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30화 (128/250)

변화 (2)

* * *

“안 본 사이에 더 발전했네.”

연준호가 쑥스럽다는 듯 서문경에게 말을 붙여왔다.

그의 등 뒤에 관아에서 온 병졸과 인부들이 황폐화된 화산을 정돈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정의맹에 속한 무가와 그들에게 줄을 대고 싶은 상인까지도.

중원의 준걸(俊傑)이라고 불릴 사람들 전부가 화산을 수복하는데 손을 걷어 올렸다.

이 모두 서문경의 나이답지 않은 무위 덕택이었으니.

‘나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이나 멀었구나!’

매화검법을 일향(一香)으로 승화하여, 매향지경.

연준호는 그 심상을 높은 경지로 도달하기 위한 이정표로 삼았다.

약관이 되기 전에 성취하여 서문경에게 밀리지 않겠다고 은근히 경쟁심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백야흔과의 싸움을 보니…… 아직 한참 멀었지 않나.

자기 혼자서 너무 열을 낸 게 아닐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서문경이 빙긋 웃었다.

“아까 보니 너도 마찬가지던데.”

“뭐, 삼 년 동안 놀지는 않았으니까.”

“향이 짙더라고.”

“……향?”

서문경에게 자신의 수련을 말한 적이 있었던가?

연준호가 한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껄껄 웃었다.

“천무검왕 아니랄까봐 대충 보면 안다는 거야?”

“천무검왕이라니 그게 뭔…….”

“신동이라고 불릴 나이는 지났잖아.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너도나도 별호를 붙이려고 난리지.”

“허, 그런다고 내 가문에서 뭐가 떨어지는 건 아닐 텐데.”

“앞으로 정의맹에 한 자리 차지할 신진고수의 별호를 자기가 짓는 재미가 있지 않겠어?”

“……쯧.”

마교가 무림 곳곳에 숨어 있는 마당에 무슨 별호를 짓는 풍류를 즐긴단 말인가?

서문경이 인상을 찡그리는 사이에 염소수염을 한 현령이 쪼르르 다가왔다.

“서문 공자. 아니, 천무검왕 대협!”

“그냥 공자라고 하십시오.”

“아. 별호를 싫어하는군.”

현령이 자기 옆에 있는 문인을 잠시 째려보고는 하려던 말을 이었다.

“서안부 지부대인에 대한 처분은 황실로 전달했네. 서문세가에도 지급(至急)으로 보냈고.”

그렇게 말하는 현령의 얼굴이 푸르죽죽하여 기운이라곤 한 톨도 없어 보였다.

하기야, 말년에 편하게 살자고 앉은 현령일 텐데 이렇게 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나.

서안부 지부대인이 북적 태생인 데다 사교(邪敎)의 중추였으니까.

그의 부재로 일이 전보다 예닐곱 배는 많아질 터다.

벌써 눈앞이 깜깜한지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왠지 모르게 슬펐다.

서문경은 현령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다가 주백경에게 손짓했다.

“지부대인이 부재하는 동안 누구든 현령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이걸 맡기겠습니다.”

“이, 이건……!”

서문이라는 단어가 적힌 은패(銀牌).

명필이 쓴 듯한 필체가 양각되어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귀해보였다.

심지어 그 테두리에는 비싸기로 유명한 자단목이 예술품처럼 일정한 무늬로 가꾸어져 있었으니.

서문세가의 이름을 잠시 빌려도 된다는 뜻일 것이다.

“잘 쓰겠소, 서문 공자!”

현령은 서문경의 뜻을 곧바로 알아듣고는 고개를 작게 숙였다.

마음 같아서는 더욱 감사함을 표하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많았다.

자칫 잘못하면 군관과 편을 함께 한 문관으로 찍힐 위험이 있었다.

그 사실을 서문경도 아는지라 그저 웃고 지나갔다.

중요한 것은 감사치레가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빚을 지우면 당분간 섬서성 서안부를 지나는 데 막힘이 없겠지.’

천하가 넓어도 너무 넓어, 산길을 통해서야 빠르게 지나다닐 수가 없다.

가장 좋은 길이 바로 관도였고, 용진명이 서문경을 감시한 것 또한 관도였다.

이곳을 통할 자격은 곧 문관의 허락.

현령에게 서문세가의 패를 쥐어 줌으로써 다음 지부대인이 오기 전까지는 서문세가와 정의맹 모두 편히 관도를 지날 수 있을 터였다.

앞으로 섬서성의 관도를 지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걸 모를 만큼 현령의 눈치가 없지도 않고.’

서문경의 시선에 현령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씨익 웃었다.

뒤이어 연준호에게 고개를 슬쩍 돌렸다.

“고명하신 화산의 도사님 아니시오! 매화옥검의 위명은 익히 들었소이다!”

“본산이 이렇게 무너진 마당에 위명과 고명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물며 애초에 고명하지도 못했습니다.”

“하하, 쑥쓰러워하기는. 소협의 협객담이 섬서성 전체에 퍼져 있는데.”

그 말에 서문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서문세가에서 지나가듯 얼핏 듣긴 했지만, 호북성에서 술이나 같이 마시던 친구가 섬서성의 협객이라는 게 참으로 우스웠다.

이에 연준호가 손을 재차 내저었다.

“성격이 급하여 저지른 일 중 하나일 뿐입니다. 제가 괜히 나섰다가 일이 커지지 않았나 걱정되기도 하고요.”

“허허…….”

흡족하게 웃는 현령의 미소가 짙어졌다.

척 봐도 무슨 인연이 있어, 연준호 덕분에 큰 이득을 본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지역에서 목 뻣뻣한 문관이 저럴 리가 없다.

서문경은 연준호의 어깨를 툭 쳤다.

“고새 섬서성의 협객도 되고 말이야. 매화검법의 발전이 실전에 있었구만?”

“뭐, 아직 완성하지 못해서 마인에게 쩔쩔 맸지만 말일세.”

“완성 됐어도 어려웠을 거야. 진무신검과 무영신투가 달라붙어도 꿈쩍하지 않았던 놈이니까.”

하물며 다 죽어 가는 몸으로도 끝까지 증오를 불태우다가 죽지 않았던가?

백야흔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린 연준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칠로두가 다 그런 놈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두려워지는군.”

“쉽진 않을 거야.”

서문경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생에서도 칠로두에게 승리한 적은 없었다.

수 년 동안 처절하고 끈질긴 항전 끝에 한 명, 한 명씩 패퇴시키거나 동귀어진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칠로두가 한꺼번에 덤벼도 이기지 못한다는 천마까지 있지 않나.

‘전생에 비하면 지금 백야흔을 잡은 건 아주 큰 성과지.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죽일 수 있었으니까.’

이 싸움이 얼마나 가치 있었는지,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다는 것을 서문경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칠로두의 저력을 처음 경험한 현생의 무림인들은 어떨까?

서문경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런 괴물 같은 놈이 여섯이나 더 있다니…….”

“천마라는 놈도 있고, 그놈을 따르는 수도 엄청나지 않나? 가문으로 돌아가서 도망칠 계획이나 짜는 게…….”

저들끼리 소곤거리는 말에 무력감과 절망이 있었다.

싸움이라는 게 성립한 건 오로지 진무신검과 무영신투가 있기 때문이지, 강호에 저런 고수는 흔치 않았으니까.

여섯 놈이 각기 다른 곳에서 좁혀온다면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 귀결이 무림인들의 마음을 천천히 틀어쥐었다.

마교가 가진 힘에 사로잡히는 듯했다.

이에 성하민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만들 해요.”

“……?”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조리 있게 말하진 못할 것 같아요. 그래도. 도망친다고 해서 잘될 거란 보장이 없잖아요. 북적이랑 남만, 왜구가 모두 남아 있는 마당에요.”

성하민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있었다.

어릴 적 마교에게 납치당할 뻔한 경험과 선명하지 못한 기억.

그 두 가지가 여전히 성하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매일 일어나면 식은땀이 머리맡을 적실 만큼, 악몽은 끊이지 않았다.

‘……한때는 그냥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싸우는 사람이 있어서였다.

몇 번을 피투성이가 되고, 쓰러지고, 위험에 처해도 항상 병석에서 일어나고 다시 부딪치는 사람이 있었다.

곤륜파에서나 공동파에서나 ‘싸우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 병석에 눕지 않았나.

성하민의 시선이 서문경에게 향했다.

그의 노력이 이번의 승리를 가져왔다.

부담감에서 도망쳤다면 이루지 못했을 쾌거였다.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도망치지 않고 도운다면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셨잖아요?”

“그건.”

무림인들이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랬다. 절대 이기지 못할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서문경의 전술이 있어서 백야흔을 쓰러트리는 데 일조할 수 있었다.

도망치지 않아서 이룬 성과였다.

가문에 돌아가면 떳떳이 어깨를 핀 채로 말할 수 있는 공적.

성하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해서 그런지 입술이 조금씩 긴장으로 떨렸지만, 용기를 냈다.

“다른 칠로두도 이런 식으로 쓰러트릴 수 있다면…… 쟁취할 수 있다면…… 도망쳐서 얻는 것보다 더 값진 걸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정말이지, 성하민에게 말재주라곤 없었다.

도망쳐서 얻는 게 뭔지도 모르고 더 값진 게 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미래가 더 밝을 것이라고 호소한다.

엉터리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꾹 참았다.

‘저런 근거없는 믿음이 지금은 필요해. 나중에도 필요하고.’

황실에 스며든 흑향을 떠올리자면, 앞으로 상황이 나빠질 가능성이 너무 크니까.

서문경은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다가 문득 한 가지를 집어냈다.

“나도 저렇게 생각했었지.”

“……경아?”

연준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저런 소리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서문경의 얼굴은 제법 진지했다.

“삼 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책 없이 움직인 이유가 정말 저런 거라서.”

도망치자면 삼 년 전에도 할 수 있었다.

서문세가에서 비싼 것을 추려서 뛰쳐나가, 저 멀리 바다를 건너면 어디든 가서 살아갈 수 있었다.

이쪽이 확실히 합리적이었다.

칠로두와 싸워 제대로 이겨 본 적 없으며, 천마를 꺾을 가능성은 가히 불가능했으니까.

땅을 버리고 이름을 버리면 편하게 살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러지 않았다.

“지금의 마교는 과거에 한 번씩 졌던 패잔병들이 수백 년이나 고여서 만들어진 집단이야.”

서문경은 낮았던 목소리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자그마했던 소리가 조금씩 커져, 불씨에 바람을 지핀 듯했다.

“그놈들한테 밀려서 우리가 다 죽고, 노예처럼 부려진다면…… 선현에게 무슨 낯을 보이겠어?”

“…….”

그 말에 무림인들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백야흔이 워낙 강대하여 싸움이 되지 않았지만, 이곳에 모인 것은 화산파가 위험한 걸 알고도 온 명가의 무인이거나 야심가였다.

자존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너무 강력하여 잠시 자신감을 잃었던 것뿐.

그걸 서문경이 다시 부채질했다.

아주 먼 과거에 패배하여 복수하러 온 사교에게 터전을 넘긴다는 것이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듣고 보니…….”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이 땅에 누가 살아갈 수 있겠나? 시체나 파먹는 것들이 점령할 텐데.”

얼굴의 그늘이 하나둘씩 걷혔다.

도망치고 피할 궁리만 하던 생각을 조금씩 무인의 외골수와 자존심이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멀리서 보던 무영신투와 진무신검이 엷게 웃었다.

“이거, 우리가 할 일을 후학이 하니…… 미련이 없겠는걸?”

“그러게 말일세.”

서문경.

스스로는 부정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천무검왕이라는 별호가 참으로 어울렸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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