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흔 (10)
서문경은 머릿속에 운룡대팔식과 대주천복마검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스르릉.
칼을 빼는 동작에 절도가 있었다.
단칼에 사문의 검법을 모두 담으려고 했던 욕심과 갈망, 미망 따위가 내관혈을 흐르는 내공에 담겼다.
“……!”
그 사이한 광경에 백야흔이 잠시 주춤했다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직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청년에게 불식간에 뒤로 물러나다니, 이게 무슨 굴욕인가?
주먹을 꽉 쥔 손에 핏물이 맺혔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서 생긴 핏자국에 서문경을 향한 경멸이 있었다.
“반드시 네놈만은 처죽여 주마!”
백야흔의 포효가 살기에 젖다 못해 마기에 물들었다.
뒤이어 팔을 강하게 휘두르는데 핏물이 한순간 일(一)자로 그어졌다.
후우웅!
분연히 일어나는 먼지와 돌풍.
백야흔을 향해 내질러졌던 두 창의 끝이 흐트러지는 듯했지만.
“머뭇거리지 마.”
서문경은 신공절학을 합하는 도중임에도 성하민과 주백경을 다독였다.
단순히 안법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사지를 헤치고 성장한 정신력이 천주심경을 만나서 더더욱 강건해진 덕택이었다.
까득.
그 시선과 마주한 주백경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한순간 주의가 흐트러졌다는 것이 창피했다.
“예!”
힘차게 대답한 주백경이 한 걸음 더 깊이 내디뎠다.
창날이 대기의 흐름을 타고 미끄러져, 백야흔의 목젖을 향했다.
그와 동시에 성하민의 창이 하복부를 향하니 완벽에 가까운 합격이었다.
백야흔이 가만히 있었다면.
“쓰레기들이!”
일신에 배운 무공은 없었으나 세월이 백야흔에게 전투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가장 빠르게 적을 침묵시키는 것.
무력화되지 않게 몸을 방비하는 법.
두 가지만은 이곳의 어느 무인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마교에 입적하기 전, 수백 년에 가까운 투쟁이 백야흔의 몸에 새겨져 있었으니까.
본능이 백야흔의 몸을 움직였다.
스르륵, 파앙!
전력을 다한 진각에 백야흔의 몸을 묶으려던 천잠사가 고꾸라졌다.
가뜩이나 심하던 먼지가 더욱 짙어지니 무인들 또한 마도 고수를 견제할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지극히 짧은 순간.
백야흔과 두 무인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제야……!”
백야흔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무영신투나 다른 무인 놈들의 방해 없이, 드디어 대가리를 처부술 기회였다.
그러나 아직 한 명이 더 남아있었다.
스강!
먼지 구름을 걷어내듯 휘둘러지는 칼날.
느릿하게 휘둘러지는 것 같아도 검로에 담긴 부드러움은 백야흔의 주먹질을 휘감고도 남는다.
“또, 잘도 방해를!”
체력이 다하여 잠시 빠져있었던 진무신검.
그의 태극검은 강맹해서 강한 것이 아니라, 만류를 제어하기에 강한 것이니.
백야흔의 양팔이 진무신검의 검로에 휘감겼다.
“너도 힘이 빠지긴 하였구나. 방심했다고 한들, 이런 걸 뿌리치질 못하다니.”
진무신검이 얄밉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주백경과 성하민의 창이 백야흔의 살갗을 꿰뚫었다.
“……!”
백야흔은 흠칫 놀라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피를 전부 흘려도, 폭약을 얻어맞아도 멀쩡하던 몸이 이제 와서 망가지기라도 한 걸까?
의심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이대로 고민만 할 순 없었다.
“크윽.”
칠로두끼리 치고받은 것도 가히 수십 년 전.
그 이후로 처음으로 내뱉은 고통 어린 신음이었다.
백야흔의 미간이 찌푸려지다 못해 일그러졌다.
“너희는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누가 할 소리를.”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야흔이 고개를 돌렸다.
산사태라도 일어난 듯 먼지 구름에 뒤덮인 화산 중턱.
바로 옆에 있어야 보일 만한 공간에서 서문경의 눈동자가 청아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운룡대팔식과 대주천복마검.
두 신공의 조화에 이제 막 이해한 태허검결을 접목시키고 수정하는 작업이 두통을 불러왔다.
제아무리 신비한 무공사전을 통해 오성을 얻은 서문경이라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운룡대팔식과 대주천복마검이 비슷한 심상을 지니고 있어서 다행이지.’
여덟 걸음으로 곤륜산을 정복하길 갈망했던 보신경, 운룡대팔식은 공간을 접듯이 움직이며 칼을 휘두를 수 있었고.
대주천복마검은 사문의 검법으로 은하수를 이루길 바랐다.
공동파의 검법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 까닭이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서문경에게는 운룡대팔식을 펼칠 심상도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검법도 없었다.
심지어 백야흔의 힘에 대항하려면 태허검결까지 덧붙이기까지 해야 하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서문경은 계속해서 궁리했다.
‘전생처럼 상단전의 수련을 무시하고 무학을 등한시했던 내가 아냐.’
서문경은 검을 들었다.
백야흔을 향해 겨눈 채 앞으로 내달렸다.
“……!”
백야흔과의 거리가 다섯 보.
그 거리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좁혀졌다.
서문경의 걸음은 운룡대팔식이 되어 공간을 뒤집었다.
연달아 펼친 일검적심, 비검절우, 청운적하가 백야흔의 전신 사혈을 노렸다.
달려드는 서문경을 보며 백야흔은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복부에 창이 관통되었어도 그의 힘은 쇠하지 않았다.
사혈을 노리는 검기가 서로 이어졌다.
쿠콰콰콰!
수십 개의 검법이 하나로 이어지던 대주천복마검.
은하수처럼 이어져 있던 형태가 서문경의 칼을 따라서 이루어진 채 각각의 검기가 쏘아졌다.
내공을 아끼지 않자 검기는 검강이 되어 백야흔의 사혈을 집요하게 꿰뚫으려고 했다.
“허튼 짓을!”
백야흔은 호흡을 내뱉으며 손을 크게 휘둘렀다.
콰르릉!
관통상에서 조금이나마 재생되었던 핏물이 뿜어졌다.
한데 그 각도가 서문경의 눈가를 노렸다.
서문경은 백야흔을 보았다.
백야흔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있었다.
피할 틈은 없었다.
“칫.”
자기 핏물에 주먹까지 휘두르는 게 마치 뒷골목 잡배 같아서 비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저 주먹질에 담긴 힘은 결코 비웃을 수가 없다.
쿠우웅!
공간이 터질 것처럼 진동했다.
권압으로 운룡대팔식을 제한하려는 뜻이 훤히 보였다.
‘뚫을 수 있나?’
서문경은 머릿속의 고민을 지웠다.
지금은 궁리할 때가 아니었다.
무조건 뚫어야만 했다.
콰지지직!
칼끝과 주먹이 맞부딪쳤다.
내공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칼이 부서졌을지도 모를 충격이 손목을 통해 전신으로 퍼졌다.
뭔 놈의 힘이.
서문경은 속이 뒤집어질 듯한 구역질을 느꼈다.
그러나 백야흔을 쳐다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맑았다.
안법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 지금의 기회를 만들었다.
쩌적!
미세하게나마 한쪽으로 쏠려 있던 방향을 보고서 칼끝을 뒤틀었다.
찰나에 화경의 묘리와 태허검결을 통해 배운 기예를 섞었다.
“또 간사한 짓을……!”
“간사한 짓이 아니라 공부이고 궁리다.”
서문경은 한껏 비아냥거리고는 허공을 박찼다.
멈추지 않고 백야흔에게 뛰어들었다.
“……!”
주먹을 강하게 휘두른 탓에 백야흔의 품이 비었다.
몸에 박힌 창날 두 개가 피로 물든 것에 비해 상처 부위는 벌써 아물어 가고 있었다.
괴물 같은 놈.
서문경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비틀어졌다.
저런 놈을 잡기 위해 전생에서 얼마나 고생했었던지, 진무신검과 동귀어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허망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경험이 지금을 만들었다.
서문경은 백야흔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몸에 결함이 있는 걸 아나?”
“……?”
“마공으로 덕지덕지 만들어진 몸에…… 설마 마인놈들이 장치를 안 해 놓았을까?”
거대한 체구에 이어 온몸을 뒤덮은 비늘.
좌도방문의 마공으로 괴물을 기워 만들었는데 어찌 방비 하나 하지 않았겠나.
전생의 진무신검은 그 점을 노렸다.
늙은 몸으로도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칠로두를 잡기 위해 며칠 동안이나 집요하게 노렸다.
대맥부터 시작하여 세맥, 세맥의 극점까지도.
그 흔적을 전생에서 보았다.
고슴도치보다 더욱 빽빽한 칼자국의 시체를 보고서 서문경은 실마리를 얻었다.
“네 몸을 뚫은 창이 바로 그 증거야.”
수많은 무인에게 상처 하나 입지 않았던 백야흔이 창에 허무하게 꿰뚫린 이유란 바로 조문.
백야흔을 만들고 연구하던 좌도방문이 만든 약점이었다.
“……놈.”
백야흔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았다.
허세라기엔 이미 두 개의 상처를 경험했고, 자길 상대하는 서문경의 움직임이 능숙했으니까.
그사이에 주먹과 칼이 두 번을 교차했다.
꽈르르릉!
백야흔의 손톱이 수십의 검강을 찢었다.
“네놈을 붙잡아서 알아보는 수밖에 없겠군.”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지.”
서문경의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자, 잠시 호흡을 정돈하고 있던 무인들이 합세했다.
그들 또한 백야흔의 약점을 알았다는 듯 몸을 꿰뚫은 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지점.
좁쌀만 한 위치이긴 하나, 저길 노린다면 무적인 줄 알았던 백야흔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괴물의 자격을 잃은 백야흔에게 겁을 집어먹을 이유는 없었다.
특히 무영신투의 핀잔이 사기를 끌어올렸다.
“저 새끼도 결국 찌르면 꿰뚫리는 놈이었네.”
그 말에 진무신검이 탈진한 상태임에도 피식 웃었다.
“가지.”
“어어. 그래.”
오걸에 속한 두 절대고수와 주백경, 성하민.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목젖 꿰뚫은 자리를 양옆으로 찢으면 저놈도 죽겠지.”
“저흰 하복부를 노리겠습니다.”
대화는 여기서 끝이었다.
백야흔을 둘러싼 다섯의 고수가 전력을 다해서 합격했다.
그 와중에 서문경은 이를 악물었다.
양손으로 쥔 검에 힘을 더하고, 대주천복마검에 태허검결을 덧대려고 애썼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무학을 가진 신공이 어찌 섞이겠나?
계속해서 실패하는 도중에 진무신검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태허일세.”
“예?”
“태허 아래로 두면 될 일 아닌가.”
“……!”
그 말에 서문경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공동파에서 직접 익히고 수련하느라 익숙한 대주천복마검을 억지로 주(主)로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았다.
스르릉!
서문경의 비검절우가 백야흔의 목을 가르는 순간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