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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무공사전-127화 (125/250)

백야흔 (9)

눈으로 어설피 보고 흉내 낸다.

그 수준이야 겉치레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외형만 보았을 뿐, 안에 담긴 정수(精髓)를 따라할 순 없는 법이다.

하지만 서문경의 일검은 달랐다.

“……!”

백야흔의 철산고가 옆으로 살며시 밀려 나간다.

지축을 뒤흔드는 파공성이 허공을 때렸다.

주변을 날아다니던 날벌레 따위가 거꾸러지고 지반이 벗겨져 속을 드러냈다.

다만 서문경만은 검을 비스듬히 든 채 고요히 있었다.

달라진 것은 첫 자세에서 좌우가 달라져있을 뿐이었으나.

“쿨럭!”

서문경이 입가에서 핏물을 게워냈다.

무공사전에 적힌 태허검결을 보고 베꼈지만, 첫 시전인 데다 직선적인 서문세가의 동공과 어울리지 않았다.

‘개량이 필요해.’

진무신검의 파지법(把持法)이 검지로 여유를 둔다면, 서문경은 꽉 붙잡고서 강검으로 밀어붙이는 파지법.

매화검법의 화려함에 서문검법과 다름을 느꼈듯.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서문경의 입가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무신검이 그걸 듣고서 고개를 느릿하게 들었다.

“이 몸으로 말인가?”

“예.”

“허허, 공짜로 배운 것으로 모자라 조언까지 바라는군.”

“눈앞에 이놈이 있잖습니까.”

“그런가, 그랬지.”

진무신검이 고개를 털었다.

수염에 엉겨 붙은 핏덩이가 툭툭 떨어졌다.

하물며 오금마저 흔들리고 있으니 걸음을 옮길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백야흔의 고함이 화산을 뒤흔들었다.

“……크윽!”

“뭔 놈의 소리가!”

고막이 찢어질 정도의 소음.

대부분의 무인들이 귀를 붙잡고 쓰러졌다.

평소에 심공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극소수만이 미간을 찌푸리는 걸로 그쳤다.

쩌억, 쿵!

그와 동시에 백야흔과 서문경이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니.

‘……움직이기가 어렵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추하더라도 본산의 재산을 써서 양생술에 전념할 것을.

진무신검이 한심스러운 몸뚱이에 후회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어르신.”

“……?”

진무신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이제 막 약관이 되었을까?

잘 닦인 신체에 용모까지 준수한 사내가 자신을 부축했다.

이제 막 뛰어온 듯 전신에 땀이 범벅이었다.

“저는 화산의 말학, 연준호라고 합니다.”

“……고맙네.”

진무신검에겐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나 주변의 도사가 고개를 쳐들었다.

“준호야!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듣지 못했습니다. 보지도 않았고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죄송합니다, 선배.”

화산에 평지풍파가 일어났다는데 어찌 지체하겠는가?

하물며, 저 앞에 서문경이 백야흔과 대적하고 있거늘, 어찌 사문의 어려움을 알고도 모른 체 할까?

연준호는 간곡하기까지 한 선배의 외침을 무시했다.

대신에 진무신검에게 의중을 물었다.

“저도 돕겠습니다.”

“자네 같은 청년이 끼어들 싸움이 아닐세. 사문의 선배가 하는 말을 듣게.”

“저기 있는 친구가 제 동기입니다. 이곳이 제 본산이자, 사문이고요.”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그래.”

“천무학관에서 안 좋은 걸 배워서요.”

연준호의 시선이 서문경의 뒷모습을 향했다.

이제는 천무학관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여기 있어봐야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서둘러 떠나던 동기.

그 고집을 마지막 날까지도 꺾지 못했다.

도망치듯 떠난 동기가 행한 일은 무림사에 남을 위업인데도, 여러 날을 함께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화산파의 어려움을 보고 찾아오지 않았나.

화산이 무너질 정도로 크나큰 싸움을.

연준호는 진무신검을 어깨동무하고서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서실 수는 있겠습니까?”

“검이 닿는 곳까지만 데려다주게.”

“예.”

대화는 짧게 끝났지만, 사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어쩌다가 마도 고수가 화산까지 찾아왔나.

종남산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강호의 절대고수인 진무신검과 서문경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 모든 의문을 속으로 꾹 짓눌렀다.

당장의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보다 거대한 숙제가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자기 가문으로 돌아간 동기의 호투(好鬪)가.

스윽.

연준호가 엄지로 칼의 코등이를 밀어 올렸다.

진무신검의 부축이 끝나는 순간에 백야흔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그때, 서문경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뭐야, 너까지 온 거냐?”

“……!”

“뒤통수에 눈이 달렸거든.”

예리하게 벼려진 기감은 백야흔과 합을 나누면서도 등 뒤의 움직임까지 잡아낸다.

서문경의 경지를 어렴풋이 알아차린 연준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도 고수와 싸우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화를 걸어오는 친우의 모습이 우스웠다.

“내 사문이잖냐.”

“그럼 거들어. 힘들다.”

서문경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 뒤로 거대한 고함이 메아리쳤다.

목에 핏대가 빳빳이 오른 백야흔의 사자후였다.

“누구 앞에서!”

무인의 기예나 기교, 재주 따위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야성.

마공으로 이어 붙여진 육신과 힘만으로 성벽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서문경과 연준호, 진무신검을 향해 쏘아졌다.

“……이런!”

연준호는 서둘러 내공으로 귀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바로 옆에 진무신검이 있었다.

“부축해준 값일세.”

느릿하게 휘두르는 칼에 깃드는 현기.

감히 연준호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태극의 정경이 칼끝에 있었다.

상단전의 심상을 유형화하여 실제로 펼칠 수 있다는 오걸의 절초였다.

정에서 동으로, 동에서 정으로.

힘의 방향을 비롯해 바람과 소리까지도 진무신검이 다룰 수 있는 흐름 중 하나였다.

쩌어적!

백야흔의 사자후가 위로 솟구치자 구름의 중앙이 뻥 뚫렸다.

“가세하지.”

진무신검은 언제 후들거렸냐는 듯 서문경 옆으로 붙었다.

이검일체.

서로 다른 두 검이 똑같은 무류(武類)를 담은 채 휘둘러졌다.

아니, 조금씩은 달랐다.

서문경은 직선적인 절초에 적합했고 진무신검은 극한의 화경인 태극의 검을 펼쳤으니까.

그 사이를 메우는 건 화려한 검을 지닌 검사, 연준호였다.

“……귀찮은 것들이!”

백야흔의 눈동자에 적의가 한껏 담겼다.

서문경과 진무신검, 무영신투야 떼어 내기 불가능할 정도로 고수였으나 연준호는 그렇지 않았다.

단신으로 싸웠다면 십초지적.

백야흔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한 줌의 핏물로 만들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연준호는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 알았다.

‘경이와 노선배의 합격이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하면 돼.’

어찌 된 영문인지 서문경이 진무신검의 검법을 흉내 내고 있었다.

서로 성향이 다른 데다 흉내가 완벽하지는 않아서, 검로가 맞물리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때마다 연준호의 검기와 무영신투가 끼어들었다.

“……귀찮게!”

무공을 모른다지만 백야흔에게도 수많은 경험이 있었다.

서문경과 진무신검의 합격 사이에 완벽하게 맞물리지 않는 지점.

티끌만 한 허점을 강대한 힘으로 찍어 누르면 틈이 나올 만하다는 것을 진즉 알아차렸다.

하지만 저 날파리 같은 매화검기와 천잠사가 그 사이를 메웠다.

“크윽, 이놈!”

백야흔은 판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콰앙!

백야흔이 왼발로 땅을 구르자, 서문경은 모래 먼지를 경계하며 검을 뒤로 수습했다.

운룡대팔식을 보법으로 승화한 일초.

공간을 접듯이 움직인 탓에 한순간 진무신검의 품이 비었다.

백야흔이 안광을 부라렸다.

그의 입가에 얼핏 득의만만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

서문경은 곧바로 방어 초식을 취하며 무릎을 굽혔다.

백야흔 특유의 묵직한 공격이 오더라도 어떻게든 막을 수 있도록, 최대한 자세를 안정적으로 굳혔다.

아주 극히 짧은 순간.

백야흔의 공격이 예상 밖의 형태로 변형했다.

파앙!

‘……장풍?’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붙여진 바람이 거대한 철퇴의 형태로 날아왔다.

그 사이로 묵색의 기운으로 빚어진 뇌전이 번뜩였다.

막아 내도 뇌전이 내상으로 스며들 터.

‘진무신검의 용태가 좋지 않아서, 피한다는 보장이 없어.’

서문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무예십팔반의 가전무공, 그리고 천주심경부터 시작하여.

무공사전을 통해 배운 운룡대팔식과 대주천복마검, 그리고 지금의 태허검결에 이르기까지.

서문경은 많은 것을 배웠다.

타고난 성품에 비해 너무나도 과한 은혜였다.

그래서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여기서 꺾일 순 없어.’

서문경은 다른 무공에 배분하느라 아꼈던 모든 내공을 검에 밀어 넣었다.

그 순간, 백야흔이 휘두른 풍압이 전신에 부딪쳤다.

“커억……!”

단단한 돌덩어리가 부딪친 것만 같았다.

부러지고 금이 가 흉이 진 가슴뼈가 완전히 박살이 난 듯했다.

하지만 밀려나지는 않았다.

천근추의 수법으로 애써 자리를 지키려 노력한 결과였다.

풍압 따위에 밀려 나갔다간 백야흔이 바라는 대로 합격이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경아!”

“……!”

연준호와 진무신검이 서둘러 검을 휘둘렀으나 일방적이던 기세가 한풀 꺾인 지 오래.

백야흔은 뒤로 물러나며 호흡을 정돈했다.

이윽고 서문경을 슥 쳐다보니.

“아직 멀었다.”

스윽.

입가를 뒤덮은 피를 닦아 내며 서문경은 은연중에 찾아온 심마를 억지로 밀어냈다.

공포도 죽였다. 자신의 오만함을 탓하는 증오도 죽였다.

대신에 백야흔을 독기 깃든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걸 보며 백야흔이 말했다.

“제법 쓸 만한 눈이구나.”

그러나 그뿐이라는 듯, 백야흔은 권태감이 짙게 묻어 나오는 표정을 내비쳤다.

“과거에는 너 같은 놈들이 많았지. 어중이떠중이부터 시작해서 자칭 협객이라 부르짖었던 검객, 마지막 적이었던 여동빈까지……. 나를 반드시 죽여야겠다며 날을 들이밀었어.”

백야흔은 두 손바닥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오만이 아니다.

단순한 여유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 시절의 그들이나, 너나 다를 바 없어 보이는군. 심지어 저 도둑놈한테 독과 폭약을 당한 나한테도 밀린다면 말이야.”

백야흔이 웃었다.

“현 시대에서 너만 한 검객이 남아 있다는 건 인정하마. 하지만 그뿐이다. 너로서는 날 이길 수 없어.”

“…….”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놈치고는 분발했다. 그러니.”

“그러니, 뭐.”

서문경은 입 안에 뭉친 핏덩이를 뱉어냈다.

“그깟 허세가 통할 것 같으냐? 아직이다. 아직 멀었어.”

서문경의 칼에 검강이 맺혔다.

그 빛이 처음에 비하면 불투명했으나 끊어지지는 않았다.

그러고서 선언했다.

“열 초식 안에 네 목을 베겠다.”

“허, 미친놈이었구나.”

백야흔이 히죽 웃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깊은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무영신투에게 당한 치명상도 문제지만, 저놈은…… 확실히 이상하다.’

약관도 되지 않은 인간이 저런 경지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진무신검의 검법을 어렴풋이 따라하는 것조차 기이했다.

저건 천재라는 말로 부족했다.

자기처럼 마공으로 빚어진 존재가 아니고서야.

‘잘 구슬려서 물러나 보게 하려는 건 실패했군. 하지만.’

저 합공에 틈이 있다는 건 확실히 깨달았다.

진무신검의 노화는 확실한 약점이었고, 서문경의 검법 또한 원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문검법으로 돌아갔다가는 자신의 힘을 받아 낼 순 없었다.

하물며 이제 끼어든 애송이 정도야!

‘여기서 성가신 놈들을 모두 제거한다.’

백야흔이 주먹을 꽉 쥔 순간.

조금 전부터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던 무영신투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까부터 내 제자랑 하민이가 안 보이는데…… 어디다 둔 거냐?”

“열 초식.”

“……?”

“말했잖습니까, 열 초식 안에 목을 베겠다고.”

서문경은 피로 물든 미소를 드러냈다.

“저런 놈을 잡기 위해선 포석이 많이 필요한 법이지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야흔의 후방에서 주백경과 성하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이 아니라, 거대한 창을 든 채로.

여태껏 기척을 숨긴 채 기회를 노리고 있던 두 무인이 백야흔에게 창을 내질렀다.

서문경은 그것을 보고서.

“……후우.”

어느 때보다 숨을 깊고 정심하게 골랐다.

운룡대팔식과 대주천복마검, 태허검결을 합한 일검을 펼치기 위해.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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