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흔 (8)
관도처럼 잘 정돈되어 있는 길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불구불한 비탈길.
남들이 편하게 정돈된 길을 걸을 때, 진무신검은 미련하게 비탈길로 걸었다.
더욱 멍청한 것은 그 동안에 후회를 품었다는 것.
그럼에도 계속해서 비탈길을 올랐다는 것.
“……상관하지 않아.”
진무신검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들이 미련하다고 손가락질해도, 남의 일에 관여하다가 한 팔을 잃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오로지 믿는 길을 향해 정진했다.
세상을 보고 눈 뜨란 선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연단(鍊鍛)의 일생이 진무신검이라는 무인을 벼렸다.
후웅!!
진무신검의 상념이 이어지는 동안에 백야흔이 주먹을 휘둘렀다.
거목을 일거에 무너뜨릴 만큼 강대한 풍압이 살갗을 찢어 버릴 듯 날카로웠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엇, 어엇?”
진무신검이 느릿하게 휘두르는 칼 끝.
백야흔에 비해 터무니없이 무디고 약한 베기가 강대한 힘을 무너뜨리고 흩뜨린다.
그 광경에 주먹을 휘둘렀던 백야흔이 되레 경도되었다.
한순간 근육이 움츠러들 정도로 놀라고, 화가 치솟았다.
‘죽어 가는 쓰레기가.’
백야흔에게 있어 강자란 항시 굴강(屈强)하여 쓰러지지 않는 자.
추하게 패하는 일 없이 늘 고고한 위치에 있어야 했다.
무공이나 심법 같은 궁리 없이도 항상 강했다.
하지만 진무신검은 어떠한가?
“후우, 후…….”
다 죽어가는 노인이 입가에서 핏물을 흘려가며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전부.
기백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자로서 가져야 할 품격은 당연히 없었다.
백야흔을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정녕 이놈이 나를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이냐……?!”
백야흔의 허리와 발아래를 무너뜨리던 무인들의 공세가 멎었다.
자길 막아 세우던 서문경마저도 거리를 벌린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감히……!”
백야흔이 평생 경험한 적 없던 굴욕이 전신을 스쳤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평생 궁리나 수련 따위 해 보지 않은, 선천적인 강자로서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었다.
‘지켜보고 싶다.’
‘태극혜검의 정점이 어떤 것인지 두 눈으로 담을 기회야.’
전생에 숱한 고수를 봐온 서문경조차도 가만히 서 있을 정도이니 다른 이들이라면 어떻겠는가?
절대고수의 일검을 눈으로 담는다는 경의와 존경심.
천하제일의 기예를 향한 열망이 무인들을 멈추게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괴물로 태어난 이는 알지 못했다.
“후회하게 해 주마!”
백야흔의 연격이 진무신검을 향해 쏟아졌다.
스치기만 해도 땅이 파이고 바위가 깎여 나갔다.
빈사에 이른 진무신검의 육신으로는 받아 내기 어려운 힘이었다.
태극혜검의 유유무극으로도 조금씩 상처가 쌓였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
백야흔이 이를 악물고서 전심전력을 다했다.
화산의 협로가 직선으로 깎여 나가고 있었지만, 진무신검의 모습에는 변화가 없었다.
능수능란이라는 단어가 부족하다.
사량발천근이나 화경의 기예조차 진무신검의 기량에 빗댈 수 없었다.
“완전히 닿질 않는구만. 젠장, 저런 걸 할 수 있으면 진즉 하던가.”
무영신투의 툴툴거림이 적막해진 화산의 정상을 뒤덮었다.
그만큼 백야흔의 일격은 진무신검에 의해 고요히 파훼되고 무너졌다.
가끔 진각으로 땅을 지르밟는 것 외에는 싸우고 있는 것마저 모를 정도였다.
“대체 뭐냐, 이런 건…… 이런 것은…….”
무한한 체력을 가진 백야흔조차 더운 숨을 내쉬던 그때.
진무신검은 입술을 달싹였다.
“심상에 태극을 담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뭐?”
백야흔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주변의 무인들도 자연히 귀를 기울였다.
진무신검의 무론이라면 금과옥조 같은 것일 테니까.
듣기만 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그 내용은 터무니없이 광대했다.
“내가 태허(太虛)라면…… 태극을 자연히 다룰 수 있지 않나.”
“헛소리를!”
아무리 배운 것 없는 백야흔이라도 무론의 기초는 알았다.
태허는 즉 자연기.
사람 하나를 이루는 소우주가 아니라 대우주(大宇宙).
자기 자신이 하늘이란 소리니, 대명의 천자에게 반역이나 마찬가지인 소리였다.
그러나 진무신검은 어깨를 펴고서 선언했다.
“일생으로 증명할 것이다.”
한쪽 눈을 완전히 뒤덮은 피, 과거에 완전히 잃어버린 왼팔.
진무신검에 비해 백야흔은 조금 지친 기색이 있을 뿐, 깊은 상처라곤 하나도 없었으니.
진무신검은 패자의 행색을 하고 있음에도 당당했다.
“서문 공자.”
“예.”
“혼원을 검에 담을 수 있다면 만물(萬物)을, 만종(萬宗)을 태극 아래에 둘 수 있다고. 내 일생에서 가르침을 얻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랬군, 그랬어.”
진무신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맺혔다.
남들이 보기에 우둔하고 미련한 일생.
백야흔에게 죽기 직전까지 내몰려서야 그 우둔함과 미련함에 의미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한 팔을 잃고 지병을 얻었으나, 아이의 일생을 구제하고 병자를 낫게 하지 않았나.’
태극의 가르침이 어렵다고 하되, 멀지는 않다.
음과 양.
어려움과 고통이 있어 성취와 만족이 있었다.
진무신검의 일생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후회와 아쉬움이 있었으나 늘 그렇지는 않았다.
진무신검이라는 무인, 작디작은 소우주가 천하라는 대우주의 안정을 위해 발버둥쳤다는 증거이니.
“……후.”
상단전의 심상에 기거하고 있던 무거운 태극을 버렸다.
대신에 일생을 반추했다.
평생의 발버둥과 후회, 오욕과 칠정을 음과 양에 넣고서 천천히 휘돌렸다.
도경과 남에게 배운 태극이 아닌, 일생으로 보고 경험한 태극.
그 깨달음을 검에 담았다.
스으윽…….
느릿하게 움직이는 검에 백야흔의 주먹에 얽혔다.
누가 봐도 칼날이 부서질 듯 휘어졌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이까짓!”
백야흔의 팔뚝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쇠기둥을 찌그러뜨리고도 남을 악력이 담긴 주먹질이었으나, 진무신검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버텨 냈다.
도리어 화경의 기예를 손목에 실었다.
스슷!
힘의 방향을 조금 뒤트는 것만으로 백야흔의 몸이 반원을 그렸다.
크게 회전하여 무게중심을 잃은 그에게 진무신검이 검을 내질렀다.
촤자작!
“……!”
백야흔의 얼굴에 격동하는 감정이 스쳤다.
지금까지 어느 도검도 찢지 못한 피부와 살점을 진무신검이 꿰뚫은 것이다.
무영신투가 흩뿌렸던 독 때문에 피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명백했다.
‘닿는다!’
‘목을 벨 수만 있다면……!’
무인들은 진무신검의 검에 담긴 것을 보고서 주먹을 꽉 쥐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상단전 심상 혹은 의념절기.
절대고수만이 펼칠 수 있다는 필살의 일격과 진무신검의 검은 무언가 달랐다.
누군가를 반드시 죽인다는 의지가 없었고 최강의 검형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저 검에는 일생이 있었다.
진무신검의 일생이 담긴 소우주가 담겨 있는 듯했다.
“……후우.”
진무신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 덕택에 백야흔을 벨 수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체력이 부족했다.
‘왜 항상 이런 것은 늦게 찾아오는 것인지.’
그토록 품었던 고민이나 미련, 후회에 이런 의미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괴로워하지 않았을 텐데.
진무신검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러다 불현 듯 한 가지 호기심이 들었다.
“어디 얼굴이나 보자꾸나.”
“……!”
진무신검의 검이 갑자기 위로 치솟자, 백야흔이 삽시간에 턱을 뒤로 당겼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갓과 체구를 뒤덮은 펑퍼짐한 옷.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가리려는 옷차림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옷이 찢어질수록 각질이 가득한 피부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던 시도에 백야흔이 깊은 분노를 드러냈다.
“놈……!”
“언제까지 얼굴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진무신검의 물음에 백야흔이 재차 고함을 질렀다.
아니, 정확하게는 지르려고 했다.
스윽, 서걱!
운룡대팔식을 펼쳐서 접근한 서문경이 갓과 상의를 자르기 전까지는.
“괴, 괴물인가?”
“세상에 저런 사람이 있을 줄이야!”
진무신검의 경지에 경탄하던 무인들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도 그럴 것이, 백야흔의 외견은 평범한 사람과 달랐다.
애초에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네놈.”
백야흔은 가만히 서서 서문경을 노려보았다.
몸을 가리려는 시도는 하지도 않았다.
거대한 체구를 가득 채운 비늘.
얼굴의 이목구비는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에 가까웠다.
서문경은 히죽 웃으며 백야흔의 외견을 손가락질했다.
“이제야 시원하겠네. 여름이잖냐?”
“네놈……”
“전부터 지존이니, 강자이니, 인간도 아니면서 사람의 칭호에 집착하는 게 같잖기는 했어.”
툭, 툭.
서문경의 칼끝이 백야흔의 비늘을 쿡쿡 찔렀다.
이런 몸을 가지고도 지존 노릇한 것이 부끄럽지도 않냐며, 서문경의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북적 애들도 이걸 아나? 모르겠지. 우리 대장이 이런 꼴인 걸 보고도 따르진 않을 테니까.”
“……닥쳐라.”
“용진명 그놈도 인신공양을 계속 치렀으면 볼만 했을 텐데 말이야.”
“닥치지 못할까!”
백야흔의 고함이 화산 정상을 휩쓸었다.
무인 중 몇몇이 귀를 붙잡고 쓰러질 정도였으나 서문경은 멀쩡했다.
“뭐?”
그것이 백야흔의 과거를 자극했다.
꽈아앙!!
한순간 짓밟은 진각에서 이어지는 일격.
진무신검에게 휘두른 것보다 두어 배는 강맹했으나, 서문경의 눈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저 왼손으로 고서를 펼치고서 몇 마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투로가 너무 단순해.”
검견불퇴에서 이어지는 일검적심.
서문검법의 절초가 백야흔의 일격을 빗겨 내고 사혈을 찔렀다.
카앙!
비늘이 워낙 단단하여 칼이 박히진 않았으나 진무신검의 눈가에 이채가 일어났다.
“허어…… 그사이에 엿본 건가?”
진무신검이 어렴풋이 깨달은 검의 깨달음.
혼원 혹은 태허에 가까운 기예가 서문경의 검로에 얼핏 섞여 있었다.
그러나 백야흔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길길이 날뛸 뿐이었다.
“이놈!!”
왼발을 축으로 한 철산고.
단순하지만 저 몸으로 펼치면 장강의 흐름을 바꿀 정도로 강대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고도 남을 터.
서문경은 무공사전을 흘낏 쳐다보았다.
[태허검결]
‘좋아.’
눈으로 보고 어렴풋이 이해한 진무신검의 깨달음이 무공사전에 적혀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