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25화 (123/250)

백야흔 (7)

“흥, 이깟 다 죽어가는 노인네가!”

백야흔의 입술이 한쪽으로 비틀어졌다.

과연 그 말대로 진무신검은 머지않아 스스로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보폭이 불규칙하고 오금이 파르르 떨렸다.

입가의 핏물은 수염까지 적셔서 볼썽사나웠다.

하지만 고개마저 숙이진 않았다.

진무신검의 시선이 하늘에서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낙하하는 매화잎으로 향했다.

“돌고 돌아 태극.”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서 옛일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리려고 했다.

오십 년도 더 된 일이라 수면 아래의 그림자처럼 흐릿한 기억이었다. 추억인지조차 불분명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태극이란, 무(武)의 요체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천지. 세상을 이루는 테두리요 근본으로 보아야 한단다.

누군가가 진무신검의 귀에 속삭였었다.

그때는 저 뜻을 알지 못했다.

세상을 바르게 사는 것만으로 힘들어서, 그날도 무당산 아랫마을의 노인을 돕느라 많이 지쳐 있었다.

‘……발이 질질 끌리는구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피가 질척거려서 검을 쥔 손이 미끌거렸다.

시야도 흐릿하여 분진 안쪽의 백야흔을 좇기가 힘들다.

귀는 아까부터 멍해져선 제대로 소리를 잡아내질 못했다.

그사이에 백야흔의 주먹이 휘둘러졌다.

“죽어라!”

쐐애액!

분진을 단번에 밀어젖히는 힘.

권압(拳壓)만으로 대기를 양옆으로 찢었다.

낭왕이라 불리는 후배마저도 저런 건 흉내조차 내지 못하겠지.

진무신검은 피로 붉게 물든 눈으로 백야흔의 일격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서 뒤늦게 움직였다.

“……보아라.”

하늘에서 떨어지던 한 떨기 매화.

아까 전부터 눈에 담았던 잎을 따라서 검을 휘둘렀다.

검기에 이끌리듯 매화잎이 진무신검의 칼끝에 맺혔다.

그걸 본 백야흔이 인상을 찌푸렸다.

노쇠하긴 했으나 오걸 중 일인의 마지막 절초가 저딴 것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그렇다면 단박에 처죽이리라, 주먹에 힘을 더한 순간.

쩌정!

칼끝과 주먹이 부딪쳤다.

누구나 진무신검의 칼이 부러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 줌의 핏물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진무신검의 칼은 불굴했다.

그 끝에 맺힌 매화잎마저도 물기를 간직한 채 찢어지지 않았다.

“감히……!”

백야흔의 눈가가 분노로 붉어졌다.

저깟 늙은이가.

주먹을 막아 내는 것으로 모자라, 저런 쓰잘머리 없는 짓까지 벌였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콰콰쾅!

백야흔이 크게 도약했다.

여태껏 자길 가로막던 무인의 숱한 병장기를 몸뚱이로 쳐 냈다.

그에 맞춰 진무신검이 호흡을 다잡았다.

“……후우.”

깊고 숙하게, 천지간의 기운을 전신에 담듯이.

곁에 서문경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기감이나 상념 따위도 쳐냈다.

천하에 진무신검과 백야흔만이 있었다.

카강, 크그그긍!

쇠붙이에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다.

거대한 석상이나 낙석에 가깝다.

너저분하게 쥐어 짜인 노인의 몸으로 받아낼 무게가 아니었다.

하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진무신검은 손목으로 기교를 부렸다.

“또……!”

백야흔의 미간에 균열이 일었다.

또다시 태극혜검의 유유무극.

지긋지긋한 검법으로 막아서리란 생각에 재차 어깨를 뒤로 젖혔다.

무시무시한 권압이 화산 정상까지 맞닿을 듯 위로 솟구쳤다.

더욱 큰 힘으로 발목부터 부숴 버리리라.

그 생각이 진무신검의 걸음에 멈췄다.

저벅.

진무신검이 걸음을 앞으로 옮긴 것이다.

“정면 승부하자는 거냐?”

“…….”

백야흔의 물음에 진무신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했다.

머릿속에 담은 것은 일생(一生).

듣고 배운 것, 보고 행한 것, 그리고 후회한 것.

그 모두가 진무신검의 스승이었다.

추레하고 부끄러운 것일지라도 일생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걸 반추하자니…… 눈앞의 백야흔이 보이질 않았다.

“나를 무시하는 거냐!”

자존심이 상한 백야흔이 주먹을 강하게 휘둘렀다.

뒤에서 누가 칼을 찌르던 상관하지 않았다.

여기서 당장 진무신검을 처죽이고 나머지도 찢어발겨서 축제를 벌이리라.

그 생각은 첫 걸음부터 막혔다.

“뭐냐?”

“선배가 고민하는 동안 시간이라도 벌어 줄까 해서.”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백야흔의 주먹을 옆으로 흘렸다.

겉으로는 허세를 부렸지만, 손목이 한순간 꺾일 뻔했다.

‘이걸…… 수백 초식이나 버텼다고?’

진무신검의 태극혜검이 얼마나 위대한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직 전성기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들 백야흔은 백야흔.

단신으로 산맥을 부수고 남을 놈이다.

이런 힘을 자신이 올 때까지 막아섰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그러니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였다.

“덤벼, 내가 상대해 주지.”

전생에선 백야흔과 홀로 싸워서 동귀어진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살리리라.

서문경의 얼굴을 본 백야흔이 양주먹을 휘둘렀다.

참으로 무식하고 단순한 수법.

하지만 인간을 초월한 근력과 민첩함을 지닌 상대라면 그마저도 필살이다.

꽈과과광!

대기가 뻥 터져 나가며 서문경과 진무신검을 향해 권압이 폭사했다.

발아래가 떨리고 옷깃이 세차게 펄럭인다.

전생부터 느꼈지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놈이었다.

‘내가 저 몸의 절반이라도 된다면 좋겠네.’

서문경은 실없는 생각을 품고서 검을 쥐었다.

왼손으로는 무공사전을 슬며시 붙잡았다.

운룡대팔식과 대주천복마검.

이번 무림행에서 익힌 신공이 서문경의 경맥을 따라 질주했다.

“이 무슨…….”

백야흔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멀어졌다.

공간을 접듯이 움직여서 검을 휘두르는 서문경.

천하제일의 육신을 가졌다고 자신하는 백야흔이 아니었다면 아예 보지도 못했을 움직임이었다.

주르륵.

백야흔의 팔뚝에 긴 검상이 그어졌다.

그렇게나 빠르게 움직였음에도 예기를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백야흔은 서문경에게 경계심을 품었다.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 나이에 참으로 대단한 성취구나. 하지만…….”

“치명상을 입히긴 어렵겠지. 적마 같은 놈이라면 몰라도 말이야.”

“허, 잘 아는구나!”

“하지만 널 죽일 놈은 내가 아니야. 바로 이 선배지.”

서문경의 말에 백야흔은 크게 웃어젖혔다.

다 죽어가는 노인이 어찌 자길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이제는 가만히 서서 핏물이나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상념에 잠긴 게 아니라, 죽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농담이 과하구나!”

백야흔이 재차 주먹을 휘두르려는 그때.

가만히 서 있던 진무신검이 다시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 * *

“태극이란, 무(武)의 요체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천지. 세상을 이루는 테두리요 근본으로 보아야 한단다.”

진무신검이 아직 소년이던 시절.

당대 무당파 최고수라고 불리던 어르신이 계셨다.

영특하고 재주가 뛰어난 아이들을 돌보는 걸 즐기셨는데, 꼭 마지막 날마다 저런 말을 덧붙이곤 했다.

대부분은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이상하게 진무신검은 저 말이 거슬렸다.

“그럼 뭔가요?”

“음?”

“어르신들께선 태극을 보고 만물이니, 양의니 하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 말에 진무신검의 사형과 스승이 질겁했다.

무당파 도사가 태극을 모른다고 한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어르신은 가만히 턱수염을 매만졌다.

“……글쎄. 나도 모든 걸 알고 있진 않구나.”

“에? 그게 뭐예요?”

“나이가 들었다고, 도경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태극을 안다고 하면 장서각에 틀어박힌 문사가 제일이지 않겠느냐?”

어르신은 말했다.

“세상을 보아라. 네게 주는 숙제다.”

“……네!”

진무신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로부터 어르신의 말에 따라 세상을 보길 갈망했다.

걷고 또 걸었다.

세상엔 희망과 절망이 있었고, 기쁨과 고통이 있었다.

남의 일에 함부로 간섭해서야 후에 크게 돌아올 것을 알았지만 억지로 끼어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태극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힘의 방향이나 균형을 검으로 비트는 법을 알았다.

‘……허나 그것이 태극의 끝은 아닐 터다.’

옛날의 어르신도 이 정도 재주는 하실 줄 아셨다.

그럼에도 모든 걸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면, 그 이후가 있다는 뜻.

진무신검은 한쪽 팔을 잃어서도 세상일에 간섭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청마에게 속아서 자신의 등을 찌른 아이들을 품으로 들이고 가르치거나, 흉작에 시름하는 곳으로 찾아가 돕기도 했다.

누군가가 장난삼아서 이렇게 묻기도 했다.

“선행을 쌓으셔서 등선하시렵니까?”

“……등선이라.”

한때는 그런 것을 꿈꿨었지.

진무신검이 껄껄 웃으며 말하자, 다른 사람이 다르게 물었다.

“등선을 꿈꾸지 않으시는데 왜 이런 사사로운 일까지 도우시는 겁니까?”

“태극을 믿기 때문일세.”

“태극이요?”

“내가 이렇게 힘들면 누군가는 편해지지 않겠나.”

돌고 돌아서 태극.

누군가의 악행이 있다면 진무신검의 선행이 그것을 씻어 내리라는 믿음.

그 말을 들은 문사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노도사라고 하여 수양이 깊으신 줄 알았지만, 생각이 순청하고 맑으셔서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구나.’

‘선행으로 남의 악행을 씻는다니…… 미련한 생각이 아닌가?’

진무신검을 존경하는 사람은 생겼지만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 괴로움을 자청하진 않으니까.

“저러다 팔을 잃으시다니.”

“도운 사람한테 독을 당하셨다는데?”

“세상에, 그러고도 사람을 믿으신단 말인가!”

수양은 깊어졌지만 미련하단 뒷소문을 달고 살았다.

진무신검의 일생은 참으로 미련했다.

느릿하지만 확실한 답을 찾아다니는 길.

“……도착했구나.”

피에 젖은 진무신검은 입술을 달싹였다.

“내 마지막 여로에.”

* * *

카앙! 스르륵.

백야흔의 주먹에 담긴 힘이 진무신검의 칼끝에서 흩어졌다.

“어?”

얼이 빠진 목소리가 백야흔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주먹에 닿는 무게가 없어서였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태극혜검조차도 티끌의 힘까지 흩어 내지 못했거늘.

그렇게 재차 다시 권각술을 펼쳐도.

“어엇, 엇?”

힘이 진무신검에게 닿지 못하고 흩어졌다.

참으로 신묘한 일인지라, 백야흔마저도 분노가 아니라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신비한 무공사전을 쥔 서문경에게는 또렷이 보였다.

‘이것이 무당파 무학의 완성인가.’

태극혜검이 낳은 심상.

진무신검의 일생이 만든 신공이 칼에 온전히 실려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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