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29화 (127/250)

변화 (1)

피땀으로 젖고 찢어진 무복에 서광이 비추었다.

화산을 자욱하게 채우던 먼지구름은 가라앉고 청명한 하늘과 무더운 더위가 서문경의 어깨를 내리쬐었다.

“……하아.”

숨이 턱 아래서 꽉 죄였다.

조문을 안다고 한들 상대는 백야흔.

무한한 체력과 금강불괴에 가까운 외공을 가진 마도 고수였으니, 수백 초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운룡대팔식과 대주천복마검의 합일도 그 앞에서는 귀찮고 번잡스러운 정도였다.

만일 진무신검과 무영신투가 없었다면 전멸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 사실이 서문경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전생에 비해 이렇게 눈부시게 발전했어도…… 칠로두 하나 때려잡기가 어렵단 말이지.’

전생의 관존은 따라잡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때의 완성된 중단전은 없을지언정 약관 이전에 오걸과 좋은 싸움을 이룰 수 있다면, 앞으로 토대를 다지면 그만이니까.

그럼에도 백야흔을 물리치는 것이 이리도 오래 걸렸다.

“푹 찌는구만, 안 그래?”

툭.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무영신투가 서문경의 어깨를 툭 쳤다.

서문경의 표정을 보고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린 것이 분명했다.

“뭘 그리 애석해하냐. 아직 나이도 적게 먹은 놈이, 저기 다 죽어가는 어르신은 어쩌라고.”

“여전히 버릇없는 후배로고.”

진무신검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 또한 서문경 못지 않게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칠로두 중 일인을 무찌르는데 다섯의 고수가 뭉쳐서 반나절 가까이 싸워야했으니, 그들이 숭앙하는 천마라는 놈은 얼마나 강대하랴!”

“……크으, 큭.”

어디선가 들린 힘없는 기침소리.

진무신검의 시선이 땅으로 향했다. 목이 반쯤 갈라져, 숨소리마저 낼 수 없는 백야흔이 증오스러운 시선으로 무인들을 쳐다보았다.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는 듯.

대부분의 무인들은 기가 질려서 백야흔의 시선을 피했지만, 서문경은 달랐다.

“왜. 지고 나니 창피하냐?”

“……흐으, 큭.”

“목이 그래서야 말하기가 어렵겠지. 그게 졌다는 거다.”

서문경은 백야흔을 똑바로 보았다.

반쯤 갈라진 목에 전신을 난도질당해 완전히 부서진 비늘들.

증오가 한껏 담긴 눈동자를 빼놓고 보면 처량한 패배자였다.

지고도 인정하지 못하는 저 자존심이 볼썽사나웠다.

하기야, 자기 자신을 지존으로 여기고서 타인의 심장을 탐해왔으니 인간을 어찌 동격으로 보겠나.

‘벌레한테 져서 억울하겠지. 저놈 딴엔.’

마공으로 극에 이른 놈들에게 있어 인간이란 동격은커녕 아래로 둬야 마땅한 거겠지.

서문경은 백야흔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먼저 지옥에 가있어라. 다른 놈들도 천천히 보내줄 테니까.”

“흐크윽……!”

백야흔이 마지막 힘을 다해 오른손을 뻗었다. 티끌 만한 힘으로라도 서문경의 목을 꺾고 말겠다는 집념이 담겨있었다.

서문경은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해볼 테면 해봐라.”

“……쓰, 으윽.”

백야흔은 온 힘을 다해서 서문경의 목을 향해 뻗었으나, 닿지 못했다.

애초에 손이 닿으려면 몸을 일으켜야 한다. 하지만 몸을 일으킬 힘은 없었다.

상체를 약간 올린 채로 팔을 버둥거릴 뿐.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목이 반쯤 잘리고도 저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평생 지존으로, 강자로 살아왔던 백야흔에게는 무게가 달랐다.

“………크으아아악!”

전처럼 고함으로 대기를 찢거나 고막을 터트릴 수 없다.

가히 단말마에 가까운 발버둥.

백야흔은 그것이 너무나도 분했다. 저런 쓰레기들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치욕스러워서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하지만 목이 잘린다는 것은 턱을 움직일 힘줄조차 없다는 것.

“벌레같구나.”

서문경은 짓궂게 웃으며 백야흔을 내려다 보았다.

“네가 그토록 무시하던 벌레들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버둥치는 꼴이 말이야. 자. 목을 이렇게 대주고 있잖냐? 해보라니까?”

“아악, 아아악!”

“소리만 지르는 게 전부냐.”

백야흔의 기괴한 발버둥은 일식경 넘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소름 끼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무인들이었으나, 가면 갈수록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발전하지 못한다는 뜻.

평생 승리만 취했던 백야흔에게 남은 것은 일그러진 자존심 뿐이었다. 그마저도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추하게 저러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백야흔은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내가…… 벌레였다니.’

무한할 줄 알았던 생명이 경각에 달할 때까지도.

백야흔은 끝까지 가슴속에 분노와 증오를 품었다.

‘저승에서 너희가 죽길 지켜보마.’

서문경의 웃음이 절망으로 바뀌길 바라며.

백야흔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 * *

-마교의 마도 고수, 화산에서 죽다!

이 소식이 무더운 더위를 따라서 중원을 주파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삼 년 만에 찾아온 승전보에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진무신검과 무영신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구만!”

“거기에 천무신동이 있어서 큰 도움을 줬다는데?”

“신동은 무슨? 이 사람아. 이제 약관이 다 되어가는 나이인데 아이가 뭔가!”

천무검왕(天武劍王).

청년의 나이에 오걸과 대등하게 겨룰 줄 알며 백야흔을 무찌르는데 큰 무공을 세운 서문경에게 사람들은 아낌없는 칭송을 보냈다.

심지어 그 마도 고수가 칠로두에 속한 절대고수라는 것까지 떠돌기 시작하자, 서문세가에 수많은 마차가 왕래했다.

“연을 맺고 싶습니다.”

“우리는 군문이요. 이런 삿된 거래로 연을 맺지 않소.”

그때마다 서문이현은 선을 긋고 무림세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동네 아이마저도 알 수 있었다.

‘정의맹에 투신하라는 건가…….’

‘쯧, 먼 길로 돌아가야겠군.’

마교와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의맹.

정파와 사파, 오대세가마저 뭉치도록 하겠다는 대명의 뜻이 담긴 곳에 선뜻 발을 들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서문경이 진무신검이나 무영신투와 깊은 인연이라는 것이 알려졌으니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서문경의 위명이 정의맹으로 이어지는 반면, 다른 곳에서는 어두운 암류가 흐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밀실.

섬서성의 은밀한 심처에 양명성의 사지가 결박되어있었다.

“양명성이라고 했나?”

“…….”

청마는 히죽 웃으며 양명성의 뺨을 툭툭 쳤다.

“자네 스승은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 궁금하지 않나?”

“……시끄럽다.”

양명성이 가래침을 퉤 뱉었지만, 청마는 아무렇지 않게 섭선으로 쳐냈다.

도리어 가래침이 양명성의 코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닦아줄까?”

“……아예 핥아먹지 그래?”

“입심이 자기 스승이랑 다르게 제법 매섭군. 잡아오길 잘했어.”

청마가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백야흔이 종남산에 불을 지르고 화산으로 향하는 동안, 양명성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납치한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특히 그가 검치의 제자라는 사실을 듣고 심장이 멎을 뻔하지 않았나?

‘검치 그놈이 어떻게 대응할지 참으로 궁금해지는군.’

청마가 보기에 검치란 참으로 우둔하고 모순된 놈이었다.

한때 마교와 싸웠다가 많은 것을 잃고 은둔했다가, 기회를 봐서 적마의 목을 날리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더 이상 얽히기 싫다며 다시 숨어든 꼴이, 참.

“겁쟁이로군.”

“……뭐?”

“스승이나 제자나 똑같단 소리야.”

청마의 눈이 웃음기를 머금고서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에 조금씩 떨고 있는 양명성의 어깨가 보였다.

“애써 용기를 내려고 하지만 쉽게 되진 않는 모양이야.”

“…….”

그 말에는 양명성도 부정할 수 없었다.

손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데, 어찌 의연할 수 있을까?

아직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자길 무시하고 버렸던 놈이나 가문에 가서 박살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 와중에 의협심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어서, 화산으로 가다가 이런 놈한테 붙잡힐 줄 누가 알겠나.

하지만 양명성은 청마에게 굴하지 않았다.

“차라리 죽이지 그래!”

“내가 왜?”

“종남파의 도사가 산 채로 불타도 가만히 있던 사람이 날 구하겠다고 올 것 같아?”

양명성은 억지로 씩 웃어보였다.

뻔한 거짓말이었다. 정말로 자신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진즉 사천성에서 내버렸을 검치였다.

‘아마 지금도 날 찾겠다고 섬서성에서 난장을 피우고 있겠지.’

검치의 얼굴을 떠올리니 왠지 모르게 부아가 치밀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따라와주지.

그 생각에 골몰하던 도중이었다.

“하, 하하하하!”

크게 웃어젖힌 청마가 눈물까지 닦아냈다.

설마 뻔한 거짓말에 속을 줄 알았냐는 듯, 눈가가 샐쭉해졌다.

“당신이 검치를 안 시간보다, 내가 더 오래 알아왔어. 그놈의 정 많은 성정을 어찌 모르겠나?”

“……한때 동료였다던데.”

“맞아. 검치가 아니라 검마라고 불렸지.”

청마가 잠시 과거 기억을 떠올리고는 손뼉을 쳤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

양명성의 눈가가 크게 커졌다.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는 청마에 비해, 지금 나타난 남자는 살기와 혈기를 전신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새빨간 머리카락과 장포.

저 차림새의 남자를 강호의 소문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설마…… 적마?”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좋겠군.”

“닥쳐라.”

적마는 청마의 놀림을 욕으로 받아치고는 양명성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촤르르륵!

적마의 손가락 끝에 맺혀가는 핏방울.

그 자그마한 핏방울이 밀실을 피냄새로 가득 채웠다.

“이놈을 혈인으로 만들면 된다고?”

“그래. 엊그제 봤던 놈처럼.”

“……너도 참 악취미군. 대체 뭘 원하는 거냐?”

적마는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자길 사로잡은 놈치고는 정말로 시덥잖은 일만 시키거나, 심심풀이로 괴롭히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하지만 청마의 생각은 지극히 진지했다.

“재미.”

“뭐?”

“열등감에 미쳐서 자기 가문을 부수는 놈이 있는가 하면, 자길 구하러 온 스승한테 칼을 박아넣는 놈도 있어야 재밌지 않겠어?”

“……너랑 흑향이 다를 게 뭐냐?”

“미학을 모르는군.”

청마가 정색하며 적마를 노려보았다.

어찌 그리 단순한 것을 모르냐는 힐책이 일다경 넘게 이어졌다.

그동안 양명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시선을 떼지 못하겠어.’

적마의 손 끝에 맺힌 핏방울.

저 안에 담긴 무언가가 양명성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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