신 건 도와달라는 뜻이었습니까?”
“그러네. 자네 같은 고수가 있으면…… 내 천수가 다하기 전에 저자를 처리하고 마교와의 싸움에 한 손 거들 수 있지 않겠나?”
“이용이라고 하십시오.”
“하하, 그런 뜻은 아니었네만.”
신승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전방을 주시했다.
한 구의 시신이. 아니, 시신이었던 괴인이 조금씩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투둑, 툭.
어깨와 머리 위에 쌓여 있던 돌가루가 아래로 떨어졌다.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던 피부와 뺨이 생기를 되찾았다.
이를 본 서문경이 앞으로 질주했다.
‘완전히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끝낸다.’
바보도 아니고 귀식대법에서 벗어나는 동안 기다려 주겠는가?
어느새 무인이 되긴 했지만, 논리는 여전히 직선적인 군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문경은 상단전의 의념을 떠올렸다.
천주에 새긴 심상과 무공사전에서 배운 무공을 합했다.
“비검절우.”
동혈 안을 채운 안개가 검에 휘감겼다.
창궁무애검법의 광대한 검결을 서문검법에 채워, 어느 쪽으로 피하지 못하도록 검로를 새로이 짜냈다.
거기에 비마저 가르는 쾌검이 깃드니.
쐐액!
검을 찌르는 게 아니라 화살을 쏘아 내는 듯한 파공성이 좁디좁은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큭.”
귀식대법에서 풀려나던 괴인이 입술을 비틀었다.
생기를 되찾은 왼팔을 가볍게 휘두르는데, 서문경의 칼에 휘감겨 있던 안개가 자연스럽게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뒤이은 것은 흉악한 살기.
“……!”
신승의 표정이 급변하여 나한장을 펼쳤다.
소림의 최고수다운 불가의 공력이 살기를 여반장으로 뒤집으며 괴인의 몸을 후려쳤다.
쩌억!
괴인의 등 뒤에 있던 암벽이 손바닥 모양으로 갈라졌지만.
“꽤 아프군.”
괴인은 피 한 점 흘리지 않고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기가 완전히 돌아온 괴인의 온몸에 신승과 같은 불가의 공력이 일어났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