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 (2)
많은 사람은 소림사를 숭앙할 뿐, 소림사보다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숭산의 풍광(風光)을 알지 못한다.
전생에 만난 무승이 넋두리처럼 하던 말이었다.
서문경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슬쩍 들었다.
“……호오.”
작은 감탄성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희고 고운 암벽.
그 사이에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 얼굴이 사라진 암각불상과 석굴들.
그 앞에 있는 비석에서 오래 전에 치렀던 제사의 흔적이 언뜻 보이는 듯하다.
현재의 대명은 무당을 총애하지만, 과거에는 소림을 아꼈다는 뜻이라.
대명의 신하인 서문경은 그곳에서 고개를 돌렸다.
숲 없는 석산(石山)이라지만 세로로 주름을 잡은 듯 접힌 암벽에 푸른 나무가 이끼처럼 끼어 나름의 정광을 이루었다.
‘이래서 방장이 신승이 은둔하고 있는 곳을 직접 알려 준 건가.’
맨땅에서 신승을 찾아 헤맸다면 열흘이 넘게 걸렸을 것이다.
소림의 방장에게 감사함을 느낀 서문경은 얼굴이 유실된 암각불상을 향해 합장했다.
비록 불가의 가르침을 따르진 않지만, 오랫동안 민초와 함께 한 가르침에 대한 경의는 있었다.
물론 마교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데 천수를 따지는 신승에게 경의는 없었다.
어쩌면 만나자마자 검을 들이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래저래 사고나 치고 다니는 성격이라, 동생에게 소가주를 넘긴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바로 그때.
“음.”
여름의 쨍한 햇볕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단층을 이루는 암벽을 걷다가 무심코 태양과 눈을 마주한 것이다.
그사이에 묵직한 기척이 가까이 다가왔다.
“서문경이라고 하였던가?”
“……예.”
“소승을 만나러 왔겠지.”
그 말에 서문경이 실눈을 떴다.
세월을 거스르지 않고 나이를 먹은 진무신검과 다르게 신승은 장년인에 가까울 정도로 젊었고 체구가 건장하여 웬만한 청년보다 컸다.
주먹은 특히 컸다.
암벽을 깎다가 생긴 상처가 아물고 찢어지고를 반복하다 생긴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여 있었다.
“내가 신승일세.”
서문경이 눈을 완전히 뜨자 신승의 등 뒤가 훤히 보였다.
그곳에는 오로지 손가락과 주먹으로만 깎은 수많은 암각불상이 존재했다.
* * *
신승.
그에 대한 정보는 서문경도 많지 않았다.
곤륜파와 공동파를 파죽지세로 멸문시킨 마교가 서둘러 소림사를 노렸고, 대부분의 기록이 유실되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소림사의 신승은 오걸이라는 칭호가 생기기 전부터 절대고수로 불리고 있었다.
그것도 진무신검보다 일찍, 현재도 나이를 먹지 않은 채로.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서문경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생에서 마교가 무림을 공격한 것은 앞으로 십여 년 뒤.
그때까지 신승이 살아 있었다면 소림사가 무력하게 멸문당했을 리가 없다는 예감이 확실히 들었다.
그만큼 신승의 존재감은 확고부동하여 절대고수의 심상절기에도 불변(不變)할 것 같았다.
그 시선을, 신승 또한 알아차렸다.
“과연 젊어.”
“……사죄하겠습니다.”
“뭐 어떤가?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소승과 손을 섞어 볼 생각까지 하고 왔겠지.”
신승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자네 생각대로 정의맹에 몸을 의탁하진 않을 걸세. 이대로 숭산의 지맥에 등을 지지다가 순리대로 이 세상에서 떠날 터이니.”
자기 죽음을 말하는 것치고는 너무나도 가벼운 어조.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보였다.
실제로 신승의 과거사는 항마승이던 시절부터 다사다난하여 진무신검 못지않은 은원을 쌓았다고 들었다.
‘만약 은거를 깨고 세상에 나온다면…… 사파 쪽에서 말이 나오려나.’
당장 척안룡과 녹림과 싸웠던 과거사가 있지 않나.
서문경이 입술을 달싹이기도 전에 신승이 먼저 손을 휘저었다.
“이미 뜻을 정했으니 돌아가게.”
“허나……”
“말을 바꿀 사람처럼 보이는가?”
“선배께서 이대로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나면, 남은 승려들이 마교에게 죽고 말 겁니다.”
“…….”
그 말에 신승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정을 모두 버렸다고 한들, 기억과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를 공유했던 사람들의 죽음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문제는 저 청년의 얼굴이다.
허세를 떨거나 겁을 주려는 게 아니다.
불경에 적힌 확고부동한 가르침을 말하듯, 일어날 사실처럼 말하는 것에 흔들림이 없다.
신승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여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전신을 울리고 세맥을 달구었다.
“서문세가는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겁을 주는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마교에 세작이라도 심었나?”
“글쎄요. 하지만 곤륜파가 무너지면 곧바로 소림사를 치겠지요.”
신승의 얼굴에 불쾌함이 스몄다.
태양을 등진 등 뒤로 불가의 정공(正功)으로 쌓은 내공이 등허리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이유가 무언가?”
“천수를 걱정 없이 누리겠다고 세상사에 너무 관심이 없으신 거 아닙니까?”
서문경은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당장 적마만 해도 호북성에 갑자기 나타나서 천하십대고수를 무력화시켰고, 백야흔은 오걸 중 둘을 죽일 뻔했다.
이 혼란 속에서 소림사가 멀쩡할 줄 알았던 걸까?
아니면 전생에 비해 너무 마교가 본색을 빨리 드러내서 달라지고 있는 걸까?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적어도 전생에선 마교가 신승이 죽을 때까지 침묵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지금이 신승의 마음을 돌릴 최적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서문경은 목소리를 한차례 다듬고는 요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종남파의 대화재와 멸문에 가까운 피해.
화산에서 있었던 싸움과 화산파를 수복하기 위한 노력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신승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이건…….”
“방장님도 이제 막 알았겠죠. 전서구가 빠르다고 해도 바람만큼은 아니니까.”
“으음.”
신승은 잠시 침음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래도 소승은 나설 수 없네.”
“……예?”
“순리는 순리일세. 내 마음이 안타깝고 분하여도 욕망을 이루기 위해 천수 이상을 살아서야 혼란만 더해질 뿐일세.”
“…….”
서문경은 침묵했다.
신비한 무공사전을 통해 과거로 돌아왔고, 천하가 불타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발 벗고 뛰는 자신을 비웃는 말처럼 들렸다.
그놈의 순리.
천수, 천명이 뭐라고 죽어 가는 사람을 방치한단 말인가?
“하하.”
소리 없이 웃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질 못했다.
서문경은 왼손으로 이마부터 얼굴을 쓸어내리며 많은 것을 비웃었다.
천수와 순리를 따지는 신승.
인신공양까지 해대는 마교를 막지 않는 하늘.
전생에서 힘없이 당하고서, 뒤늦게 고치겠다고 발 벗고 뛰다가 이렇게 한 방 먹은 서문경 자신까지도.
모든 걸 비웃고서 어깨를 폈다.
시야가 왠지 모르게 흐리멍덩했다.
곧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거무죽죽해서인가, 아니면 얼굴을 쓸어내릴 때 눈을 세게 누른 것 같았다.
뭐, 아무렴 어떤가.
서문경이 다시 끅끅 웃자, 신승이 물었다.
“뭐가 그리 우스운가?”
“하늘이 아무리 무정한들, 사람이 어찌 하늘이 되려고 하십니까?”
“하늘의 가르침을 배워 미련을 벗어던지고 탈각하고자 하는 걸세.”
“정을 가진 몸뚱이로 무정한 대우주를 닮으려고 하는 것이 발버둥 같지 않습니까?”
“……선문답을 하자는 건가?”
“저는 그리 고상한 가르침은 모릅니다. 싸우는 법이나 술을 잘 마시거나, 상대 겁주는 법을 많이 배웠지요.”
“…….”
“하지만 순리라는 것 때문에 가까운 친지가 죽어나가도 고개를 돌리는 것이 대단한 가르침 같진 않습니다. 손톱이 부러지더라도 칼을 붙잡아야 할 때가 아닙니까?”
“가깝다고 하여 어찌 영생할 수 있겠나? 안타까운 죽음일지어도 사람이라면 윤회생사(輪迴生死)의 업에서 벗어날 순 없네.”
“윤회생사고, 업이라.”
안타까운 죽음이라도 언젠가 죽기 때문에 미련을 품지 않아도 되고, 언젠가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림이라.
서문경은 클클 웃었다.
“참으로 생각하기 편한 가르침입니다.”
“나도 천수가 남았다면 무승을 모아서 정의맹에 의탁했을 걸세. 하지만…….”
“마교가 그걸 알고서 죽길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습니까?”
“이보게.”
“말씀하십시오.”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나.”
“어쩔 수 없는 일.”
서문경은 신승의 대답을 곱씹었다.
그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대명의 토지가 불타 혼란밖에 없는 가르침이 바로 선다면, 그 또한 순리라는 것일까?
서문경은 눈을 깜빡이고 신승을 보았다.
그토록 무겁고 진중하던 존재감이 갑자기 가볍게 보였다.
뜻이 일치하지 않으니 존경보다는 실망이 앞섰다.
한데 신승이 품은 뜻마저도 어려움을 포기하고 오래 전부터 이어 온 가르침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망스럽습니다.”
“무력하게 보이는가?”
“대우주를 답파(踏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굴종하여 죽을 때를 기다리는 송장이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
서문경의 힐난에도 신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할 말도 딱히 없었다.
천수가 다가와 순리에 몸을 맡기는 것이, 대우주와 맞서싸우는 무인의 정신과는 사뭇 달랐다.
송장이 눈앞에 있지 않느냐는 비난.
서문경의 말이 또 다른 화두로 남았다.
신승의 가슴속에 묵직한 돌이 얹힌 기분이었다.
“송장이라……”
“신승을 보러 왔는데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만 여기 있으니 정말로 참담합니다.”
“자네는 소승이 숭산에서 하산하여 마교와 맞서길 바라나?”
“저였다면 천수를 넘겨서라도 싸웠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서문경의 눈빛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약관도 되지 않은 청년의 눈동자가 아니라, 일생을 더 살아 본 장군처럼 보였다.
‘허세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
신승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서문경에게 손짓했다.
“따라오게.”
“……?”
“자네에게 보여 줄 것이 있네.”
숭산에서 은거한 지 수십 년이던가.
그동안 여러 암벽과 석굴에 지내면서 발견한 게 있었다.
‘어쩌면 이 젊은이에게 이어진 연일지도 모르겠군.’
죽기 전에 폐쇄할 작정이었건만, 순리와 완전히 등을 등진 채 천하를 안정시킨다는 서문경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신승은 서문경에게 따라오라는 듯 앞서 걸어갔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